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은 총수 사익을 위해 투자자의 이익은 무시하고 기망했다. 조직적인 자본시장 질서 교란 행위로서 중대한 범죄다.”
2020년 9월1일 이재용 삼성그룹 회장을 불법승계 등 19개 범죄 혐의로 재판에 넘길 때 총책임자인 이복현 당시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부장검사가 법조기자 브리핑에서 한 말이다. 3년5개월 만인 2024년 2월5일 이 사건 1심 선고가 나왔다. 선고를 불과 몇 시간 앞두고, 그사이 ‘신분’이 높아진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의 태도는 180도 바뀌었다. 그는 “국민 경제에 대한 기여에 족쇄가 있었다면 심기일전할 기회가 되면 좋겠다”(금감원 업무계획 기자간담회)고 말했다. 자신이 검사 때 최악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규정하며 뛰어들었던 수사와 기소를 ‘족쇄’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날 이 회장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선고를 받았다.
열흘 전인 1월26일 나온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 대한 1심 선고에서도 ‘박근혜 청와대’와의 재판거래 등 47개 범죄 혐의에 대해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이 사건의 수사와 기소를 책임졌던 검사는, 법무부 장관에 이어 여당 대표로 ‘벼슬’이 높아진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다. 그는 선고 직후 이렇게 말했다. “그 사건은 사실상 대법원의 수사 의뢰로 진행된 사건이다.”
한 위원장도 5년 전 양 전 원장을 기소할 때는 이렇게 날을 세웠다. “사법행정권의 최고책임자인 피고인들이 재판에 개입하여 법관의 도리를 심각하게 훼손한 초유의 사건이다.”
이런 표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검사장 출신인 ㄱ변호사는 이렇게 지적한다. “필요하면 여론의 분노를 끌어내다가 시간이 지나니 별일 아닌 것처럼 대하는 게 참…. 수사 의지가 없었는데 시켜서 했다는 식으로 (한동훈·이복현이) 말하는데, 황당하죠. 본인들이 할 생각이 있었으니까 했던 거지. ‘우리 힘 좀 봐라’ ‘우리한테 잘못 걸리면 이렇게 괴롭다’ 이런 걸 보여주려 한 거죠. 그런데 재판거래·이재용 사건에서 제도적으로 바뀐 게 뭐 하나 있나요? 수사한 사람들이 자리 차지한 것 말고 뭐가 바뀌었나요? 검사들은 이런 사건들이 최종 무죄가 나와도 과실이 있다, 책임이 있다고 인정을 안 합니다. 결과까지 책임지는 게 공직자다운 모습이겠죠.”
한국을 넘어 세계적 기업이 불법승계 의혹을 받고, 어느 기관보다 독립적이어야 할 법원이 정부와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 수사하고 기소한 검사들은 어느덧 영전해 지위만 높아지고, 재판 결과에는 책임지지 않으며, 의혹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제도적 개선은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한동훈 위원장과 이복현 원장뿐만 아니다. 한 위원장 밑에서 ‘재판거래’ 사건을 수사한 신봉수·송경호·양석조·김창진 서울중앙지검 특수 1~4부장은 현재 각각 수원지검장, 서울중앙지검장, 대검 반부패부장, 서울중앙지검 제1차장이다. ‘불법승계’ 사건을 이 원장 밑에서 수사한 김영철·최재훈 부부장도 각각 현재 대검 반부패1과장, 서울중앙지검 반부패수사2부장이다. 모두 일선 검사들이 선망하는 요직이다.
그러는 동안 세상은 나아지지 않았다. 지적됐던 제도 결함들은 그대로다.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 요청으로 스스로 내렸던 ‘일제강점기 강제노역 피해자 승소’ 판결을, 새로운 규칙까지 만들어가며 5년 동안(2013~2018년) 부득부득 뭉갰다는 것이 ‘재판거래’ 사건의 핵심이다. 이 사건에서 ‘제왕적 대법원장’의 손발 역할을 했던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어떻게 됐을까. 폐지 논의까지 나왔지만, 여전히 엘리트 법관 등용문으로 인식된다. 법관 관료화를 막겠다고 도입한 법원장 후보 추천제도 조희대 대법원장 취임(2023년 12월) 이후 제동이 걸렸다.
검사장 출신 ㄴ변호사는 이렇게 돌아봤다. “물론 판사들 제 식구 감싸기가 의심됩니다. 그런데 이 건은 법관이 법원행정처 말을 듣고 헌법에서 보장된 ‘법관 독립성’을 내팽개쳤다고 자백하는 수준이 돼야 유죄가 나오는 사건이었어요. 판사가 누군가의 영향을 받았다 해도 그것 때문에 판결했다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당시 검찰 내에서도 기소는 해도 유죄가 어렵겠다고 생각했던 사건이었어요. 수사가 불가피했다곤 하지만, 애초에 구조적 문제를 같이 손봐야 했던 사안이었어요.” 판사 출신 ㄷ변호사의 지적은 이렇다. “재판은 증거 확보가 관건입니다. 수사만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법리상 문제가 안 될 경우 세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도덕적으로 괜찮은 것처럼 결론이 나버려요. 애초에 법관 징계가 병행돼야 했어요.”
