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터민 가정방문 학습지도 자원봉사에 뛰어든 2년간의 이야기…검정고시, 생리대, 학원비… 어느 하나 쉽지 않던 삶에 부딪히다
▣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 사진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여기가 너무 썰렁한 거 아닌가?” 대학을 졸업한 지 4개월. 백수 임지선은 괜히 자기 이력서를 내려다보며 별거 없는 자원봉사 경력란을 탓했다. 요즘 시간도 많은데 차라리 자원봉사를 좀 할까? 뭐가 있을까…. 순간, 새내기 때 대학 방송국에서 찍었던 새터민 관련 다큐멘터리가 생각났다.
아, 그때 촬영차 방문했던 시민단체에서 자원봉사자들이 가는 수련회도 같이 갔었는데….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사이트를 찾아봤다. 자원봉사 신청 절차가 간단하기에 바로 신청서를 접수했다. 며칠 뒤, 전화가 왔다. “가정방문 학습지도 자원봉사를 신청하셨죠?” “네.” “자원봉사자 수련회를 다녀오셨다니 교육은 따로 안 받으셔도 되겠어요.” “…(아싸).” “지금 신도림에 사는 학생이 학습지도를 원하고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앗, 이렇게 바로?)… 네, 지역적으로는 괜찮네요.” “그럼 저희가 학생 쪽에 연락해서 같이 만나는 날을 잡아볼게요.” 통화가 끝났다. 걱정이 밀려왔다. 나 정말 하는 거야?
우리, 잘 지낼 수 있을까?
2004년 7월7일
참 더운 날이었다. 땀을 흘리며 시민단체 사무국의 좁은 계단을 올라갔다. 거기서 연실(가명)이와 처음 만났다. 작고 귀여운 인형 같은 아이였다. 체구가 작아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웠는데 스무 살이란다. 생각보다 밝고 명랑하다. 옷도 참 귀엽게 입고. 내가 그동안 새터민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던 걸까? 수녀원에서 혼자 탈북한 여성들을 위해 운영하는 보금자리에 들어가 산다는 연실이. 일단 이틀 뒤에 그곳에 방문하기로 했다. 우리, 잘 지낼 수 있을까?
2004년 8월9일
일주일에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만나 공부를 시작한 지 한 달이다. 학교를 다닌 적이 거의 없는 연실이를 가르치는 일은 쉽지 않다. 일단 알파벳 대·소문자부터 쓰게 했다. 처음 몇 번은 숙제를 잘 해오더니 요즘에는 만날 혀만 쏙 내밀고 안 해오기 일쑤다. 게다가 찾아가면 만날 낮잠을 자고 있다. 오늘도 깨워서 공부를 가르치는데 계속 잠이 덜 깬 표정이다. 내가 못 가르치나? 재미가 없나? 검정고시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답답하다. 급기야 얼마 전에는 만나기로 약속된 날, 10분 전에 전화를 해서 일방적으로 과외를 미뤘다. 나는 이미 집에서 나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늘 찾아가니까 내 시간이 가볍게 느껴지나? 새터민들이 약속을 잘 안 지키고 시간관념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있던데, 연실이도 그런 걸까? 마음이 복잡하다.
2004년 9월6일
공부를 하다 말고 연실이가 서랍 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여줬다. 거기에는 한국으로 넘어와 국정원 독방에 갇혀 조사를 받던 시절에 쓴 시가 있었다. 2004년 설날 아침에 쓴 시란다. 휴지통도 감시받으며 불안한 생활을 하던 연실이의 감정이 그대로 나타난 시를 보며 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장래희망을 기자라고 말해오면서도 이 시대의 고통에 둔감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시 제목은 ‘꿈은 이루어진다’. 연실이가 중국을 떠돌던 시절, 2002년 월드컵을 지켜보면서 ‘꿈은 이루어진다’ 카드 응원에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2004년, 남북 젊은이의 ‘꿈’은 너무도 달랐다.
