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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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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권성동, 세 차례 압박에 “필리핀 사업 EDCF 지원 곤란” 판정 뒤집혔다

기재부, 2024년 4월 필리핀에 “지원 곤란” 공식 통보했지만 권 의원 최상목 접촉·기재부 압력으로 ‘교량 모듈형 사업’ 지원
등록 2025-09-04 22:13 수정 2025-09-09 22:29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가 2022년 7월1일 필리핀을 방문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신임 대통령(오른쪽)에게 당시 대통령 윤석열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왼쪽)가 2022년 7월1일 필리핀을 방문해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신임 대통령(오른쪽)에게 당시 대통령 윤석열의 친서를 전달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부정부패가 우려되는 부실사업으로 판정돼 기획재정부가 차관 지원을 거부했던 7천억원 규모의 필리핀 토목 사업이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의 압력으로 뒤늦게 재개된 것으로 확인됐다. 특검 수사 등을 통해 윤석열 정부에서 개발도상국에 경제 원조를 하는 대외경제협력기금(EDCF) 지원이 사업 목적과 달리 활용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가운데 윤 정부 실세 ‘윤핵관’(윤석열 쪽 핵심 관계자)이 EDCF 차관 지원을 좌지우지했다는 의혹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필리핀 정부, 사전 협의 없이 차관 신청

한겨레21 취재를 종합하면, 필리핀 재무부는 2023년 11월 한국 정부에 EDCF 차관을 요청하는 신청서를 제출했다. 필리핀 전역에 산재한 350곳에 모듈형 교량을 짓는 5억1천만달러(약 7100억원) 규모의 건설 사업인데, 필리핀 정부는 이 가운데 4억3900만달러(약 6117억원)의 차관을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

이 사업의 정식 명칭은 ‘피비비엠(PBBM·President Bongbong Marcos Jr.)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이다. 사업명에 봉봉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대통령 이름이 들어갔을 정도로 필리핀 정부에 절실한 역점 사업이었다. 필리핀 농촌 지역 350곳에 강철 모듈형 교량을 건설해 농민과 농산물이 이동할 수 있는 농로의 접근성을 개선하려는 사업으로 2028년까지 루손섬에 210개, 비사야스섬에 88개, 민다나오섬에 53개의 다리를 놓는다는 계획이다.

EDCF 차관 신청은 보통 정부 사이에 사전 협의를 거친 뒤 이뤄지지만, 필리핀 정부는 이 사업을 추진하면서 그런 절차 없이 일방적으로 차관 신청서를 한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필리핀 정부는 차관을 신청하고 한 달 뒤인 2023년 12월 직접 농업개혁부 장관과 차관을 한국에 보냈다. 이들은 기획재정부 고위 관계자와 면담하고, 2023년 12월7일 김학용 국민의힘 의원(당시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과 EDCF 기금을 운용하는 한국수출입은행 관계자도 면담했다. 여기서 필리핀 쪽은 한국 기업의 사업 참여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 사업에는 필리핀 재벌 ‘엘시에스(LCS)그룹’이 참여할 예정인 것으로도 알려졌다. LCS그룹은 필리핀 의회 하원의원과 9선 주지사를 지낸 정재계 거물인 루이스 차빗 싱손 회장이 지배하는데, 그는 필리핀 정부가 한국을 방문할 때 함께 왔다.

기재부는 필리핀의 요청을 받고 해당 사업의 EDCF 지원 여부를 수개월 동안 심의했다. 2023년 12월에는 필리핀에 진출한 국내 기업 간담회를 열어 이 사업에 참여할 의향이 있는 기업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 사업에 참여하려는 기업이 없었다. 결국 기재부는 사업이 성공 가능성이 작다는 이유 등으로 2024년 2월 “EDCF 지원이 곤란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2024년 4월 필리핀 정부에 자금 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공식 서한으로 통보했다.

기재부가 이 사업의 성공 가능성이 작다고 판단한 까닭은 먼저 공사 현장이 350곳이나 돼서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모듈형 교량을 설치해야 하는 지점 350곳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관리·감독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게다가 지방자치단체별로 인허가를 따로 받아야 해 비용이 많이 드는 점도 성공 가능성을 떨어뜨리는 이유로 지목됐다.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하더라도 필리핀의 미비한 도로 등 교통시설 관리 체계 때문에 사업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렵다고 본 점도 또 다른 이유였다.

기획재정부가 2024년 4월 ‘EDCF 지원 불가’ 결정을 내린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이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의 압력으로 재개됐다. 한국수출입은행은 2024년 10월 사업 규모를 350개 교량에서 70개로, 5억1천만달러 규모에서 8천만∼1억달러 규모로 줄여 다시 타당성조사 용역(F/S)을 발주했다. 지도는 한국수출입은행이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건설사업 타당성조사 용역을 위한 제안 요청서’에서 밝힌 사업 예정 지역.

