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5월31일, 단정하게 차려입은 한 무리의 인사들이 나란히 국회로 걸어 들어왔다. 제17대 총선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합쳐 약 370만 표를 얻어 국회에 처음 입성한 민주노동당 의원들이었다. 소감을 묻는 말에 고 노회찬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당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는 데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우리 서민들, 노동자, 농민 대표가 여기까지 오는 데 사실 50년이 걸렸어요.” 진보정치의 원내 입성에서 상징이 된 이 장면은 그러나, 정확히 20년 만에 한 세대가 막을 내리게 된다. 통합진보당을 거쳐 민주노동당의 후신이 됐던 녹색정의당이 제22대 총선에서 원외로 밀려나면서 독자적 진보정당이 의회에서 사라지게 됐다.
총선 직전 여론조사에서 녹색정의당의 지지율은 1~2%대에 머물렀다. 실제 득표율도 다르지 않았다. 제22대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의 비례대표 득표율은 2.14%였다. 60만9313표. 이들은 어떤 생각으로 녹색정의당을 택했을까. <한겨레21>은 이번 총선에서 진보정당을 선택한 이들과, 지지자였지만 총선에서 선택을 바꾼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서울 마포구에 거주하는 직장인 김아무개(31)씨는 이번 총선에서 지역구는 녹색정의당 장혜영 의원을, 비례대표도 녹색정의당에 투표했다. 그에게 중요한 요인은 양당과 조국혁신당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지난 총선 때도 정의당에 투표했지만 정의당 자체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은 아니에요. 민주당과 국민의힘으로 대표되는 양당에 너무 많이 실망했거든요.”
그렇다고 해서 김씨가 녹색정의당을 ‘차악’으로 선택한 건 아니다. 그는 녹색당과 정의당 모두를 지지하고, 두 정당의 가치가 진보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 맞닿아 있다고 했다. 다만 그는 “녹색정의당은 요즘 청년들이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을 돌아보지 못했고 (이들을 위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것 같다”며 “불과 4년 전 주목받던 페미니즘이나 환경, 노동 관련 이슈도 ‘나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다’고 생각하는 요즘 청년층에는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아이티(IT)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유아무개(52)씨는 녹색정의당을 찍은 이유로 ‘의리’를 언급했다. “노회찬 이후 유능한 정당이라는 기대도 많이 사라졌어요. 그나마 비대위(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리고 녹색당과 합치는 것을 보며 정체성을 회복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의리’에 기대 선택한 거죠.”
경기 용인에 거주하는 회사원 구아무개(59)씨는 “녹색정의당이 제시하는 게 뭔지 분명하지 않았다”면서도 비례대표 투표에서 녹색정의당을 뽑았다고 했다. 자신을 적극적 진보정당 지지자라고 밝힌 그는 “(녹색정의당은) 이제 계급정당 의미는 퇴색했다”고 말했다. “조국혁신당이 사회권이 우선하는 나라, 연대임금제를 말했어요. 녹색정의당은 그 얘기조차 못 꺼냈거든요. 노동자 계급에 기초한 정당이 되려는 최소한의 의지조차 보이지 않은 거예요.”
녹색정의당이 제시한 정책 방향은 불분명했을까. 당의 핵심 의제는 분명 있었다. 장혜영 녹색정의당 의원은 <한겨레21>과의 인터뷰에서 “저희가 조명받지는 못했지만 일관되게 추구해왔던 노동과 녹색, 성평등과 같이 구체적인 의제들이 있었다”며 “전세사기 문제나 ‘집게손가락 마녀사냥’ 문제 등과 관련해 현장에 쫓아간 정치인들도 녹색정의당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런 의제들은 유권자, 심지어 지지자에게도 가닿지 못했다.
늘 총선 때 정의당에 투표해왔다는 직장인 노치원(34)씨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당 이중대론’에 너무 함몰돼서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은 것 같아요. 노동이나 기후, 젠더 등 거대 담론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피곤한 서민들의 피부에 와닿을 수 있도록 더욱 섬세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6411번 버스 첫차에 오르는 사람들을 감싸안을 수 있도록 정의당 본연의 가치에 집중했으면 해요.”
녹색당의 정책이 청년층에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못했다던 김씨도 좀더 와닿는 정책이 부재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요즘 청년들은 나보다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나 환경보호 같은 진보적 가치를 살필 여유가 없는 것 같아요. 정말 지금 청년세대에 피부로 와닿는 정책, 이를테면 ‘워킹맘’을 위한 파격적인 제도 개혁이나 포괄임금제 개선과 같이 삶과 밀접한 의제를 제시해야 한다고 봐요.”
