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이근 기자 ryuyigeun@hani.co.kr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다. 신호등엔 파란 불(정확히는 녹색)과 빨간 불이 있는데 유독 파란 불만 깜빡거린다. 조금 있으면 빨간 불로 바뀐다는 것을 친절하게(?) 알려주기 위해서란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는 건 또 있다. 파란 불이 깜빡깜빡할 때마다 이상한 유혹이 생긴다. 나도 모르게 뛰게 된다. 어느새 버릇이 됐다. 유전은 아닐 것이다. 신호등이 세상에 나온 지 얼마나 됐겠나? 정확지는 않지만 기억 속 신호등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향 읍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다. 이젠 횡단보도 앞에서 뛰는 이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다음 신호등은 너무나 더딘가 보다.
과학적이고 썩 논리적이지도 않지만 나름대로 분석한 최종 결론은 이렇다. 신호등이 깜빡거려서 뛰기 시작했던 게 아니라 남이 뛰니까 내가 뛴다?! 경주마나 고삐 풀린 사냥개처럼 말이다. 이런 버릇, 아니 유혹은 기자가 되고 나서는 더 심해졌다. 2003년 4월25일치 취재 일기에는 그런 버릇을 꽤나 고민한 흔적도 엿보인다. 당시 기록의 일부다.
“밤 11시20분쯤 대북송금 특별검사팀의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고 나오던 산업은행 이아무개 팀장은 순간 사무실 밖에서 ‘뻗치고’(기다리고) 있던 20~30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과 대질은 했나?’ ‘○○○을 봤나?’라는 오래 준비했지만 뻔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삐~삐~. 엘리베이터의 경고음이 시끄럽게 울렸지만 누구도 흔쾌히 발을 빼지 않았다. 간신히 1층으로 내려온 엘리베이터에서 빠져 나온 그는 건물 밖으로 내달렸지만 몇m를 가지 못했다. 잔뜩 겁을 먹은 그가 기자들에 밀려 종잇장처럼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탈출구를 찾은 그가 건물을 벗어나 대로로 도망쳤다. ‘야, 따라가!’ 어느 기자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닭 쫓던 개처럼 사냥을 포기하려던 기자들은 갑자기 그를 향해 질주했다. 한 기자가 택시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의 옷을 붙잡았다. 다른 기자가 호흡을 맞추듯 문을 닫았다. 그렇게 몇 대의 빈 택시는 허탕을 쳤다. 그는 다시 아래쪽 도로로 달렸다. 와이셔츠 단추가 떨어져나가고 양복 윗도리는 반쯤 벗겨져 있었다. 누군가 다시 외쳤다. ‘야! 붙잡지 마. 그렇게 하면 다음에 취재 못해.’ 그제야 악어한테 물렸다가 가까스로 도망친 어린 물소처럼 이씨는 분노도 표시하지 않은 채 절뚝거리며 택시에 몸을 실었다. 뒤늦게 온 한 기자가 말했다. ‘니들이 뛰니까 나도 따라 뛰었는데, 근데 저 사람 누구야?’”
기자들은 뛴다. 그저 다른 기자가 뛰면, 뛴다. 현장의 기자들은 ‘한마디라도 한 장면이라도 더 잡아내려면 뛰어야 한다’는 명제를 별로 의심해보지 않은 채, 빠르게 직업 본능에 길들여진다. 사건 현장은 늘 그런 익숙한 풍경을 연출하곤 한다. 그런 장면 자체가 뉴스 가치를 키우기도 한다. 그 속에서 기자들은 서로 다투기도, 어디에 부딪혀 생채기를 입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렇게 100m 경주하듯 취재원을 따라붙어 특종이나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는 얘기는 아직 ‘전설’로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때 이아무개 팀장한테 “나도 당신을 에워싼 한 사람”이라며 미안하단 말을 전하고 싶다.
취재 일기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집을 향해 떠난 시간은 새벽 2시가 넘었다. 불을 켜놓고 기다리던 아내는 어느새 잠이 들었다. 긴 밤 동안 사냥하다 지친 남편은 그녀 옆에 조용히 몸을 눕힌다. 사냥개가 된 것에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더 용맹스런 사냥개가 되지 못한 것에 자존심이 상했던 건지, 어지러운 생각들로 눈꺼풀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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