이재용 회장 불법승계 사건에서도 3년5개월 동안 법적 단죄만 기다리다 제도를 개선할 기회가 날아갔다. 2015년 9월 자산가치가 각각 1조7500억원과 1220억원으로 14배 이상 차이가 났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거꾸로 0.35 대 1의 비율로 합병했다. 이재용 회장과 일가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42.12%)이 삼성물산(1.37%)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로 책정되면서 이 회장 일가는 막대한 금전적 이익을 가져갔지만, 국민연금과 수많은 삼성물산 주주들은 심각한 손해를 봤다. 이 과정에서 ‘주식의 시장가격을 기준으로 합병한다’는 자본시장법 시행령(제176조의 5) 등 현행 제도가 악용됐다는 지적이 나왔다. 삼성물산 쪽이 삼성물산 주가가 크게 낮아진 시기를 굳이 제일모직과의 합병 시점으로 결정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쳤지만, 1심 법원이 이를 문제 삼지 않은 것이다.
손창완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렇게 지적한다. “1997년 일반적으로 기업 합병을 할 때 수익 등 가치 계산에서 장난치는 일이 벌어지니까 시장가격이 가장 정직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서 지금의 자본시장법 합병 산식이 정해졌어요.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죠. 그런데 지금은 그 법을 악용해서 총수 일가에는 유리하지만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시기에 합병하는 일이 벌어지는 거죠. 임원들이 주주의 이익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미국 판례와 달리, 우리나라 판례는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이런 구조에서 검찰은 삼성의 합병 과정에 부당거래가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게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판결이 나온 거죠. 법령을 문자 그대로만 받아들이는 법원의 형식주의적 태도도 정말 문제가 크지만, 삼성의 부당 합병을 계기로 제도를 개선해 재발을 방지해야 했는데 전혀 못한 거죠. 삼성을 모방해서 승계를 거저 하는 사례들도 나오고 있어요.”
‘사실인정과 법리판단을 면밀하게 검토·분석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예정’.
양승태·이재용 1심 무죄 판결이 나오자, 검찰이 법조기자들에게 뿌린 문자메시지다. 하지만 2010년 4월9일 한명숙 전 총리 뇌물 사건 1심 무죄 선고가 났을 때 검찰의 기조는 사뭇 달랐다. 김주현 당시 서울중앙지검 제3차장은 “이번 선고는 다 빠지고 반쪽만 남은 판결이다. 진실을 찾아가려는 형사재판의 기본적인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2023년 9월27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구속영장이 기각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원석 검찰총장은 이례적으로 기자들 앞에 나타나 “사법은 정치적 문제로 변질되어서도 안 되고 정치적 문제로 변질될 수도 없고 또 변질되지도 않는다”며 영장판사를 성토했다.
이런 온도차는 검사 출신 대통령의 심기에 기민하게 반응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재용 회장은 이번 사건 재판 도중인 2022년 8월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복권됐다. 이 회장은 별건인 ‘국정농단’ 사건 유죄로 취업이 제한된 상태였다. ‘재판거래’ 사건에는 윤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이 계승한 박근혜 정부가 개입돼 있다. “바람보다 빨리 눕는 게 검사들이에요. 윤 대통령이 계속 시그널을 줬잖아요. 이재용 회장은 떡볶이 먹고 붙어다니는 국정 동반자잖아요. 사법농단이 처벌받으면 여당에는 손해죠. 박근혜 정부랑 관련됐잖아요. 강제동원을 대하는 태도도 박근혜·윤석열 두 정부가 같고요. 인사에 민감한 검사들이 왜 모르겠어요.” 판사 출신 ㄷ변호사의 지적이다.
한동훈·이복현 등 수사 총책임자들이 검찰을 떠난 것 자체가 무책임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현직 ㄹ검사는 “이런 큰 사건 수사에서 총책임자는 중요하다. 밑의 팀장들은 조각조각 자기 담당을 알 뿐 큰 그림은 총책임자가 봤을 것”이라며 “남아서 공소 유지하는 검사들은 감당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무죄 나와도 아무 문제 없는데 왜 그래.”
2008년 <피디수첩> 사건을 수사하다 검찰을 떠난 임수빈 변호사가 2019년 1월9일 제이티비시(JTBC)에 나와 상급자로부터 들었다며 전한 말이다. 한동수 전 대검 감찰부장 역시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이 부하 검사들에게 “야! 무죄 신경 쓰지 말고 기소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저서 <검찰의 심장부에서>(오마이북 펴냄)에 썼다.
