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일
모두가 퇴근한 조용한 사무실에서 야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울리는 전화벨 소리, 어머니의 전화였다. “오늘도 늦니?” 매일 야근에 회식에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그만큼 어머니도 아들의 퇴근 시간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그런 어머니가 정말 오랜만에 귀가 시간을 묻는 전화를 한 것이다. 의아하다는 말투로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버지가 친구분들 만나셔서 술 한잔 하신 것 같다. 올 때 모시고 와라.” 아버지가 계신 곳은 회사 반대쪽이었고, 오히려 택시비가 덜 나올 텐데 싶었지만, 이내 채비를 하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향했다.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뭐한다고 여기까지 왔냐.” 무뚝뚝하게 말씀하셨지만 아버지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하셨다. “환절기라 날도 추운데 든든히 입고 나오시지 그러셨어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향했다. 아버지는 취기가 오르셨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옷도 제대로 벗지 못하시고 바로 잠이 드셨다.
아버지의 외투를 어렵사리 벗겨 옷장을 열었을 때였다. 부모님의 살 냄새가 가득한 옷장 안에는 몇 벌 안 되는 옷들이 띄엄띄엄 걸려 있었다. 그 옷마저도 내가 첫 월급 기념으로 사드린 옷이거나 누나가 사줬다고 자랑했던 옷, 모두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옷들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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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옷장 속엔 이전에 보지 못한 낯선 옷은 보이지 않았다. 문득 월동 준비를 한답시고 여기저기 패션잡지를 뒤져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가슴이 먹먹했다.
취직을 한 이후로는 출근 준비에 바빠 부모님과 아침 식사하는 일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비몽사몽 ‘10분만 더…’를 반복하면서 부모님과의 식사 시간을 까먹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야근과 회식을 번갈아가면서 하고, 조금이라도 일찍 끝나는 날이면 그동안 얼굴 보기 힘들다며 서운해하던 친구들을 달래기 바빴다. 그렇게 매번 늦은 시간에 집에 들어갈 때면, 부모님은 항상 날 위해 작은 불을 켜놓고 주무시고 계셨다. 그저 매달 드리는 용돈이 부모님에 대한 내 관심의 표현이라 생각했다. 부모님이 그 돈을 어떻게 쓰시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내가 살면서 부모님의 옷장을 열어본 기억이 있었나? 어린 시절 오락실에 가기 위해 동전을 찾을 때 이후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곳이다. 집 안에서 가장 낯선 곳을 꼽자면 아마 그곳일 것이다. 그만큼 항상 가까운 곳에 있지만 돌아보지 않는 곳. 그곳은 지금 어머니·아버지와 너무 닮아 있었다. 이제 제법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계절이다. 오늘은 조금 일찍 퇴근해 백화점에 가야겠다. 그리고 이제는 자주 부모님의 옷장을 열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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