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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폭풍’에 몸을 맡기다



남화연 작가의 행위극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에서 ‘움직이는 무대장치’로 열연한 하어영 기자
등록 2010-04-23 16:57 수정 2020-05-03 04:26
남화연 작가의 행위극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에서 ‘움직이는 무대장치’로 열연한 하어영 기자.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남화연 작가의 행위극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에서 ‘움직이는 무대장치’로 열연한 하어영 기자.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사막의 폭풍. 작가 남화연씨의 라는 행위극 프로젝트에 ‘사막의 폭풍’이라는 역할로 참가하기로 한 것은 지난해 말. “아마추어 참가자를 찾고 있다”는 작가의 말을 듣고서다. 참가자가 맡을 역할은 ‘삼나무 폭포’ ‘깨끗한 복도’ ‘여름비’ 등과 함께 존재하는 ‘사막의 폭풍’이라는 ‘무대장치’라는 말도 참가 욕구를 북돋았다.

눈 밝은 사람이라면 ‘사막의 폭풍’이라는 단어만 듣고도 그것이 미국의 이라크전 작전명이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는 등장인물들에게 군사작전명을 하나씩 부여하고 거기에 맞는 몸동작을 스스로 고안하게 한 다음 5장으로 구성된 시나리오에 따라 움직이게 하는 행위극이다. 원래부터 행위극은 아니었다. 작전이름을 땅이름으로 치환해 지도로 보여주고, 대본에 따른 배우들의 움직임을 영상으로 담은 설치작품이었다. 지난해 에르메스 미술상 후보작으로 선보인 이 작품에 호평이 이어지면서, 등장인물 14명의 몸짓과 무대 및 소도구, 음악 등이 어우러지는 공연으로 재탄생하게 됐다.

‘어, 무대장치라고 했는데?’

일이 커진 것은 작가와의 첫 만남 때였다. ‘돌+아이 콘테스트’에 참가하고 유아 프로 에 다람쥐로 출연한 기자의 이력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기자에게 ‘움직이는’ 무대장치를 제안했다. 그리고 등장인물과 동일한 지시사항과 시나리오를 전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을 숙지한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이름이 말하는 추상적 형상에 도달한다. △자신의 정신과 그것을 합일한다. △몸을 움직여 그 형상에 더 가까이 가본다. △복잡한 몸짓은 정제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동사를 몸으로 말해본다. △몸의 치장은 간소하되 상징적인 것을 선택한다. △육체를 뛰어넘기 위해 육체를 바꾸고 버린다.

무대장치 ‘사막의 폭풍’은 총 5장으로 이뤄진 극에서 1장과 2장 사이에 ‘이동하고’, 3·4장에서 소도구처럼 앉아 있다가 5장에서 ‘분다’ ‘춤춘다’ ‘쓰러진다’ 등을 연기해야 했다.

첫 무대연습- “돌이킬 수 없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한 지시사항과 시나리오를 받아들고는 마감을 마친 2월의 어느 날, 서울 홍익대 앞 한 연습실을 찾았다. 14개 작전명과 처음 대면했다.

“‘빙하’는요, 이런 표정이 아닐까요?”

눈빛만으로 서늘하게 만들어버리는 동작. 1945년 미군의 오키나와 침공작전을 의미하는 음산함이 연습실에 가득 찼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팔을 한껏 올려 엉거주춤한 자세로 한 걸음씩 전진하는 ‘복서’는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복서’는 제3차 중동전쟁을 시작하기 위한 이스라엘군의 수에즈운하 인근 공습작전을 뜻했다. 숨 막히는 동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야릇한 눈빛으로 자신의 턱을 쓰다듬는 ‘은색 여우’(2차 대전 독일군 작전), 사뿐사뿐 한 발자국마다 애틋한 기운을 내뿜는 ‘순록’(남아공의 앙골라 공습 작전)도 있었다.

“‘사막의 폭풍’ 차례예요.”

작가의 지시가 떨어졌다. 움직이는 장치라는 생각에 개업식 날 막대풍선쯤을 선보이면 되겠다는 생각은 오산이었다. 입으로 풍선을 부는 시늉은 스스로도 부끄러웠다. 게다가 사막의 폭풍은 등장인물이 쓰러지고 난 뒤 교실 두 바닥이 넘어 보이는 아르코예술극장의 무대를 두 번이나 가로지르는, 동선이 가장 큰 역할이었다. 이제 와 돌이킬 수는 없었다. 잘하고 싶었다.

