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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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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조사 | 이재명

등록 2005-04-06 00:00 수정 2020-05-02 04:24

▣ 이재명/ 참여연대 투명사회팀장


한 차례 인사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 청와대로서는 두 눈 벌거니 뜨고 속절없이 당한 꼴이니 쓰나미도 이런 쓰나미가 없을 거라 여겨질 만하다. 이를 두고 대통령은 자신을 ‘해일에 휩쓸려가는 장수에게 손 한번 건네지 못하고 바라만 봐야 하는’ 주군의 심정에 비유하기도 했다. 주변 참모들 역시 억울하긴 마찬가지인 듯하다. 시민단체가 청와대 인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고 비아냥대는 소리가 들리는 걸 봐서 그렇다. 불만과 불편함을 객쩍은 농담으로 어설프게 넘기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정색하고 반발하기도 조금은 민망하다. 하지만 적어도 권력이 그 권한에 비례해 책임을 지는 것이 민주주의의 원리라면 최근의 인사 파문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책임을 느끼고 있는지는 묻고 싶다.

인사 파문 뒤 “청문회 개선” 약속하지만

대개는 일련의 사건을 우리 사회의 성숙을 위한 과도기적 현상으로 바라본다. 과거의 행위를 현재의 가치기준으로 판단하고 적용하면서 발생하는 불가피한 진통이라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최고위 공직자 후보군은 대부분 70, 80년대 공직을 시작한 인물이거나 기득권 집단에 속해 있었다.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는 이들 중 위장전입해서 땅 사지 않은 사람은 바보 축에 속했을는지도 모른다. 또한 공직에 있으면서 알게 된 개발 정보를 비록 본인은 아닐지라도 주변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가슴에 묻어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의 결정적인 흠결이 되고 있으니 당사자들은 애꿎은 시대의 희생양쯤으로 자위할 법하다. 이쯤 되면 공직자의 과거 부적절한 행적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는지 혼란스럽다. 과도기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체념하기엔 그 사회적 비용 역시 만만치 않다. 따라서 그 기준을 세우기 위한 사회적 공론화와 이를 통한 합의의 도출이 필요함에도 정작 현실에서 이같은 움직임을 찾기는 힘들다.

한편으로 부실한 인사 검증에 대한 비판도 이어진다. 때문에 언론도, 정부도, 국회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책 마련에 분주해 보인다. 그리고 예의 그렇듯 너도나도 ‘시스템의 개선’을 말한다. 틀리지 않는 접근이다. 하지만 왠지 너무 즉자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나치게 단선적이고 단편적인 접근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가장 유력한 대책으로 떠오르고 있는 ‘인사청문회 확대’ 주장만 해도 그렇다. 현재와 같은 청문회 운영방식으로는 부실 검증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철저한 사전조사 절차 없이 단순히 청문회의 대상에 올려놓는다고 해서 도덕적 흠결이 검증되지 않는다. 인사청문회 제도가 가장 활성화돼 있는 미국은 청문회를 위한 사전조사 기간이 인사 검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오히려 청문회는 사전조사를 근거로 문제가 되는 행위의 동기·목적·정황 등을 따져, 이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임명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는 기능을 한다. 즉, 청문회는 사실관계를 새롭게 밝혀내는 역할보다 확정된 사실관계를 토대로 공직 적격성에 대한 판단을 하게 된다. 앞서 던졌던, 새로 공직에 임명될 후보자의 과거 흠결이 어느 정도까지 용인될 수 있는가에 대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는 역할이 바로 인사청문회와 국회의 인준표결이다. 이는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청문회 운영 실태는 인사권자가 제출한 납세·병역·재산 등에 관한 단순 현황만을 근거로, 단 며칠 사이에 숨겨진 사실, 드러난 사실의 진위까지를 따져야 하는, 그래서 기껏해야 후보자의 학창시절 성적표나 공개하는 맥빠진 청문회로 그치고 있다. 결국 인사권자와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조정하고 조율해야 할 국회가 끼어들 틈이 없게 되거나 혹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함으로써, 막대한 사회적 비용 지불은 물론 정부의 신뢰 적자를 낳고, 국민들은 짜증과 혼란만을 느끼게 된다. 새롭게 설계될 인사청문회 제도는 단순히 대상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이같은 기능과 역할이 이뤄지도록 사전검증 절차의 강화, 인사청문회 운영방식 개선 등이 함께 고민되고 진행되어야 한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과거 ‘인사가 만사’라고 한 YS의 말이 두루 회자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자신의 무능을 덮기 위한 레토릭이었을지 몰라도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듯 현 정부가 ‘참여’와 ‘시스템’을 강조하는 것은 틀리진 않지만 수사로 그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언론과 시민단체의 외부 검증을 ‘귀찮은 트집잡기’ 정도로 여기거나 단편적 문제를 지나치게 부각시킨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고, 인사 실패가 정권 실패, 나아가 정부 실패로 비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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