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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스타 띄워주기

등록 2006-12-08 00:00 수정 2020-05-03 04:24

▣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도쿄, 홍콩, 방콕 찍고 베이징 아하!” 요즘 뜬다 하는 가수들은 이렇게 동아시아를 찍고 다닌다. 자칭 타칭 ‘한류 스타’라는 이들이 다니는 곳에는 기자들이 함께 간다. 요즘 대중문화를 담당하는 기자들치고 ‘한류’ 출장 다녀오지 않은 기자를 찾기가 힘들다. 많을 때는 한 달에 한두 번, 두세 번씩 동아시아행 비행기를 타는 기자들도 있다. 기자들이 따라간 그곳에서는 수십 개의 기사가 나오지만 제목은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A, 日콘서트 열광적인 무대’ ‘日팬 A 환호하며 열광’…. 가수와 팬, 기자까지 단체로 온탕에 들어갔다 온 것처럼 ‘한류’와 관련된 기사의 키워드는 항상 ‘열정’과 ‘열광’이다.
1년 전 대중문화를 담당하면서 나도 여러 번 한류 스타 취재 출장을 갔다. 나를 포함한 기자들은 공항에 모여 연예기획사 관계자에게 비행기표를 받은 다음 출국 심사를 거쳐 비행기에 탔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에는 호텔에 짐을 풀고 보기 좋은 자리에 앉아 한류 스타 콘서트를 관람했다. 콘서트가 끝나면 짤막한 인터뷰도 했다. 그리고 기사를 썼다. 기사 내용은 위에서 열거했던 기사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A가 여기서도 참 인기가 많고 팬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더라, 콘서트도 매우 훌륭했더라, 앞으로 더 많은 나라에서 사랑을 받을 분위기다, 어쩜 대견하기도 하지. 미사여구와 수식어를 동원해 칭찬해주고 박수를 쳐줬다. 그러나 그것은 기사라기보다는 일종의 감상문, 자랑스러운 우리 한류 스타를 저 구름 위에 태워놓은 감상문이었다. 나를 포함한 모든 기자들은 엇비슷한 감상문을 한국 시각에 맞춰 띄워보냈다.
그 기사는, 아니 감상문은 진심이었을까? 정말 A는 그토록 훌륭한 한류 스타였던 걸까? 물론 정답은 ‘아니다’. 동아시아까지 가서 콘서트를 할 정도면 국내에서도 알아주는 가수고 연예인이니 뭐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똑같은 콘서트를 한국에서 하면 80점이지만 외국에서 하면 100점으로 뛴다. 100점 기사에서 그 가수에 대한 비판은 찾아볼 수 없거나 한두 줄에 그친다.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노래를 못해도 현지 팬들만 좋아하면 100점이 된다. 80점과 100점의 차이는 자동차를 타고 갔느냐, 비행기를 타고 갔느냐에 있었다. 한류 스타 취재 출장은 갈 때부터 마음가짐이 다르다. 기자의 눈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독자에게 전하겠다는 마음가짐보다 ‘무조건 칭찬해줘야지’ 하는 마음이 앞선다.
이유는 있다. 먼저 한류에 대한 괜한 자부심이나 핑계성 애국심이었다. ‘그 멀리서 우리 대중문화를 알리는 것도 애국인데 웬만하면 좋게 좋게’ 정도의 기분이랄까. 연예기획사나 방송사가 많은 돈을 들여 데려가는데 ‘진짜 정말 멋지고 좋았다’는 기사를 써주는 것은 그들에 대한 배려 내지는 예의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류 스타 콘서트를 하면 적게는 7~8명, 많게는 20여 명의 기자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호텔에서 재운다. ‘홍보 효과 하나 때문에 거기까지 데려가 자랑하고 싶어하는데 이 정도는 써줘야지 뭐. 아주 거짓말은 아니잖아?’ 하는 생각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냉정과 열정 사이의 균형감각을 잊어버렸고, 너무 쉽게 기자가 아닌 팬이 돼버렸다.
만약 지금까지 쓴 수많은 기사 중 10개를 골라 깨끗이 지워버릴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나는 주저 않고 한류 스타 콘서트 기사를 선택하겠다. 기자로서의 냉정을 한국에 놓고 비행기를 탔던 그 기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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