녹색정의당의 위기는 하루이틀 사이에 나온 얘기가 아니다. 강원 양양군에 거주하며 비례대표로 녹색정의당을 뽑은 김동일(55)씨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려면 20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말했다. “2008년 민주노동당이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지기 시작했어요. 심상정 당시 비대위 혁신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순간부터 이미 균열이 생긴 거예요. 그걸 제대로 보수하지 못하고 미봉책으로 땜빵하면서 온 게 오늘날 현실로 드러난 거죠.”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는 ‘일심회 사건’(당원이 연루된 간첩사건) 관련자 제명을 담은 혁신안이 부결되자 심상정 당시 비대위원장을 비롯한 노회찬, 조승수 등 평등파가 대거 탈당한 사건이다. 김씨도 당시 민주노동당을 탈당한 뒤 지금까지 당적을 갖지 않았다. 그는 “저 같은 사람들은 선명성 있는 진보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분당 사태 이후) 대중적이고 부드럽게 가고자 했고 그렇게 조금씩 밀려났다”고 말했다.
이후로도 위기는 늘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2014년 통합진보당이 해산됐고 2018년 노회찬 의원이 세상을 떠났다. 2021년엔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다. 2022년 대선에서 심상정 당시 대선후보가 2.37%(약 80만 표)에 그치자 정의당은 ‘정의당10년평가위원회’를 꾸리고 당의 노선 등 자체 분석을 했다. 당시 평가위는 “진보정당으로서의 효능감을 의심받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며 “이는 선거 시기의 전략전술, 정책 등의 문제가 아니라 지난 10년간 누적된 노선과 정체성의 불명확함으로부터 기인된 결과”라고 진단했다.
평가위가 지적한 문제는 결국 해결되지 못한 채 제22대 총선까지 이어졌다. 이번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을 선택한 이들이나 다른 정당에 투표한 ‘과거 지지자’들 모두 공통으로 이야기하는 건 ‘선명성’ 부족이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김지혜(32)씨는 그간 총선과 대선에서 늘 정의당에 표를 줬지만 이번 총선에서 처음으로 다른 정당에 투표했다. 지역구는 민주당 후보에게,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에 표를 던진 것이다.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조국혁신당에 투표한 이유는 솔직히 단순해요. 거창한 정치 의제에 공감한 게 아니라 ‘(윤석열 정권 남은 기간이) 3년도 길다’라는 선명성 때문이거든요. 이전에 늘 정의당을 택한 것도 노동 이슈에서 선명성과 정체성이 뚜렷했기 때문이에요. 그러나 제20대와 제21대 국회에 꽤 많은 인원이 원내 진입을 했음에도 가시적 성과가 없었던 것 같아요. ‘노동’ 관련 의제에서 정의당이 과연 자신만의 정체성을 가졌는지 의문도 들었고요.”
이번 총선 비례대표 투표에서 녹색정의당을 선택한 회사원 박아무개(54)씨도 이번 총선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조국혁신당 창당이라고 했다. “이렇게 빨리 꽃을 피울 줄 몰랐어요. 확장성이 대단했고, 그 부분은 인정할 만해요. 조국혁신당이 검찰개혁을 초기에 맨 앞에 내걸었다가 좀 지나면서 사회권과 연대임금제 등을 얘기했잖아요. 그런 지점이 들어줄 만했고, 기대치가 생겼어요. 다만 정책이 넓고 깊지는 않은 것 같아서 고민하다가 녹색정의당에 투표했어요.”
김동일씨는 “진보라면 거대 야당과 여당 사이에서 작더라도 정말 선명성 있게 가야 하고 우리 사회가 배고파하고 굶주려 있는 부분을 짚어내야 하는데 녹색정의당은 존재감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다”며 “녹색정의당이 뭐 하는 당이냐고 물었을 때 할 말이 없게 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녹색정의당을 지지했지만 진보당을 지지하기로 마음을 바꿔 더불어민주연합에 투표한 이도 있었다. 울산 중구에 거주하는 김시현(27)씨는 “정의당이 이전의 정의당과 다른 길을 간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류호정 전 정의당 의원이 2021년 ‘알페스(실존 인물을 소재로 허구의 애정 관계를 다룬 글이나 그림 등의 창작물) 처벌법’ 발의에 참여한 것을 예로 들었다. “저에게는 그게 퀴어에 관한 여성 이야기를 금지하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알페스라는 게 결국 여성들이 평소 가지고 노는 것을 ‘퀴어’하게 해석한 건데, 이걸 금지한다고 하면 여성들에게 퀴어 서사는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했어요.”
