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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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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기 철학

등록 2006-10-20 00:00 수정 2020-05-02 04:24

▣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MP3 2탄이 아니다. 기억할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지난 4월5일 발행된 604호 ‘정치의 속살’에서 MP3가 소재로 등장한 적이 있다. MP3는 나의 자랑거리였다. ‘도전인터뷰’를 하는 김창석·김보협 선배와 인터뷰 기사를 자주 쓰는 편인 김영배 선배가 종종 빌려갈 만큼 부서에서도 인기였다. 아날로그보다 조작이 약간 더 까다롭다고 할 수 있지만 녹음의 생명인 음질은 비교할 게 못 된다.
아날로그엔 신화가 있다. 안전하다는 점이다. 이 이유 하나로도 아날로그를 고집하는 이들이 많다. 물론 이들 대부분은 디지털을 다루는 데 자신 없음이 더 큰 이유일 것이다. 아날로그는 테이프 돌아가는 소리에 찍~찍 끄는 잡음이 때론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처럼 고풍스럽게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나한테는 도저히 맞지 않는다. 안 그래도 ‘이명증’으로 귀에서 한여름 매미가 항상 울어대는 기자의 인내심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렇다고 디지털 녹음기에 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MP3도 제대로 녹음 용도로 써보진 못했다. 시도는 해봤지만 604호에서 밝힌 것처럼 기계치의 한계는 뻔했다. 나에게 가장 안전하고 쉬운 기록법은 역시 취재수첩뿐이다. 간혹 상대에게 양해를 구하고 노트북을 꺼내 받아치기도 하지만 흔한 일은 아니다. 두세 쪽의 인터뷰 기사를 작성할 때나 있을 법한 일이다. 취재수첩보다야 노트북이 낫다. 노트북도 자판을 탁탁! 두들길 때마다 나는 소리 탓에 대화의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이 있긴 하지만 나중에 괴발개발 쓴 수첩을 보면서 노트북에 옮겨 적느라 한두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나 같은 기자는 유행에서 한참 떨어져 있다. 녹음을 최고의 인터뷰 기록 방법으로 치는 기자들이 점점 늘고 있다. 한동안 녹음기는 방송기자들의 전유물이었다. 녹취를 따야 방송에 멘트(말)를 내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신문, 인터넷 매체에서 일하는 기자들까지 녹음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상대가 말한 그대로 기록해준다는 측면에서 어떤 기록 방법보다도 정확하다. 하지만 직접 쓰는 것과 달리 말할 당시 분위기와 어감을 놓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
녹음기를 휴대하는 기자들이 늘어나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소송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예민한 사안을 취재하면서 취재원이 말을 바꾸어 난처한 상황에 몰릴 경우를 대비한 증거 확보 차원이다. 지난 6년 동안 짧은 기자생활을 하면서 소송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까지 취재를 한 경험은 이루 다 셀 수 없다. 선배와 동료들로부터 “그건 꼭 녹음해둬”라는 충고를 들은 적도 많다. 에 내려와서만도 ‘의원님은 알바 중’ ‘대한민국 최고 권력기관 국세청의 거짓말’ 등 고발성 기사를 준비하면서 녹음기를 쓸까 말까 몇 번 고민한 것 같다. 녹음을 안 하는 데는 기계치이고 녹음기가 없기도 하지만(MP3는 배터리가 나가 몇 달째 집에서 잠자고 있다) 나름의 개똥 철학도 있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한때 에 이수형이란 뛰어난 법조팀 선배 기자가 있었다. 일찍이 이 선배가 취재 뒷담화를 모아 엮어낸 를 읽은 적이 있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들을 수 있는 만큼만 기록해라!” 하기야 들리는 것마저도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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