기획재정부가 2024년 4월 ‘EDCF 지원 불가’ 결정을 내린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이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의 압력으로 재개됐다. 한국수출입은행은 2024년 10월 사업 규모를 350개 교량에서 70개로, 5억1천만달러 규모에서 8천만∼1억달러 규모로 줄여 다시 타당성조사 용역(F/S)을 발주했다. 지도는 한국수출입은행이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건설사업 타당성조사 용역을 위한 제안 요청서’에서 밝힌 사업 예정 지역.


기재부, 부실·부패 가능성으로 ‘지원 불가’ 결정

특히 기재부가 사업 지원을 거절한 결정적인 이유는 부실·부패 가능성 때문이었다. 이 사업에 현지 컨설턴트로 참여한 필리핀 현지 기업 ㄱ사는 과거 비슷한 교량 건설 사업에서 부실공사를 했고 부정부패 의혹이 있었다. ㄱ사는 1996년 200개 교량을 설치하는 사업을 하는 과정에서 고가 납품 논란을 일으켰고, 도로와 연결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는 교량을 설치하는 등 부실공사 문제로 말썽이 됐다. 기재부는 당시 이렇게 사업이 부실하게 흐른 배경에 필리핀 특유의 정경유착으로 지적되는 부정부패 관련자가 연루됐다는 의혹도 확인한 것으로 파악됐다.

실제 이러한 우려는 기재부뿐만 아니라 필리핀 정치권에서도 제기됐다. 필리핀 연방당 소속 상원의원인 프랜시스 톨렌티노는 2024년 10월 열린 필리핀 정부 예산 감사 과정에서 “이전에 영국의 지원을 받아 모듈형 교량 사업을 추진했는데 어디에 설치해야 할지 제대로 확인하지도 않았다”며 “재료 대부분이 창고에 그대로 보관돼 있다”고 지적하며 부실·부패 의혹을 제기했다.

이런 종합적 이유로 사업 타당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확인했지만 기재부는 그럼에도 차관을 받는 수원국 정부와 한국의 외교 관계에 문제가 없을지까지 고려한 것으로 전해진다.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EDCF 사업은 정부 지원으로 국내 기업이 국외 수주 실적을 쌓는 측면의 목적도 있지만 해당 국가와의 외교적 관계 개선 및 유지 기능으로도 활용된다. 하지만 당시 기재부는 해당 사업을 추진하지 않더라도 한국 정부와 필리핀 정부의 관계는 문제없으리라 봤다. ‘파나이·귀마라스·네그로스(PGN) 해상교량 건설사업'(9억500만달러) 등 이미 필리핀과 진행 중인 EDCF 사업 규모가 컸고, 추가로 필리핀 정부에서 제안해온 다른 사업도 있었기 때문이다.

권성동 국민의힘 의원이 이 사업에 갑자기 등장한 시점은 기재부가 내부적으로 지원 거부 결정을 내린 2024년 2월 초였다. 한겨레21이 기재부 관계자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이미 ‘지원 거부’로 결정 난 이 사업에 대해 권 의원은 최상목 기재부 장관을 직접 접촉해 “지원을 다시 검토해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된다. 기재부가 내부적으로 사업 지원이 곤란하다는 결론을 낸 상황에서 이를 뒤집기 위해 부처 장관에게 직접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권 의원은 당시 최상목 장관에게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에 EDCF를 지원하면, 그 대가로 필리핀 정부로부터 니켈 광산 채굴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압박했다고 한다. 이 사업에 참여하려는 국내 기업이 별로 없다는 점과 관련해서는 권 의원이 직접 “대우건설과 삼부토건 등이 참여 의향이 있다”는 점을 피력했다고 한다. 실제 해당 사업의 브로커가 삼부토건에 사업 참여를 요청하는 문건을 보낸 사실도 확인됐다. 이에 삼부토건은 사업 검토를 진행했지만 당시 이미 사세가 기울었던 상황이라 사업 여력이 없어 참여 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

권 의원 압박에 수출입은행 현장 면담 진행

권 의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기재부가 4월 필리핀 정부에 지원 거부 공식 서한을 전달하자, 5월 권 의원은 다시 기재부에 사업 재추진을 거듭 요청했다. 권 의원의 압박에 결국 EDCF 기금을 운용하는 한국수출입은행의 필리핀 사무소가 5월 필리핀 농업개혁부 차관과 면담을 했다. 필리핀 쪽은 이 사업이 필리핀 정부의 최우선 사업이며, 권 의원이 언급한 대우건설이 참여 의사를 보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필리핀 쪽은 선정한 사업 대상지 350곳은 엄격한 검토를 거쳐 선정한 곳이라 사업 진행에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도 밝혔다. 그러나 수출입은행이 다시 확인해보니, 대우건설은 사업지가 너무 많아 관리 측면에서 사업 참여가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이에 수출입은행은 여전히 이런 단점들을 보완하거나 개선하기 전에는 사업 추진이 어렵다는 뜻을 필리핀 쪽에 전하고 돌아왔다.

