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인/ 문학평론가 · 황해문화 주간
59주년 8·15 경축 기념사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위를 국회에 설치할 것을 제의했다. 대통령의 의중이나 의지가 어느 정도인가는 짐작할 수 없지만 ‘국가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와 불법행위’까지도 포함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는 언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바야흐로 더 심화된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의미 있는 진전이 기대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일까.
방해와 은폐보다 더 큰 난제
김대중 정부 시절 의문사진상규명위와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설치되고 제주 4·3항쟁 피해자에 대한 신원 문제가 구체화된 것도 커다란 진전이었고, 그 전 김영삼 정부 시절에 광주청문회가 열리고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된 것 역시 역사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서의 이같은 과거사 진상규명을 위한 시도들은 늘 뭔가 미진한 구석을 남기고 서둘러 봉합되고 말았다. 왜인가. 철저한 진상규명을 가로막는 무엇인가가 늘 강력하게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과거 정부 자체가 잘못된 과거 역사와 적든 많든 연루되어 있었다는 점, 과거의 범죄자들이 당시 상황에서도 정계·언론계·문화계·경제계 등에서 두루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는 점이 책임자 처벌이나 사죄는 물론이거나와 진상의 올바른 규명과 역사적 평가를 위한 자료의 입수와 확인조차도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큰 원인은 우리의 이른바 ‘과거사’는 파고들어가면 갈수록 방해와 은폐의 시도를 넘어선 더 큰 난제에 부딪치게 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거기엔 대한민국이라는 한 국가의 정체성의 문제가 가로놓여 있기 때문이다.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원회가 3공화국 시절 3선개헌 반대운동을 그 심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시사적이다. 5공이나 유신 시절의 반군부독재 민주화운동 과정에서의 문제들은 현존하는 가해세력의 반대와 방해만 적절히 제압할 수 있으면 진상규명과 책임자 확인 및 사죄(처벌까지는 아니더라도)까지는 얼마든지 ‘민주화운동’의 이름으로 밀고 나갈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그 이전으로 더 올라가면 문제는 간단해지지 않는다.
마침 며칠 전 한-일협정 과정의 진실을 새롭게 입수한 비밀문서를 토대로 재추적한 한 방송사의 8·15 특집 프로그램에서 일제의 범죄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이 ‘보상’으로, ‘청구권’으로 바뀌어 흐지부지된 과정에 미 중앙정보국(CIA)의 결정적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이 ‘일부’ 드러났다. 조금 더 거술러올라가보자. 이제는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4·19 직후 이승만의 하야에 대한 미국의 개입 문제도 그냥 넘어가고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수많은 민간인 학살 문제 역시 가슴 아프고 억울하지만 일단 넘어가보자. 그리고 우리의 눈길을 저 복잡한 해방 정국에 고정해보자.
점령군으로 진주한 미군정이 남한의 유일한 권력기관으로 자임하고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 자격으로만 입국시킨 사실, 친일 관료들을 행정기관에 그대로 유임시킨 사실, 남로당은 물론 중도적 민족주의 정파들까지도 탄압하고 대구에서 시작된 10월항쟁, 제주에서 일어난 4·3항쟁 등 당시 민중의 민족적이고 민주적인 항거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결국 친일파를 등에 업은 이승만 정권을 반통일적 단독정부에 들어앉힌 사실…. 아마도 민족분단을 포함해서 우리가 아는 ‘진상규명’이 필요한 모든 과거사들은 이 역사적 사실들의 갈피 속에 전부 숨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집단학살, 요인암살, 법살, 테러, 쿠데타, 투옥, 고문, 추방…. 이 모든 것들이 해방 정국에서의 반역사적인 이승만 정권의 수립 과정 속에 들어 있고, 이때부터 1980년대 5공 정권까지의 모든 숨겨진 ‘사건’들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 비극적인 국가의 탄생
지금 대한민국은 우리에게는 어차피 그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숙명이지만, 그 뿌리는 영광스럽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대한민국은 미군정과 친미파와 친일파와 정상배들이 세운 나라였다. 진정한 과거사 진상규명은 이 간단한 역사적 사실의 확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또 이 사실에 이르지 못하는 진상규명은 전부 가짜다. 하지만 여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만 있다면 이제부터의 대한민국은 진정 위대한 나라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과연 노무현 정권의 과거사 규명 의지는 여기까지 가 닿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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