마지막 연습- “산들바람이라도…”

공연 하루 전, 나는 폭풍은커녕 아직 산들바람도 되지 못하고 있었다. 공연을 망칠 수는 없었다. 두 달 동안 풍선, 치마, 상반신 노출, 쫄쫄이 등 온갖 표현을 해봤지만 사막의 폭풍으로 인정받는 데 실패했다. 나 스스로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를 넘어서서 무언가의 이름이 돼본다는 게 선문답처럼 쉽지 않았다. 결국 마지막으로 노란 천을 목에서 무릎까지 늘어뜨리는 것을 시도했다. 사실 치마를 입었다가 반응이 좋지 않아 목까지 올려 입은 게 우연처럼 합격점을 받은 것이다. “‘분다’는 대목의 음악은 모든 작전명 가운데 ‘사막의 폭풍’에만 존재하는 것”이라는 장영규 음악감독(영화 의 음악감독)의 말은 내 다리를 더 후들거리게 했다. 2007년 반미 무장군을 통제하기 위해 디와니아에서 펼쳐진 미군의 작전명인 ‘검은 독수리’의 유려한 동작이 더 폭풍 같았고, ‘수탉53’(1969년 이스라엘의 이집트 레이더시스템 공격작전)과 ‘푸른 호랑이’(미군의 이라크 바쿠바지역 수색작전)는 내가 할 수 있는 우스운 캐릭터를 그 이상으로 표현했다. 내 몸동작이 스스로도 어색하다고 느낄 즈음 “폭풍 부는 모습에만 집중하지 말고 스스로 힘을 주체할 수 없어 좌충우돌하는 모습도 떠올려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전쟁이 시작과 함께 생물처럼 스스로 방향을 찾아가는 모습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의 속도와 균형이 맞지 않아 뒤뚱거리는 모습을 표현해보기로 했다. 나를 명명하는 이름 속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밀어넣었다.

‘들어간다’의 동작은 뒤뚱거림으로, ‘분다’는 신나게 스텝을 밟으며 극장을 휘젓다가 빙빙 도는 동작으로 결정했다. 여기서 고백해야겠다. 작가로부터 단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은 ‘춘다’의 동작에 대한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춤을 추는 5장은 작전명들이 ‘소멸하기 전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공간을 이동하며 한곳에 모인 작전명들은 마치 죽기 전 발악하는 동물처럼 필사적으로 춤을 춘다. 그리고 끝을 맺는다. 그 순간 나는 자줏빛 전사나 코브라처럼 뭔가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춤을 추고 싶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춤을 췄던 기억은…, 노래방뿐이었다. (저를 보며 피식 웃었던 관객분, 맞습니다, 막춤입니다. 죄송합니다.)

공연- “이 뭣고”

4월10·11일 2회 공연, 좌석은 매진된 듯 관객이 들어찼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시선에 정신을 놓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 때쯤, “띵, 달그락달그락” 음악이 시작되고 어디선가 한숨이 들려왔다. ‘빙하’의 연기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나는 하늘을 날아(날았다고 확신한다) 약간은 민망하게 상반신을 드러내는 노란색 천을 휘날렸던 이미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막의 폭풍이 되자’는 계속된 다짐은 ‘이 뭣고’를 되뇌던 선승처럼 나를 사막의 한가운데로 몰아갔다, 는 말은 얼토당토않고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다만 내 눈앞에서 끔찍한 전쟁명들이 우스꽝스런 몸짓으로 들어가고, 돌고, 춤추고, 쓰러지고, 죽어갔던 것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시간, 행위극보다 더 행위극 같은 또 하나의 군사작전이 거짓말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천안함. 누가 무엇을 위해 헛웃음만 나오게 하는 상황을 만들어내는지, 누구를 위해 그런 결과를 가져왔는지. 그래서 공연은 더 슬펐다.

공연이 끝난 뒤- “반전극인가요?”

작가에게 남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이것은 반전(反戰)극인가요?”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답이 돌아왔다. “그런 것 같으세요?”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답이 쉬웠을지도 모른다. 내가 가진 이름들, 나를 둘러싼 이름들, 그것의 명명과 움직임 속에서 그저 나는 편안함과 때로는 행복감을 느껴왔다. 무엇일까, 이 느낌은. ‘작전의 희곡’이자 ‘작동하는 놀이’라는 중의적 의미 속에 권력의 잔인함이 내포됐다는 , 작품 설명에 앞서는 이 슬픈 느낌은 뭘까.

질문은 끊이지 않는다. 그래서 기자가 뛰어든 세상은 무엇이었나, 대학로의 아르코 소극장인가, 저 먼 전장의 포화 속에서 사라져간 작전명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극장에서 단 이틀 60분 동안만 이 세상에 존재하고 소멸한 이 독특한 작전명 ‘오퍼레이셔널 플레이’였나. 아니면 답답하고 어둡기만 한 백령도 앞바다의 수색작전이었나.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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