“자, 빵봉지부터 뜯읍시다.”
“이걸 다요? 이게 모두 몇 개인데요?”
“몇 개 안 돼. 1천 개.”
<font color="#00847C">수북하게, 눈에 띄게… 김탁구식 빵 진열의 요령</font>
새벽부터 장대비를 뿌려대던 비구름이 사라지고 해가 반짝 뜬 7월2일 오후. 충북 청주 수암골에 위치한 한국방송 촬영장을 찾았다. 드라마의 주된 배경인 팔봉제빵점이다. 극중에선 인천에 있는 빵집인 이곳은 주인공 탁구(윤시윤)가 제빵인으로 꿈을 키우는 중요한 장소다. 드라마 소품팀이 돼 직접 소품도 만들고 소품 세팅도 해볼 요량으로 찾은 이곳에서 첫 번째 임무를 맡았다. 역시 빵과 관련된 일이다. 한국방송 아트비전의 최재현 소품감독이 제과점 한쪽에 가득 쌓인 빵상자를 기자 앞으로 밀어준다. 한 제빵업체가 빵집 촬영이 있을 때마다 협찬해주는 빵이다.
1980년대가 배경인 드라마답게 빵은 그 시대 유행하던 모양 그대로다. 누렇고 딱딱해 보이는 크림빵, 카스텔라, 단팥빵, 소보로빵이다. 척 보기에도 입에서 살살 녹을 것 같은 요즘 빵과는 천지차이지만 어릴 적 먹던 빵이 떠올라 침이 고였다. 케이크 진열장에 들어가는 롤케이크도 먹음직스러워 보인다.
“맛봐도 돼요?” “그럼, 다 먹을 수 있게 만들어온 빵인데. 어제 들어온 빵이지만 3일 정도는 괜찮으니 맛봐요. 근데 별맛은 없어.”
소보로빵을 손으로 떼어 한 입 물었다. 달콤함은 적고 퍽퍽해 목이 멘다. 눈과 달리 혀는 옛날식을 반기지 않았다. 식탐을 버리고 미련 없이 작업에 뛰어들었다. 기름기가 묻으니 손엔 비닐장갑을 끼고, 쟁반엔 유산지를 깔았다. 개별 포장된 1천 개의 빵을 종류별로 쟁반에 담는 일은 혼자 해선 끝이 없다. 사진을 찍던 사진기자가 카메라를 내려놓고 동참했다.
빵을 진열하는 덴 요령이 필요하다. 적은 양의 빵을 많아 보이면서 예쁘게 담아야 한다. 쟁반엔 수북하게 보이도록 빵을 세워 담고, 속이 깊은 바구니는 빵봉지나 유산지로 바구니 속을 채운 뒤 빵을 살짝 얹는다. 카메라 앵글이 잘 걸리는 선반엔 예쁜 바구니를, 카메라가 풀샷으로 제과점 안을 훑어야 눈에 띌 장소엔 쟁반을 올린다. 빵 진열이 끝난 뒤엔 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와 봉지, 상자를 깨끗이 치워야 한다. 스케줄에 따라 끊어 찍는 드라마의 특성상 똑같은 배경으로 다시 연결되는 장면을 찍는 일이 잦아 소품들을 정확한 위치에 잘 놓아야 한다.
진열이 끝나고 남은 빵은 진짜 빵집인 줄 알고 빵을 사러 들어오는 구경꾼들에게 선물로 안겨준다. 드라마 촬영을 위해 갤러리였던 곳을 빵집으로 리모델링한 팔봉제빵점은 촬영이 없는 날엔 빵과 커피를 파는 카페로 쓰인다. “우리 손자가 빵 먹고 싶다는디 빵 안 팔아유?” 손자를 등에 업은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자 소품팀원들이 자주 하는 말인 듯 동시에 외친다. “빵 안 팔아요.”
는 충북 청주와 경기도 평택을 오가며 촬영한다. 방송사 세트가 아닌 지방에서 촬영하다 보니 소품팀 트럭엔 가구, 커튼, 가림막, 페인트 등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물품이 가득 실려 있다. 현대극과 달리 처럼 1960~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은 대여하거나 제작하는 소품이 많아 촬영장마다 소품 차량이 2~3대씩 움직인다. 최재현 감독은 “옛날 가전제품, 생활도구 등의 소품도 많지만 드라마 소재인 각종 제빵 도구 등을 챙겨야 해서 짐도 많고, 손도 많이 간다”고 했다.