수출입은행의 현장 면담 이후에도 사업에 진척이 없자 권 의원은 세 번째 압박에 나섰다. 5월 말 이번에는 기재부 관계자들을 의원실로 불렀다. 권 의원은 이 자리에서 필리핀과의 외교 관계를 고려해 사업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며 필리핀 정부와 다시 협의해달라고 요구했다. 한겨레21이 기재부 관계자 등을 취재한 내용을 종합하면, 이 과정에서 권 의원은 수출입은행 관계자들이 필리핀을 방문했을 때 필리핀 정부 관계자들에게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고 지적한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상 EDCF 지원을 거부하는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을 업무상 실책의 이유를 들어 협박한 셈이다. 권 의원의 지적에 수출입은행은 ‘사실이 아니다’라고 기재부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기재부는 권 의원의 계속되는 압박을 못 이기고 2024년 10월 수출입은행의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건설사업 타당성조사 용역’ 발주를 승인했다. 대신 규모를 기존의 350개 교량에서 70개 교량으로 줄이고, 7100억원(5억1천만달러) 규모에서 1100억~1300억원(8천만~1억달러) 규모로 줄였다. 타당성조사 용역을 발주한 것은 사실상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을 한다는 의미다. 수출입은행은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의 질의에 “사업타당성조사(F/S)는 외부기관을 통해 객관적으로 사업 타당성을 검토하는 절차로 기술적·경제적·정책적 타당성 및 환경·사회 영향 등을 중심으로 검토한다”며 “다만 사업타당성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승인 추진 여부를 결정하는바 사업타당성조사를 실시한 사업이 모두 승인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기재부는 앞서 2024년 2월 이 사업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이미 시범 사업으로 실시하거나 사업 범위를 줄이더라도 도로 등 사회기반시설이 부족해 사업이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는 검토 결과를 냈다.

권성동(왼쪽 넷째) 국민의힘 의원이 2022년 7월1일 필리핀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신임 대통령에게 윤석열의 축하 인사를 전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권성동(왼쪽 넷째) 국민의힘 의원이 2022년 7월1일 필리핀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필리핀 신임 대통령에게 윤석열의 축하 인사를 전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외교부 제공


국민의힘 원내대표로 필리핀 특사 방문이 배경?

결국 윤석열과 가까운 대표적 ‘윤핵관’ 정치인이고 여당인 국민의힘 원내대표까지 역임한 5선 권성동 의원의 압박으로 지원 거부 통보가 났던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이 재개 기회를 얻었다. 이 과정에서 권 의원은 최상목 장관을 직접 접촉했고, ‘외교 결례’까지 언급하며 수출입은행을 적극적으로 압박해 죽은 사업을 살려내는 힘을 과시했다.

그렇다면 검사 출신으로 국외 원조 사업과 관련한 상임위에 소속된 적이 한 번도 없던 권 의원은 언제부터 필리핀 사업, 특히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에 관심을 가졌을까. 권 의원이 필리핀과 연을 맺은 건, 2022년 6~7월 국민의힘 원내대표로 재임하던 시절 대통령 윤석열의 특사 자격으로 필리핀을 전격 방문한 때로 보인다. 당시 원 구성 협의가 난항을 겪던 때라 여당 원내대표를 국외 특사로 보내는 게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이 많았다.

권 의원은 이후 윤석열 정부에서 열린 필리핀과의 크고 작은 공식 모임에 계속 모습을 드러냈다.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은 2023년 12월6일 서울 용산 백범김구기념관에서 열린 ‘한-필리핀 경제협력 콘퍼런스'였다. 필리핀 농업개혁부(DAR)가 개최한 행사에는 콘드라도 에스트렐라 농업개혁부 장관이 직접 참석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이번 방한에서 농업개혁부의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 프로젝트 협력은 물론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이 확대되기를 기대한다”며 “교량 사업을 통해 필리핀과 한국의 관계도 튼튼한 다리처럼 굳건해지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는 LCS그룹 루이스 차빗 싱손 회장 등이 참석했고, 권 의원도 참석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보다 약 1년 전인 2023년 1월19일에는 ‘새로운 한국·필리핀 교류 협력을 위한 모색’이라는 행사가 열렸는데 권 의원은 여기에도 참석했다. 이때도 LCS그룹의 싱손 회장과 제리 싱손 일로코스수르 주지사 등 필리핀 지방정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한겨레21은 권 의원과 권 의원의 보좌관에게 수차례 전화와 문자로 연락을 취했지만, 이들은 답변을 해오지 않았다. 기재부와 수출입은행은 ‘지원 불가’ 판단을 했던 필리핀 농촌 모듈형 교량 사업을 재개한 것과 관련해 “당초 아국(우리나라) 기업들의 해당 사업에 대한 참여 관심도가 낮은 것으로 파악되어 EDCF 지원이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일부 아국 기업이 필리핀 농업개혁부(DAR) 앞으로 사업 참여 의향을 표시해 사업타당성조사를 실시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만 권 의원의 압력 의혹에 대해서는 “확인해보겠다”는 답변만 했다.

채윤태 기자 chai@hani.co.kr·박준용 기자 juneyong@hani.co.kr·김완 기자 funnybo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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