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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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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지만 챙기자, 문상 3종 세트

등록 2014-01-21 13:59 수정 2020-05-03 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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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뒹굴어도 좋을 일요일 아침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리고 스물을 갓 넘긴 제자가 하늘나라로 갔다고, 청천벽력 같은 연락을 받았다. 대안학교 교사로 있을 때 담임을 맡았던 아이인데 안부를 묻지 못하고 산 지 오래됐다. 왜냐고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전화를 끊었다. 참담한 마음으로 세수를 하고, 검은색 옷을 찾아 입고, 허겁지겁 집을 나서는 와중에도 머릿속으로는 가방 속을 확인하고 있었다. 가방에 늘 넣고 다니는 휴대품 4종 세트 중에서 세 가지는 특히 문상 갈 때 꼭 필요한 것이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 앳된 영정사진 앞에서, 알 수 없는 죄책감으로 제대로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첫 번째 문상 용품, 손수건을 꺼내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슬픔에 잠긴 유족과 위로의 인사를 나누고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속이 상해서 이미 잔뜩 술을 들이켠 동료 교사 한 명이 자리에 앉자마자 술을 권했다. 두 번째 문상 용품, 컵을 꺼내 술을 받고는 세 번째 문상 용품, 수저 세트를 꺼내서 싸한 속에 뜨거운 국도 훌훌 집어넣었다.

늘 가지고 다니는 휴대품 4종 세트(손수건, 컵, 수저 세트, 천주머니)는 대부분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꺼내게 되지만, 거의 모든 장례식장에서 나무젓가락, 종이컵, 일회용 접시를 쓴다는 것쯤은 예상할 수 있으니 문상 가기 전에는 이것들을 챙겼는지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슬퍼하는 중에도 휴지를 쓰지 않으려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주섬주섬 가방 속에서 컵을 꺼내 술잔을 받고, 수저를 꺼내 음식을 집어먹는 내 모습을 어떤 사람들은 유별나게, 혹은 우스꽝스럽게 생각할 수도 하지만 그건 오래된 습관이기도 하고 어찌 보면 고인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사실 내가 죽고 나서도 장례식을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중에 큰 것은 쓰레기와 에너지 문제 때문이다. 그 엄청난 양의 일회용품을 쓰고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내면서, 지인들이 전국 곳곳에서 기름을 없애가며 자동차를 타고 달려올 것을 생각하니 지구를 떠나는 마지막 날, 쓰레기와 이산화탄소 배출로 잔치를 벌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장례식을 하더라도 유언으로 몇 가지 문상 자격 조건을 남기고 싶다. 1. 대중교통을 이용하시오. 2. 손수건, 컵, 수저 세트를 지참하시오. 아, 하나 더 보태자. 3. 반찬통을 가져와서 남은 음식을 싸가시오.) 사는 동안 혁혁한 업적은 쌓지 못했을망정 마지막 가는 길에 산더미 같은 쓰레기를 만드는 일에 동참하지 않은 것을 기뻐하며, 나는 기꺼이 가볍게 떠날 것이다.

미소가 예쁜 아이였다. 슬프고 무거운 마음을 떨칠 수는 없지만 어린 내 제자도 먼 길을 떠나며, 못난 스승의 꼰대 같은 모습에 살며시 미소를 던지지는 않았을까.

장희숙 독자·격월간 편집장*‘레디 액션!’은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소소한 제안을 하는 코너입니다. 독자 여러분에게도 문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제안하고 싶은 ‘액션’을 원고지 6~7장 분량으로 써서 han21@hani.co.kr로 보내주세요. 레디 액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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