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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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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달의 기다림

등록 2007-02-15 00:00 수정 2020-05-03 04:24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벌써 다섯 달째다. 서울 용산 미군기지 주변을 차 타고 지날 때마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주상복합 아파트들을 보며, 우리 도시의 외관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지난해 여름이었다. 초호화 주택이라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첫 입주를 시작한 것은 지난 2002년 10월. 그로부터 5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울 시내 곳곳에는 ‘파크’ ‘타워’ ‘팰리스’ ‘월드’ 등 호화찬란한 이름을 가진 주상복합 아파트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기 시작했다. 완전히 주상복합의 나라가 아닌가! 그 육중한 건물들이 바꿔버린 우리 삶에 대한 기사를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고,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네, 그게 그렇군요.” 자료를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우선 주상복합이란 용어 자체가 건축법에 올라 있는 ‘행정 용어’가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에 지금까지 지어진 주상복합 건물이 몇 채인지, 해마다 몇 채의 건물이 지어지고 있는지,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 수는 몇 명인지 통계가 있을 리 없었다. 통계가 없다 보니, 그에 맞는 제대로 된 규제도 없었다. 일종의 공백이었던 것이다. 통계가 없으면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2006년 9월6일 서울시를 상대로 정보공개 청구를 했고, “그런 자료는 없으니까 못 준다”는 내용의 통고를 받은 것은 그로부터 엿새가 지난 9월12일이다.
방법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건물을 세우려면 건축 허가를 받아야 하고, 이는 전자정보처리 시스템에 의해 데이터베이스가 구축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서울시 담당자는 “그 시스템을 돌리려면 규정에 따라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좀 답답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규정을 지켜야 한다는 말에 토를 달긴 어려웠다. 법은 시스템을 이용하려면 관계 중앙행정기관장의 심사를 받아, 해당 지자체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그 와중에 석 달이 허비됐고, 결국 서울시의 안내에 따라 관계 중앙행정기관이라고 지목된 국정홍보처에 서류를 접수하기에 이르렀다.
“그건 저희 업무가 아닌 것 같은데요.” 홍보처 쪽은 난색을 표했다. 기자는 이 문제로 홍보처의 문을 두드린 첫 민원인이었다. “그럼 어디로?” “저희가 보기엔 건설교통부인 것 같습니다.” 홍보처는 건교부로 서류를 이관했다. 2007년 1월9일이었다. 규정은 신청을 받은 중앙행정기관은 15일 내에 민원인에게 심사 결과를 통보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었다. 규정이 정한 기한이 넘었는데도 건교부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민원 내용의 진행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건교부 관계자는 “다시 홍보처로 넘겼다”고 했다. “홍보처 누구 말씀이신지? 누구에게 서류가 갔다고 말씀을 해주셔야.” “그걸 제가 어떻게 하나하나 기억합니까?” “홍보처에 가서 아무개를 찾을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문의 전화는 싸움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전화를 끊고, 홍보처와 건교부 관계자들을 ‘닦달했다’. 그 효과 때문인지, 심사 부서는 건교부로 결정됐다. “사용해도 좋다”는 건교부 심사서가 서울시로 넘어간 것은 2007년 2월5일이다. 서울시 쪽에서는 “빨리 처리가 된다”고 했지만 2월9일 현재 아직 서류를 못 받고 있다.
민원인을 대하는 공무원들의 무성의한 태도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에, 이곳에서 다시 재론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규정을 지키는 일은 때로 짜증나고 번거롭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아는 간부 공무원을 찾아가 강탈하듯 자료를 얻어쓰는 것보다, 규정 지키며 일을 처리한 게 더 잘한 것이라 믿고 싶다. 물론, 그토록 애태우며 기다려온 자료만 받는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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