땡땡땡/ 새날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온다/ 어느덧 새해가 밝아왔다/ 집집마다 창밖으로 하나 둘/ 불빛을 내보이기 시작한다 (중략) 나는 살길을 찾아 두만강에 몸을 실었던 탈북자/ 하지만 지금은 꿈을 위하여 앞으로 달리는 한 소녀/ 그 꿈을 이루기 위하여 오늘날/ 또 하나의 국경을 넘었다/ 대한민국의 국경을…// 대한민국/ 귀에 익고 낯설은 땅/ 정녕 내가 이 땅에서 설을 쇤단 말인가/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땅// 그러나 내 마음이 너무도 외롭고 쓸쓸하구나/ 왜 그럴까/ 자그마한 방안에는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이 외로움과 쓸쓸함은/ 잠시뿐일 것이다// 나는 지금 대학을 다니는 중이다/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인간대학을…// 내 빨리 이 대학을 졸업하고/ 제 세상 밖에 나아가/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열심히 달리고 또 달려보리라 (후략)
2004년 10월15일
요즘에는 연실이와 공부보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많이 한다. 오늘은 북한에 있는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북한에서 언니와 합쳐서 옷이 세 벌뿐이었단다. 연필도 하나씩이었는데 여기 오니까 너무 많다고 웃는다. 연실이는 혼자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갔다. 2년 정도 중국 학생으로 신분을 속이고 살았다. 원래는 엄마와 언니도 곧 넘어오기로 해 기다렸는데 당시에 결혼을 한 상태였던 언니가 자신은 못 가겠다고 울며 전화를 했더란다. 통일되면 만나자며 계속 우는 언니에게 울지 말고 잘 지내라고 의젓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최근 중국을 통해 언니가 아기를 낳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아기가 연실이를 쏙 빼닮았다고 얘기하며 많이 울더라는 소식도 함께였다.
함께 얘기하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학습 진도가 느려져 일단 검정고시 학원에도 등록을 하기로 했다. 기본적으로 새터민에게 지원이 되는 검정고시 학원이 따로 있다는데 거기에 가면 전부 새터민뿐이어서 가기 싫단다. 대신 일반인들이 다니는 학원에 다니려면 개인 부담을 조금 해야 한다. 당장 필요한 돈이 7만원이라며 학원 수강을 망설인다. 백수 처지지만 내가 대신 내주고 싶었다. 슬쩍 운을 띄워봤더니 싫다고 길길이 날뛴다. 괜히 얘기했다. 과외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왠지 서로 서먹해진 것 같아 후회가 많이 됐다.
“저기 탈북자 있잖아요!”
2004년 11월25일
세상에. 연실이가 한국에 온 지 1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까지 생리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다. 도대체 난 그동안 무엇을 했단 말인가. 몸집도 작은 아이가 자꾸 생리대가 작아서 불편하다고 하기에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생리대에 사이즈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냥 처음에 하나원에서 소형을 줘서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단다. 잘 때도 소형을 하고 잤냐고 놀라 물으니 불안해서 두 개를 이어서 했단다. 당장 대형이랑 오버나이트를 사다가 줬다. 북한에서는 천기저귀를 썼다니 모르는 게 당연하다. 당연하지만 분통 터진다. 드러내서 말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이곳은 마치 섬과 같다.
2005년 2월24일
연실이 표정이 평소와 다르다. “무슨 일 있었어?” “언니, 저 오늘 너무 놀라고 무서웠어요.” 학원에 있다가 수업도 안 마치고 집에 와버렸단다. “윤리 선생님이 북한에 대해 설명하다가 탈북자 얘기를 하니까 갑자기 맨 앞에 앉아 있던 학생 하나가 뒤로 확 돌아 저를 가리키며 ‘저기도 탈북자 있잖아요!’ 이렇게 소리를 친 거예요. 순간 몇백 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다 뒤를 돌아보고 선생님도 ‘어디 어디?’ 하면서 둘러보시고…. 창피해서 죽고 싶었어요.” 남한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고 싶다고 돈까지 더 줘가며 그 학원을 택했던 연실이었다. 내가 대신 미안하다고 얘기하며 한참을 다독였다.
그렇지 않아도 4월에 있을 대입 검정고시 날짜가 다가오니 연실이가 부쩍 불안해한다. 게다가 내게도 고민이 생겼다. 지난 1년간 신나게 백수생활을 하며 입사하고 싶던 언론사 시험에도 신나게 떨어졌던 내가 일반 기업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당장 입사를 해야 하니 앞으로 연실이 공부는 어떻게 하나. 주말에 시간을 잘 낼 수 있을까? 우선 불안한 마음에 한 달만이라도 연실이 공부를 대신 봐줄 선생님을 알아봤는데 찾지 못했다. 회사에 얼른 적응해서 짬짬이 연실이를 만나야 할 텐데. 연실이를 다독이면서 내 마음도 다독여본다.
2005년 5월10일
역시! 검정고시에 한 번에 합격을 했다. 그동안 함께 공부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영어도 국어도 수학도 사회도 어느 하나 안심할 수 없었던 시간. 하지만 검정고시에 합격해서 이제 대학에 갈 수 있다는 사실보다 연실이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 더 기쁘다. 합격의 기쁨만으로도 가슴이 벅찬데 오늘 연실이가 내게 더 벅찬 선물을 줬다. 얼마 전에 여행 갔다가 기념품으로 사왔노라며 작은 열쇠고리를 건넨다. 열쇠고리 끝에는 동그란 나무토막이 달려 있었는데 거기에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문구를 새겨왔다. 한동안 거기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무토막만 떼어내 휴대전화에 달았다.
