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은주 기자 flowerpig@hani.co.kr
예전 취재뒷담화에서 쓴 적이 있지만, 수습 시절부터 난 덜렁거리는 성격의 실수투성이 기자였다. 덕분에 나는 다른 동기들에 비해 자주 ‘경위서’(일종의 반성문)를 써서 ‘사수’(직속 선배)에게 제출해야만 했다. 기억에 남는 경위서를 하나 소개하겠다. 황우석 교수의 논문 조작 사건으로 대한민국이 발칵 뒤집혔던 지난해 이맘때, 황 교수가 묵던 서울대병원 병실을 지키라는 사수의 엄명을 받았다. 그날 새벽 황 교수는 이미 퇴원을 했고, 황 교수의 부인만 병실에 있었다. 그런데.
“꼬르륵~” 갑자기 뱃속이 요동을 쳤다.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터라 오전 10시쯤 되니 배가 고팠다. 함께 있던 다른 신문 기자의 귀는 밝았다. 눈치 빠른 그 기자는 “얼른 가서 밥 먹고 와. 무슨 일 생기면 연락 줄게”라고 말했다.
본능에 충실한 난, ‘그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매점으로 향했다. 먹음직스런 김밥과 샌드위치, 초코 우유를 한아름 안고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을 하는 중이었다. 때마침 울리는 휴대전화 벨소리. 헉! 회사 선배였다.
“어디냐?”
“매점에서 김밥 사고 있습니다.”
“니가 제정신이야? 감히 현장을 비워? 당장 경위서 써왓!”
왜 난 ‘화장실입니다’라고 말하는 센스도 없었을까? 눈물을 머금고 김밥과 샌드위치를 버린 뒤, 고픈 배를 움켜쥔 채 경위서를 썼다.
김밥 사러 간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기자가 현장을 비운다는 것은 있어서도 안 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기자 마인드가 없던 그 시절, 경위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기자로서 책임의식을 갖게 해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수습 딱지를 떼서일까? 잘못을 해도 선배들은 더 이상 나에게 경위서를 쓰라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경위서의 필요성은 유효하기에 ‘고해성사’를 하려고 한다. 2006년 12월29일자 641호 에 ‘당을 넘어 화합하는 성추행 국회’라는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 기사를 쓸 무렵에는 한나라당 당원협의회장의 ‘성폭행 미수’ 사건이 터졌었다. 최연희 의원 사건을 시작으로 끊이지 않는 정치인들의 ‘성범죄’뿐만 아니라 나 역시 정치인에게 성희롱성 발언을 들은 적이 있기에 정치인들의 성의식 문제를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기자한테도 성희롱 발언을 하는 사람이면 부하 여직원에게는 더한 것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전제를 했다. 대부분 별정직으로 ‘파리 목숨’ 같은 국회 여직원들인지라 남성중심적인 국회에서 성추행에 노출돼 있을 이들을 도와줘야겠다는 공명심도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피해 사례가 속속 나왔다. 피해자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있었지만, ‘기사가 되는 얘깃거리’가 나왔다는 반가움도 컸다. 이런 나의 이중성은 기사를 쓰면서도 나타났다. 성추행을 당한 여성의 말을 그대로 살려서 기사를 썼는데, 취재원의 이름을 밝히지 않더라도 정황상 당사자의 신분이 드러날 수도 있었다. 기사를 쓸 당시 난 ‘내 기사 때문에 취재원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라고 고민하기보다는 최대한 ‘생생한 기사’를 써야 한다는 일념뿐이었다. 이런 내 기사를 본 팀장은 분노했다.
“너 취재원 신분 드러나서 잘리면 어쩔 거야!”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팀장의 ‘분노’가 무섭기보다는 기자 최은주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놀랐고, 약자를 돕고자 쥐었던 내 ‘펜’이 오히려 그들을 죽이는 ‘칼’로 변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사람은 ‘원래 목적’을 쉽게 잊어버리고 행위 자체에만 매몰되는 경향이 있다. ‘욕심’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는 ‘여유’를 갖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반성하지 않으면 기자로서 ‘책임감’을 망각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경위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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