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밖 청소년’을 취재한 적이 있다. 청소년상담센터 면담실 벽은 아이들의 낙서로 가득했다. 사랑 또는 연애 이야기였다. “박○○, 사랑해.” “김○○ ♥ 이○○.” 나중에 상담사가 설명해주었다. “이런 아이들일수록 애착이 강하거든요.” 그들 대부분은 가난한 가정에서 자랐다. 불안감·무력감에 젖은 부모는 공격충동을 조절하지 못해 아이들을 가혹하게 대한다. 배신감과 고립감에 휩싸여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은 거리에서 만난 이성에 빠져든다. 그들에게 성은 유일한 놀이고 언어다. 다만 서툴고 거칠다. 취재 당시 접한 그들의 사랑은 대부분 비극적이었다.
중학교 자퇴생 영희(가명)는 20대 피자 배달원과 사귀어 임신했다. 아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입양됐다. 할머니 손에 자란 경숙(가명)은 공장에서 일하는 남자친구와 2년 동안 동거하다가 임신했다. 월세 3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아이를 낳아 기를 수 없다는 생각에 미혼모 시설에 스스로 들어갔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 과정을 반복한다고 상담사는 말했다.
젊은 여성이 혼자 아이를 낳아 화장실 등에 버렸다는 기사를 접할 때마다 나는 그때 만난 아이들을 생각한다.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을 때, 아버지가 딸을 때리고 폭언하고 방치했을 때, 그녀가 입시 경쟁의 밑바닥에서 고립됐을 때, 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또래의 남자를 만나 안락한 가정을 꿈꾸었을 때, 기대와 달리 그 남자가 함부로 자신을 대했을 때, 그녀가 임신을 공포로 받아들였을 때, 마침내 중절을 고민했을 때, 누가 그녀의 곁에 있어주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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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낙태’를 심각하게 생각한 계기가 됐다. 낙태라는 용어 자체의 잘못을 알아차린 순간이기도 했다. 내가 그들이었다면 임신중절을 택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포기하는 선택이 아니라,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삶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였을 것이다. 그조차 ‘아이를 지운다’는 범죄로 몰아붙인다면 절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계급·계층적 모순에 대한 주목은 그렇게 젠더 모순의 ‘감지’로 이어졌다. 다른 빈곤 문제와 달리 임신중절은 빈곤층뿐만 아니라 여성 대다수가 겪는 일일 것이고, 일단 그 일이 벌어지면 모든 여성은 (가난한 학교 밖 청소년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사회적·의학적 딜레마에 외롭게 봉착해 극심한 공포와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아마도 나는 평생 ‘여자’를 이해 못하는 마초로 늙겠지만, 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여성’의 보편적 고통을 공감하려고 무지하게 애써야 한다는 것을 그제야 수긍하게 됐다. 자기결정권을 범죄로 몰아붙이는 폭력 구조 아래에서 한국의 모든 여성은 임신중절을 일생일대의 공포와 수치로 기억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 그 공포가 너나 가릴 것 없이 보편적이라면, 그런 공포를 보편화한 이 세상의 잘못이 아니겠는가.
제 할 일을 제대로 해낸 적 없는 박근혜 정부가 느닷없이 낙태를 엄벌하겠다고 호통치고 있다. 젠더 감수성은 둘째 치더라도, 임신중절을 직간접적으로 겪어본 이가 정부를 통틀어 아예 없는 것인지 묻고 싶다. 제정신인가. 가난한 청소년을 취재할 때 만난 상담사가 들려준 말이 있다. “사회의 야수성을 아이들이 온통 짊어지고 있어요.” 그 말을 빌리자면, 지금 한국의 여성들은 이 사회 온갖 종류의 야수성을 고스란히 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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