대학 합격 소식에 엉엉 울다
검정고시 합격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대입 준비를 했다. 회사에서 신문을 모아뒀다가 연실이와 회의실에 들어가 논술 및 심층면접 과외를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뒤, 연실이가 대학에 최종 합격했다. 합격을 확인한 순간 회사였는데도 불구하고 엉엉 울었다. 이듬해 대학생 연실이는 리포트를 쓰다가 모르는 것이 있거나 조별 과제가 버거울 때 종종 연락을 했다. 만나서 같이 자료를 찾아보기도 하고 전화로 설명을 하면서 연실이를 응원했다. 그리고 한동안 연락이 뜸했다.
2006년 11월
오랜만에 연실이를 다시 만났다. 연실이는 학교를 한 학기만 다닌 뒤 휴학을 한 상태였다.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기말고사도 아예 안 봤다고 한다. 나 살기도 바쁘다며 신경써주지 못했던 시간이 아프게 다가왔다. 2년 전 ‘그 백수’는 이제 원하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연실이도 자기가 원하던 간호사가 되기 위해 다시 시작할 거라고 한다. 이렇게 질긴 인연이 될 줄 몰랐지만 어느새 우리는 서로의 삶에 깊숙이 뛰어들었다. 앞으로도 우리는 서로가 꿈을 향해 열심히 걸어가는 모습을 계속 지켜볼 것이다. 2006년, 이렇게 우리의 꿈은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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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들어 부쩍 자기 자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으니 자원봉사를 하면 안 되겠냐는 엄마들의 전화 문의가 많이 와요. 새터민을 대상으로 자원봉사를 하면 외국 대학에서 좋은 점수를 받을 것이라는 생각이죠. 우리 아들이 토익이 만점이니까 애들도 잘 가르칠 거라며 3∼4개월만 하게 해달라는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자원봉사자 신청 및 교육·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이영석 간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올해 이 단체에서 교육을 받고 학습지도 자원봉사자가 된 사람은 30여 명. 그중 현재까지 활동을 제대로 하고 있는 인원은 10여 명에 그친다. “가르칠 사람이 원해도 조건이 맞는 적당한 학생이 없어 연결이 안 되기도 합니다. 지방에 사는 새터민들의 경우에는 거꾸로 선생님이 없어서 문제고요. 하지만 막상 연결이 돼도 자원봉사자가 열정만 넘친 나머지 금세 지치고 실망하며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원봉사 시간을 채우려고 왔다가 금방 그만두는 경우도 있고요.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보기 어려운 게 늘 아쉽지요.”
그렇다면 자원봉사자가 새터민 학생을 접할 때 버려야 할 몇 가지는 무엇일까. 담당자들은 입을 모아 “새터민이 남한 기준의 학업 수행 능력이 부족하다고 어린애 취급하려는 일부 자원봉사자들의 자세”를 꼽는다. 실제로 탈북 이후 중국이나 제3국에서 생활하다 들어온 새터민들의 경우 남한의 학생들보다 인생 경험이 더 많은데 어린애로 여긴다면 큰 오산.
“학생이 공부하는 데 장애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려는 자세도 중요해요. 실제로 가족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 주변의 편견 등으로 고민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 부분을 함께 얘기해줄 수 있는 것이 가정방문 학습지도의 장점이자 가장 어려운 점입니다.” 새터민들이 처음부터 자신에게 마음의 문을 열고 매우 고마워할 것이라든지, 학업 성적이 쑥쑥 오를 것이라든지 하는 기대도 실망만 낳을 수 있다. 학생에게 잘보이려고 돈을 들여 선물을 많이 하거나 늘 뭔가를 베풀려고 하는 자세 역시 서로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뿐이다. 최근에는 방과 후 공부방이나 교회에서 운영하는 멘토링 제도 등에서 새터민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하는 손길이 넘치고 있다. 이렇게 선택의 기회가 다양해진 상황에서 “너 나밖에 없지?”식의 자만이나 “날 가장 좋아해야 돼”식의 집착은 금물이다. 새터민의 가정방문 학습지도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싶다면 북한인권시민연합 사이트를 통해 자원봉사 신청서를 내려받아 작성한 뒤 이메일(bongsa@nkhumanrights.or.kr)로 접수하면 된다. 이후 교육과 상담 절차를 거치면 학생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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