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신문사마다 조금씩 달랐겠지만, 내가 한때 몸담았던 회사에선 1993년에 입사한 동기들이 ‘육필’ 원고를 써본 마지막 세대였다. 원고지는 두 종류였다. 스트레이트(보도) 기사를 쓰는 ‘꼬마 원고지’(100자)와 박스(해설) 기사를 쓰는 200자 원고지. 원고지에 세로로 기사를 써 데스크(부장)에 넘기면 빨간 볼펜으로 이곳저곳 수도 없이 고쳐진 뒤 편집 과정으로 넘어가곤 했다.
제목을 달고 기사를 배치하는 편집 과정도 지극히 원시적이어서 문구용 칼로 기사의 남는 부분을 잘라내는 방식이었다. 칼로 자르는 편집 과정에선 웃지 못할 실수도 가끔 벌어졌다. 한번은 ‘인사’와 ‘부음’의 컷(문패)이 뒤바뀌는 소름 끼치는 일이 벌어져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그날자 신문에 난 인사 대상자들, 다 죽었다!).
입사하던 해인가, 이듬해부터인가 슬슬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컴퓨터로 친 기사를 디스켓에 담아 출고하다가 전화선을 통해 기사를 보내는 모뎀(변복조장치) 방식을 채택했고, 이는 다시 근거리통신망(LAN) 전송 방식으로 발전했다. 그렇게 기자들은 원고지에서 멀어졌고 취재수첩에 메모를 할 때 빼고는 손으로 쓸 일이 거의 없게 됐다.
내 평생 육필 원고를 쓰는 일이 다시는 없을 줄 알았는데 올여름 손으로 기사를 써야 할 사정이 있었다. 사단은 8월 초 휴가 기간에 벌어졌다. 시골집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축구를 하던 중 넘어지는 바람에 왼쪽 손목을 다쳤던 것. 다친 첫날 좀 아프다고 느꼈을 뿐 뼈가 부러졌을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다.
밤새 앓다 이튿날 병원엘 갔더니 의사의 첫마디가 예사롭지 않았다. “부은 상태가 영 찝찝한데요. 차라리 퉁퉁 부으면 괜찮은데 (다친 부위를 가리키며) 딱 요정도 (알맞게?) 부은 게 위험 신호거든요. 일단 한번 (X선을) 찍어봅시다.” 조금 뒤 나온 사진 판독 결과는 의사의 예상대로 ‘손목뼈 골절’이었다. 의사는 한마디 덧붙였다. “뼈가 부러진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입니다. 깁스만 하면 될 것 같네요.” 난생처음인 깁스 상태는 고역이었다. 더구나 때는 찜통더위의 한여름이었다. 손목을 다쳤는데도 팔꿈치까지 뒤덮는 깁스 탓에 양손으로 컴퓨터 자판을 쓰기는 불가능했다.
뜻하지 않게 부닥친 13년 만의 육필 원고 작성은 그때부터 한 달 정도 이어졌다. 육필 원고의 괴로움은 취재 과정에서부터 생겼다. 손목 한 군데 다쳤을 뿐인데도 걸음걸이부터 부자연스러워 현장 취재가 부담스러웠다. 깁스를 한 몰골로 취재원을 만나는 게 민망한데다 가방을 들고 버스나 지하철을 타기가 겁났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화 취재가 많아질 수밖에 없었는데, 이 또한 여의치 않았다. 왼손으로 전화기를 드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앞자리 동료의 키폰 덕에 부담을 덜었지만, 그 다음엔 ‘악필’이란 장애물을 넘어야 했다. 부자연스런 상태에서 휘갈긴 악필의 메모는 거의 암호 수준이었다. 취재 메모를 바탕으로 복사 용지에 쓴 기사 초안은 옆자리 동료와 때마침 입사한 인턴 기자들의 도움을 거쳐서야 활자화할 수 있었다.
한 가지 흥미로웠던 건 컴퓨터를 두드릴 때보다 손으로 메모하고 기사 쓸 때 난마처럼 얽힌 사안이 훨씬 더 명료하게 머릿속에서 정리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점이다. ‘제2의 심장’이라는 발에 빗대 ‘제2의 두뇌’라고 하는 손의 수고가 머리의 회전을 도왔던 것일까. 어쩌면 육필 원고에선 고쳐쓰는 게 어렵다 보니 기사 작성 전에 전체 내용을 정리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그도저도 아니면 다친 손을 핑계 삼아 술을 거의 끊다시피 하고 살아서였는지도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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