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지 마감은 목요일 아침부터 금요일을 거쳐 토요일 새벽에 끝난다. 지난 1년 동안 ‘불금’(불타는 금요일)이라는 말은 나하곤 아무 상관 없었다. 아침·점심을 샌드위치 하나로 퉁치고 저녁은 새벽녘 뒤풀이 맥주로 대신했다. 머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짓뭉개지는 엉덩이까지 아팠다.
이 글을 적는 금요일은 달랐다. 아침 6시30분, 눈이 번쩍 뜨였다. 꼼지락거리지 않았다. 간밤 꿈이 무엇이었는지 되씹지도 않았다. 대충 모자를 눌러쓰고 영화관으로 달렸다. 담배 한 개비 피울 여유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단 한 장면도 놓칠 수 없는 것이다.
아침 7시30분. 30여 명의 관객이 웅성거림도 없이 앉아 있었다. 평일 조조상영인데도 그랬다. 예매율 1위 영화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뒷자리에 앉아 숨을 고르고 나니, 불안해졌다. 저들이 이곳을 찾기까지 의 책임도 있을 텐데, 영화가 실망스러우면 어쩌나. 얼굴이 뜨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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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이 흘렀다. 비평적 주석을 달아보자면, 딱 한 가지에 신경이 쓰였다. 소녀들이 끌려간 1940년대 초반,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제는 공출을 일삼았고 조선인들의 삶은 피폐 일로에 있었다. 피해자 가운데 일부가 “(마을 이장 등의 꼬드김에 속은) 아버지가 돈 벌어 오라고 시켰다”고 회고하거나, 이를 트집 잡아 “스스로 돈벌러 갔다”는 망언이 나오는 배경이기도 하다. 반면 영화 속 피해자의 가족은 (적어도 비극 이전까지는) 너무 행복해 보였다. 오직 그것이 불편했으나, 관련 자료를 한없이 뒤졌을 감독이 이를 모르지 않았을 테니, 이 대목은 ‘영화적 장치’라고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 밖에는 충분했다. 좁은 각도로 근접한 카메라 앵글은 인물 내면에 대한 깊은 교감을 높였다(예산이 충분했다면 스펙터클을 더 가미했을 것이다). 상투적 적개심이 드러날까 염려했으나 인간 보편의 악마성을 형상화해 설득력 있게 전쟁 성범죄를 드러냈다. 전투·처형·성폭력 등의 장면은 적절한 긴장을 유지했고, 컴퓨터그래픽은 은유적 분위기를 자아낼 만큼만 사용됐다.
과거의 재현에 비해 현재의 재현에서, 소녀들의 연기에 비해 어른들의 연기에서 아주 조금 갈증을 느꼈지만, 그것은 과거의 거대한 비극에 비해 현재의 정치적 궁상이 한없이 추레하고, 자신을 투사했을 소녀 연기자의 감성이 역사 지식에 바탕한 성인 연기자의 이성보다 더 강력했다는 점을 드러낸 것으로 보였다.
여기까지다. 어떤 돈으로 어떤 고생을 치르고 만들었는지 모르면서, 뭘 좀 안다고 깝죽대는 인텔리겐치아 흉내는 이 정도로 끝내려 한다. 시민으로서 말하자면, 막판에, 견디다 견디다가, 많이 울었다. 그것이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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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은 약자가 약자를 위로하는 치유의 방편이다. 원혼을 불러내는 굿판에서, 그것도 영화적 상상의 굿판에서, 그나마도 시민의 푼돈을 모아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영화의 굿판에서야 그 치떨리는 아픔이 위로받을 수 있는 할머니들의 처지에 기가 막혀 버렸다.
후원 시민 7만5천여 명의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에 올라가고, 피해자 할머니들의 그림이 이어지는데, 비로소 눈물이 멎었다. 할머니들은 일본군에 의해 소녀들이 불타 죽은 사실을 그렸고, 그 일본군을 나무에 묶어 총살시키는 상상을 그렸다. 이것이 현실이다. 상처는 여전히 활활 타오르는데 복수는 상상에 묶여 있는 현실.
돌아나오는 길, 영화관 카페 알바생이 동료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다. “저 음악 들려? 엔딩곡인데 너무 슬퍼.” 어느 여고생이 영화 포스터 앞에서 친구에게 말하는 것도 보았다. “이 영화 알아? 돈이 없어 14년 만에 만들었대.”
영화 으로 인해 나의 금요일은 온통 불타고 있다. 구현되지 않고 지체되는 정의를 생각하느라 하루를 보냈다. 누구에게나 그런 하루가 필요하다. 누구나 이 영화를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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