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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아이콘 유승민, ‘엘리트 체육’ 아이콘 될라

‘38표 차’ 최연소 대한체육회장 당선… 성공 가도만 달려온 ‘성공 함정’ 빠지지 않으려면
등록 2025-02-01 12:26 수정 2025-02-05 17:13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자가 2025년 1월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이저플레이스 센트럴 호텔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 당선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승민 대한체육회장 당선자가 2025년 1월16일 오후 서울 중구 프레이저플레이스 센트럴 호텔에서 열린 ‘제42대 대한체육회장 당선 기자회견'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기적의 사나이. 유승민 제42대 대한체육회장 당선자를 두고 나오는 평가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남자 탁구 결승전, 201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선수위원 선거에 나설 때도 그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유승민 당선자는 보란 듯 중국의 왕하오를 꺾고 정상에 섰고, 선수위원 선거에서도 23명의 후보 중 2위에 올라 당선되는 기적을 연출했다. 이번 체육회장 선거에서도 ‘38표 차 기적’을 연출하며 이기흥 현 체육회장의 3연임을 막아섰다. 그는 “한국 체육의 기적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회장 당선되자마자 ‘개혁’ 기대감

사상 최연소 체육회장인 42살 젊은 피를 향한 체육계의 기대는 상당하다. 2024 파리올림픽이 끝난 뒤 체육계는 각종 사건사고에 휘말렸다. 배드민턴 선수 안세영의 작심 폭로로 문화체육관광부가 대한배드민턴협회를 상대로 조사에 나섰고, 김택규 현 협회장을 횡령·배임 혐의로 경찰에 수사 의뢰했다. 이기흥 현 체육회장 역시 국무조정실 정부 공직복무점검단의 조사로 직원 부정 채용, 금품 수수 혐의가 드러나 검경의 수사를 받고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위르겐 클린스만(독일)·홍명보 국가대표 감독 선임 과정에서 규정과 절차를 위반한 사실이 문체부 감사에서 적발됐다. 체육계를 향한 시선이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해진 시기. 신선함, 진정성, 패기로 무장한 ‘기적의 사나이’는 회장에 당선되자마자 체육 개혁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모두가 자신의 입을 바라보는 상황에서 유 당선자는 첫 일성으로 엘리트 체육의 복원과 학교체육 활성화를 꺼내 들었다. 선거가 끝난 뒤 이틀 만인 2025년 1월16일 열린 당선 기자회견에서 ‘진천선수촌을 중심으로 한 엘리트 체육을 강화할 것인지’라는 질문을 받자 “엘리트 체육은 더욱더 성장시켜야 한다. 엘리트 선수라서 대접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외되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이어 “유소년 선수들이 진천의 시스템을 동경하고 있다”며 “외국의 많은 분이 진천선수촌의 시스템과 문화를 본받고 배우고 싶어 해 대한민국의 자랑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지원해야 한다. 종목 다양화와 일부 개방을 통해 국민과 호흡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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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체육 활성화를 놓고선 “첫 번째로 무조건 해야 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유 당선자는 “학교 현장을 들여다봐야 한다. 탁구는 팀을 창단해도 선수가 부족해 고등학교에서 선수를 수급할 수 없다. 일반 학교에서도 스포츠 한 종목씩 하는, 1교-1기를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야 학교체육이 버틸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앞서 밝힌 엘리트 체육에 대한 신념과 엮어 맥락을 살펴보면, 전문 운동선수 발굴을 위한 인재풀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학교체육 활성화를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생활체육의 저변을 넓히거나 학생들의 체육 활동 시간을 늘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엘리트 선수를 선별하기 위한 토대로 학교체육을 인식하고 있다.

