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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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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종 노동자들

등록 2007-01-05 00:00 수정 2020-05-03 04:24

▣ 조계완 기자 kyewan@hani.co.kr

‘서면 취재, 앉으면 기사 작성, 누우면 기획.’ 아주 부지런한, 한마디로 일에 미친 기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기자 생활 2년차에 접어든 지난 1995년 여름 서울대를 출입하던 시절이다. 서울대를 출입하는 기자들은 대학 근처에 있는 관악경찰서에 주로 상주하는데 아침 일찍 선배에게 하루 일정 보고한 뒤 곧바로 서울대로 올라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서울대 기자실에서 기사 경쟁이 불붙기 시작했다.
발단은 서울대를 출입하는 어느 통신사 기자였다. 그는 매일 오전 10시께만 되면 서울대 관련 특종 기사를 띄웠다. 휴대전화 보급이 본격화되기 전이었고 옆구리에 무선 호출기를 차고 다니던 시절이었다. 다른 일로 취재 나가 있을 경우 오전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삐삐’가 울리곤 했다. 기자실에서 온 호출이다. 급히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가 전화를 걸면, 전화선 저쪽에서 하는 응답은 기사 제목만 다를 뿐 매번 거의 똑같았다. “기자님, 조금 전에 ○○통신에 ××× 기사가 떴어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기자실 사무 여직원의 목소리다. 통화가 끝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회사에서 나를 찾는 삐삐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야, ○○통신 기사 어떻게 된 거야? 빨리 확인해!” 관악경찰서에서 서울대 본관으로 걸어 올라가는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 없었다.
서울대를 출입하는 기자 15명 가운데 기사를 쓴 통신사 기자를 빼고 14명은 누구나 거의 매일같이 겪어야 하는 삐삐 호출이었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 흘리는, 진흙탕 기사 싸움이 벌어졌다. ‘낙종’(특종의 반대말·흔히 ‘물먹었다’고 표현)한 기자들은 이번에는 상대방 기자를 물먹이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서울대 관련 특종 기사를 찾아다녔다. 여기서 말하는 특종이란 ‘세상을 뒤흔들 만한 새로운 뉴스’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언론에서는 쓰지 않은 기사를 일컫는 데 불과하다. 심지어 서울대 학보에 난 기사를 약간 다르게 바꿔 특종으로 둔갑시킨 뒤 멀쩡하게 일간지 사회면 톱기사로 올리는 사례도 있었다. 15명이 다 같이 모여 있는 기자실에서 특정 언론사 기자가 자리를 비우면 또 뭔가 특종을 취재하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모두들 불안해했다. 그해 여름, 서울대 기자실은 전쟁터로 변했고 종합일간지 사회면에는 서울대 관련 기사가 난무했다.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기사들이 오직 ‘서울대발’이라는 이유로, 또 서울대 출입기자들 간의 과도한 경쟁 때문에 사회면을 차지했던 셈이다. 피해자는 물론 독자들이었다. 서울대의 취재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어떤 교수가 쓴 연구보고서 내용이 특종 기사로 사회면에 등장하면 그 교수는 하루 종일 출입기자 14명으로부터 걸려오는 확인 전화와 방문 인터뷰를 당해야 하고, 똑같은 말을 14번 되풀이해야 했다.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낭비인가?
모두들 피 흘렸지만 승리한 언론사는 어디도 없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경쟁하던 기자들은 다른 언론매체에 실리는 특종 기사를 점차 무시하기 시작했다. 기자실에는 조용한 침묵이 흘렀고, 기사 경쟁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어떤 선배 기자는 “기자는 길에 좌판 깔아놓고 영업하는 자영업자들”이라고 했다. 그만큼 기자는 조직보다는 ‘단독자’로서 기사 가치와 크기, 방향을 판단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기자의 또 다른 상징인 ‘특종’은 기자 노동자들을 과도한 경쟁으로 내모는 노동 강도 강화의 채찍이기도 하다. 그해 여름, 정작 가장 큰 피해자는 기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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