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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봉투법은 한 판의 승부가 아니다

등록 2026-03-12 22:03 수정 2026-03-17 17:32
2026년 3월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로비에서 시민들이 펼침막을 보고 지나가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2026년 3월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로비에서 시민들이 펼침막을 보고 지나가고 있다. 이종근 선임기자 root2@hani.co.kr


노동계의 오랜 염원인 개정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란봉투법)이 2026년 3월10일 시행됐다. 이 법의 핵심 내용 가운데 하나가 ‘사용자 개념 확대’다. 하청 노동자가 원청과 직접 근로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어도 원청이 노동조건에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사용자로 인정돼 단체교섭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원청이 그렇게 호락호락 교섭 요구를 받아주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실제 노란봉투법 시행 첫날 노동자 8만여 명이 소속된 전국 407개 하청 노조가 원청 사업장 221곳을 상대로 단체교섭을 요구했지만, 요구에 응한 원청은 한화오션·포스코·쿠팡로지스틱스서비스(CLS)·부산교통공사·화성시 등 5곳으로 2.3%에 그쳤다. 나머지 97.7% 원청은 최대 20일이 걸리는 노동위원회 판정을 거치거나 확정판결이 나오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법적 대응에 나서는 방법으로 교섭을 회피할 것으로 보인다.

원청이 부당한 이유로 교섭에 응하지 않을 경우 고용노동부는 이를 단체교섭 거부·해태로 인한 부당노동행위로 보고 형사입건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부당노동행위는 수사와 처벌로 이어지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다 혹여나 기소돼 유죄 판결을 받는다고 해도 기업이나 대표자에게 실형보다는 낮은 액수의 벌금형이 선고되는 것이 대부분이다. 실제 노조 파괴로 인한 부당노동행위로 2심까지 유죄가 선고된 세브란스병원 쪽과 병원의 청소 업무를 맡는 하청업체 태가비엠은 벌금 200만~1200만원형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세브란스병원과 태가비엠의 노조 파괴 행위가 미온적이어서 그랬을까. 그렇지 않았다. 세브란스병원과 태가비엠이 민주노총 산하 청소노조를 뿌리 뽑기 위해 주고받은 노조 파괴 서류 수천 장을 한겨레21이 입수해 분석해보니, 이들은 노조 탈퇴 종용과 표적 징계, 괴롭힘, 노-노 갈등 유도 등과 같은 노조 파괴 행위를 최대한 다양하게 자행했다. 민주노총 노조 출범식 참석을 막기 위해 노동자들을 한 공간에 모아 사실상 감금했고, 노조 설립 움직임을 사찰해 동향 보고를 주고받았으며, 수사받을 상황에 대비한 문답지도 미리 만들었다. 몇몇 노동자를 회유해 조합원에게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고 탈퇴서에 서명을 받았고, 하루에 대여섯 번씩 청소 구역이 바뀌는 ‘유동근무’를 매개로 노조 탈퇴를 종용했으며, 한국노총 노조 노동자에게만 후생기금을 따로 챙겨주면서 노-노 갈등을 유도했다. 이렇게까지 해도 민주노총 노조를 탈퇴하지 않고 버틴 한 노동자에 대해선 ‘바보 만들기 전략’이라는 문건을 만들어 망신주기 작전을 펼쳤다.

이런 노조 파괴에도 불구하고 민주노총 노조가 증거 서류 일부를 확보한 2017년에는 노동위원회와 노동부, 검찰 누구도 이를 부당노동행위로 보지 않았다. 이후 노조가 끈질기게 증거를 더 모으자 노동부는 2018년 뒤늦게 재수사에 나섰고, 검찰은 이후에도 3년이 더 지난 2021년 3월에야 사건을 재판에 넘겼으며, 1심 법원은 2024년 2월에야 유죄 판결을 했다. 그리고 세브란스병원은 이런 모든 문제가 마치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2025년 12월 태가비엠과 재계약했다.

이 모든 과정이 노란봉투법 시행 이후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노란봉투법을 ‘종이 위의 권리’로 남기지 않기 위한 두 번째 싸움이 필요한 까닭이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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