소품팀이 하는 일은 다양하다. 간단하게는 세트장에 꽃병이나 가구를 놓는 일부터 복잡하게는 저잣거리에 각종 물품을 늘어놓거나 현수막을 치는 것까지 포함된다. 세트팀에서 세트의 벽면을 세우고 벽지를 칠해두면 세트 안에 필요한 각종 세간과 각 장면에 필요한 소품을 챙기는 게 소품팀의 몫이다. 있어야 할 것을 놓여야 할 자리에 적절히 배치하는 단순한 물품 배치의 의미를 떠나 물품으로 시대를 재현하는 고증의 역할도 담당한다. 구하기 힘든 물품은 직접 만들기도 한다. 사극 팀은 제주도 화장실인 돗통 장면에 필요한 ‘응가’를 만들기 위해 물감을 칠한 인절미를 주물렀고, 전쟁 드라마 팀은 전차를 특수 제작했다.
와 같은 시대 배경을 가진 SBS 도 특수 소품이 많이 쓰인다. 강남 개발사를 배경으로 정·재계 인물들의 욕망을 다룬 드라마에는 화폐, 각종 건설기계와 차량, 옛날 신문 등이 등장한다. 경기도 남양주종합촬영소, 시대극 소품 전문 대여업체, 황학동 시장, 방송사 소품 창고를 뒤지면 웬만한 옛날 물건들은 뚝딱 나온다. 의 소품을 총감독하는 SBS 아트텍 윤창묵 감독은 “사극과 달리 1980년대 같은 시대 배경은 기억하는 어르신이 많아 소품 하나도 허투루 둘 수 없다”고 했다.
7월21일 찾은 SBS 탄현스튜디오엔 드라마의 주요 배경인 건설사 세트가 꾸며져 있었다. 민우(주상욱)와 정연(박진희)이 일하는 만보건설 기획실에는 ‘물자 절약’이라는 글씨가 쓰인 옛날 복사기가 놓여 있다. 전화기, 타자기, 스탠드, 책상 따위도 모두 구식이다. 방에 놓인 흑백사진은 포토숍으로 어렵지 않게 만들어내고, 신문은 국회 도서관에서 옛날 신문을 찾아 원하는 문구를 넣어 컴퓨터 그래픽 작업을 한 뒤 갱지에 인쇄해 사용한다. 종이에 커피물을 먹이면 좀더 그럴싸해 보인다.
자주 쓰이는 화폐는 필요하다고 함부로 만들 수 없다. 2006년에 방송용 소품인 화폐가 시중에 유통돼 문제가 된 적이 있는 만큼 한번 만들어둔 화폐는 수량을 세 엄격히 관리하며 재활용한다. 화폐 뒷면엔 ‘소품용’이란 도장이 낱장마다 찍혀 있다. 에서 사용하는 돈은 영화 에서 썼던 돈이다. 액션 장면에서 필요한 총, 칼, 설탕으로 만든 맥주병 등은 특수효과팀이 다룬다. 옛날 TV에서 바니걸스가 나오는 장면은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냈다. 윤 감독은 “빈 공간을 화면에서 보기 좋게 만들어낼 때 자부심이 생긴다”고 했다.
소품팀이 아무리 고증에 신경 쓰며 소품을 만들어 배치하더라도 눈 밝은 시청자를 피해가지는 못한다. “84학번인 유경(유진)이의 책상에 놓인 책은 2007년에 발간된 책이네요”(), “데모대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배경에 걸린 현수막이 그 당시에 없던 서체인 한컴의 궁서체네요”() 같은 지적은 겸연쩍다. “드라마 촬영이 바삐 진행될수록, 고증이 애매할수록 어쩔 수 없이 놓치는 게 생겨요.”(윤창묵 감독)
요즘 소품팀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무엇일까? 폭염과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다. 이런 날에 야외촬영을 진행하면 소품을 놓고 치우는 일을 수없이 반복해야 한다. 빵봉지 1천 개를 뜯고 기자에게 주어진 다음 일은 야외 선술집 꾸미기. 그러나 밤새 비가 올 것이라는 기상예보 때문에 미리 준비할 수 없었다. 선술집에 필요한 소주병 라벨 붙이기, 메뉴판 만들기, 음식 차리기, 의자와 테이블 놓기 등은 촬영 직전에 날씨를 보고 바삐 준비하기로 했다. 일일 소품팀원으로 참여한 하루 일은 애석하게도 빵봉지 뜯기로 끝나버렸다. “비가 안 오길 마냥 기다려야겠네요”라는 질문에 최재현 감독은 “소품팀은 기다리는 것도 일”이라며 웃었다.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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