김씨는 류 전 의원의 이런 행보가 자신과 같은 20대 여성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봤다. “20대 여성들은 페미니즘이 굉장히 중요한 안건인데 더 이상 정의당은 이 문제에 어떤 관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정의당이 가진 이미지가 진보적 여성에게는 선택지처럼 보였던 게 있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죠. 반대로 진보당은 울산 북구에서 윤종오 의원이 나왔을 때 페미니즘 공약이 쏟아져 내렸거든요. 진보당 자체도 페미니즘에 관해 굉장히 싸움을 많이 하는 정당이고요.” 김씨는 이번 총선에서 진보당을 지지했다.
녹색정의당 내부에서도 선명성 부족 같은 문제는 인지하고 있다. 정재민 녹색정의당 사무총장은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보수정당이나 민주당이 하지 못한 이야기를 선명하게 내세우면서도 잘 싸워야 했다”며 “정의당이 조국 사태와 선거제도 개혁 약속 이후 민주당마저 위성정당을 만드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끼면서 민주당과 거리두기에만 너무 치중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유권자들이 보기엔 윤석열 정부보다 민주당 비판에 집중하고 있다고 인식한 것 같아요. 또 의원이 소수이다보니 각자 어떤 의정활동을 하는지도 굉장히 중요한데, 류호정 의원 사퇴 등 여러 사건이 발생하면서 신뢰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정 사무총장은 선거제도 개혁에 정의당이 너무 몰입한 것 같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결국 선거제도 개혁은 기득권이 결정하는 것이지 소수 정당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거든요. 조국 법무부 장관을 승인한 것도 선거제도 개혁을 받아내기 위해 동의한 거였어요. 근데 결국 만들어진 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준연동형 비례대표제고 위성정당도 막지 못했죠.”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네요.” 총선 사흘 뒤 장혜영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렸다. 낙선 인사를 한 지 3일 만에 후원 계좌 한도가 마감됐다는 이야기였다. 그가 트위터에 올린 낙선 인사는 수천 번 리트위트됐다. “남겨주신 글들을 보면 제가 4년 동안 페미니스트 정치인으로서 활동해온 일관성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진보정치에 대한 안타까움도 있었어요.” 장 의원이 말했다.
<한겨레21>이 인터뷰한 20·30대 여성과 성소수자 집단에서도 장 의원 이름이 여러 차례 등장했다. 유진(27)씨는 이번 총선 선택에 무엇이 가장 크게 영향을 줬느냐는 질문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장혜영”이라고 했다. 대전에 사는 그는 “제가 뽑을 수 있는 지역은 아니지만 에스엔에스(SNS)로 선거운동을 계속하는 것을 보면서 저런 후보가 우리 지역에 있었다면 (지역구 투표에)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들은 장 의원 개인 지지를 넘어 녹색정의당이 추진해왔던 정책 방향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임경아(37)씨는 “소수자 인권이나 기후위기 같은 이야기가 당장 눈앞의 살림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지 녹색정의당이 정책적인 부분에서 미진한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장기적인 비전이 필요한 일인데 정권이 바뀌면서 이런 부분이 (유권자에게) 와닿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유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도 녹색정의당을 찍은 가장 큰 이유는 차별금지법 때문이에요. 차별금지법을 제정하겠다고 하는 당이 여러 개였다면 고민했을 텐데 미루거나 논의하려는 곳이 없었어요. 과실만 따지면 양당에도 큰 과실이 있죠. 그런 것에 비해 너무 (녹색정의당을) 엄격하게 바라본 게 아닌가 싶어요. 앞으로 차별금지법은 얼마나 논의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녹색정의당도 이 지점에서 다시 출발한다. 정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녹색, 노동, 성평등 의제는 녹색정의당밖에 이야기 안 했던 거고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주제잖아요. 선거 기간에 진보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수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거기에서 (출발해)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과 현장으로 들어가서 다음 방향을 제시하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진보정치를 꾸준하게 해나가면 또 다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요.”
류석우 기자, <한겨레21> 기자 종합 raint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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