선거 운동 과정에서 배포한 ‘학교체육 활성화 프로젝트’ 공약의 세부 내용을 살펴보면, 이러한 인식이 더욱 두드러진다. 유 당선자는△학생 선수 맞춤형 학교운동부 합숙소 재개편 △학생 선수를 위한 법제도 현실화 △1교-1기 제도 도입을 통한 스포츠 참여 확대 △지역별 체육 특성화 대안학교 설립 추진 △학교운동부 유지 및 신설 학교에 예산 지원 △스포츠클럽 규정 정비 및 지원 확대 △종목별 스포츠 영재 발굴 및 성장 프로그램 강화 등 7가지 방안을 제시했는데, 이 중 5가지가 엘리트 선수 육성과 직결돼 있다. 일반 학생들의 스포츠 접근성을 높이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정책은 스포츠클럽 지원 확대와 1교-1기 제도 정도에 그친다.

 

학교체육 활성화 목적이 ‘엘리트 선수’ 선발?

한겨레와 체육시민연대가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에게 보냈던 설문조사를 봐도, 유 당선자가 가진 엘리트 체육을 향한 확신은 확고하다. 최저학력제(일정 수준의 학력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학생 선수의 경기 및 대회 참가를 제한하는 제도)를 놓고선 “운동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걸림돌”이라며 “인권침해를 넘어 아이들의 꿈을 짓밟는 정책으로 최우선 순위로 폐지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냈다. 대회·훈련 참가로 인한 수업 결손을 관리하기 위해 도입된 출석 인정 허용 일수(초등학교 20일, 중학교 35일, 고등학교 50일) 역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 당선자는 “출석 인정 허용 일수 자체가 선수 인권 침해”라며 “학생 선수는 ‘학생’보다는 ‘선수’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많다. 교육부 규정에는 이런 상황이 반영돼 있지 않다”고 답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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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석 인정 허용 일수의 적정성과 한시적으로 유예된 최저학력제 폐지 여부를 놓고선 체육계 내부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두 제도는 합숙 위주, 도제식 훈련을 바탕으로 한 엘리트 체육, 스포츠 국가주의, 올림픽 메달을 위시한 성적 지상주의가 낳은 여러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내놓은 해결책이었다. 학생 선수를 둔 학부모와 현장 지도자들이 ‘탁상행정’이라며 거세게 반발하지만, 이들 역시 도입 취지 자체를 부정하진 않는다. 학생 선수 역시 훈련장 넘어 교실에서 급우들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고 스스로 공부하는 과정을 익힐 기회가 필요하다. 프로스포츠의 문은 너무나 좁고, 올림픽 메달이라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선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유 당선자는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만들기 위한 여러 조처를 놓고 “학생 선수의 인권 침해”라고 날을 세웠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는 “학교운동부의 학습권 보장을 위해 추진해온 모든 것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메달 딸 만한 애들을 빨리 뽑아서 운동에 올인해 국제대회에서 성적을 내는 게 최상의 가치인 것처럼 말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엘리트 선수, 그중에서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서 성공 가도만을 밟아온 지난날의 경험이 유 당선자를 ‘성공의 함정’(자신을 성공으로 이끈 과거 전략 및 문제 해결 방법에 집착해 시장의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현상)에 갇히게 할 수 있다. 유 당선자 주변에는 성공한 엘리트 선수 출신 지도자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은 유 당선자를 체육회장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공부-운동 간극 줄일 정교한 해결책 찾아야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만들기 위한 그간의 노력을 부정하려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체육회장은 비판에 더해 대책을 내놓아야 하는 자리다. 학교운동부 지원, 스포츠 영재 발굴과 같은 손쉬운 해결책이 아닌, 공부와 운동의 간극을 줄일 수 있는 정교하고도 창의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한다. 엘리트 체육 시스템이 키워준 스포츠 꿈나무를 만나는 만큼, 운동을 접고 제2의 꿈을 찾아 나선 이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기적의 사나이가 외치는 “한국 체육의 기적”은 두 집단의 간극을 얼마큼 좁히느냐에 달려 있다. 성공한 엘리트 선수라는 본연의 정체성에서 멀어질수록 성공한 체육회장에 가까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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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수 한겨레 기자 feel@hani.co.kr

*‘스포츠 찔러보기’는 체육계 현안을 살짝 비틀어보려는 시도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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