“말이 안 되는 사건에서 구속영장을 받아내면 오히려 능력자가 됩니다. 윗사람 입장에선 말 잘 듣는 검사가 나중에 무죄를 받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아요. 승진시키죠. 그걸 제일 잘하던 사람들이 대통령이 되고 법무부 장관이 되니까 더 노골적이 된 거죠. 무죄가 나온 걸 반영해 인사하면 특수부 검사들은 승진하면 안 되죠. 지금의 한동훈·윤석열도 있으면 안 되죠. 옛날 중수부(대검 중앙수사부)나 지금 특수부 무죄율은 형사부보다 몇십 배 높잖아요.”(ㄹ검사)
과거 중수부(2013년 폐지) 수사의 1심 무죄율은 9.6%(2004~2008년) 수준이다. 같은 기간 전체 형사사건 1심 무죄율(0.31%)의 약 31배에 이른다.
재판에서 무죄가 나와도 이를 가볍게 여기는 분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해당 검사는 아무런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 유우성씨 ‘보복기소’ 사건에 대한 검찰 대응이 대표적이다. 2021년 10월 대법원은 이 사건에 대해 “공소권 남용”이라 판단했지만, 이 사건을 기소한 안동완 검사는 징계받기는커녕 부산지검 제2차장 검사 등으로 영전했다. 국회가 탄핵 소추했지만, 되레 안 검사 쪽은 “정치적 목적의 보복탄핵”이라고 반박(2024년 2월20일)했다.
ㄷ변호사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검사들은 구속하면 성공한 수사라고 생각하죠. 무죄는 별로 신경을 안 써요. 지금까지 만난 검사 중 자기가 무죄를 받았다고 ‘내 책임이다’ ‘후회한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못 만났어요. 재판을 위해 수사하는 거면서 판사와 의견이 다르다고 하는 것도 황당한데, 그 정도가 아니에요. ‘판사가 틀렸다’ ‘판사가 돈 받아먹었을 것’이라 하더라고요.”
물론 검찰에도 무죄 평가 제도는 있다. 그런데 속을 들춰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다. 외부 인사로 구성된 ‘사건평정위원회’(사평위)가 검사 책임을 평가하는데, 문제는 사평위가 ‘검사 잘못’으로 결론 내는 비율이 10%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평위가 심사한 사건을 비롯해 판단 근거, 인사 반영 여부 등은 모두 비공개다. 사평위 결과를 인사에 반영하는 건 인사권자 마음에 달려 있기도 하다. 2013년 검찰은 민간인으로 구성된 첫 사평위를 띄웠는데, 신상규 전 검사장이 위원장을 맡았다.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의 장본인이다. 이 때문에 유명무실한 제도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만, 검찰 입장에선 ‘우리도 이런 제도가 있다’는 식으로 명분을 쌓는 좋은 도구가 된다.
사평위 같은 검찰 감시 제도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유우성 간첩 조작 사건’ 같은 일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건 담당 이시원 검사는 윤 대통령에 의해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에 발탁됐다. 증거 조작으로 수사·기소 과정에서 문제를 일으켰음에도 윗사람만 잘 만나면 출세한다는 강력한 사례가 된 것이다. ㄹ검사는 “주요 사건은 모두 검찰총장이나 하다못해 검사장이 수사·기소를 결정하기 때문에 검사의 잘못이라는 결론이 날 수 없는 구조”라며 “이재용·양승태 사건 모두 윤석열 당시 총장·검사장이 결정했는데, 무죄가 나왔다고 처벌하거나 징계할 수 있겠느냐”라고 설명했다.
2·3심이 남아 있지만, 재판거래·삼성 불법승계 사건의 무죄 판단의 뒤안길에는 씁쓸한 평가만 남았다. “결국은 검찰이 저인망식 수사로 범죄 혐의를 수십 개씩 적용해도, 이재용·양승태같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전관 변호사들을 선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는다, 이게 교훈이랄까요.”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의 말이다. ㄹ검사도 “결국 무죄가 나온다면, 막대한 소송 비용은 어떻게 될까요? 검사 중과실이 인정 안 되면 국가배상 소송도 어렵습니다. 결국 전관 변호사들이 큰돈을 벌었고, 전관의 중요성만 재확인된 거죠. 검찰 입장에선 윈윈”이라고 말했다.
이런 씁쓸한 교훈 뒤에는 검찰권력을 과시하며 정치권력을 잡은 사람들만 이익을 움켜쥐고 서 있다. 이 사건 수사로 ‘정의로운 검사’로 우뚝 선 윤석열 대통령, 그리고 ‘수사통’ ‘천재검사’ 등으로 불린 한동훈 비대위원장이다. 이재근 참여연대 협동사무처장은 “결국 남은 건 검찰이 재벌 회장, 대법원장까지 구속하면서 힘을 과시한 게 아닐까 해요”라고 평가했다.
정치화된 검찰권력의 견제에 소극적인 언론의 반성도 촉구된다. 최영재 한림대 교수(미디어스쿨)는 “검찰이 여론전을 하며 흘린 피의 사실을 쓰는 건 범죄행위에 가까운데, 이걸 특종으로 인정해주는 잘못된 분위기가 있어요. 검찰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영웅담을 쓰는 풍토도 마찬가지예요. 억울한 사람이 구속·기소되는 엄청난 피해를 방조하는 거죠”라고 지적했다.
“양승태·이재용 같은 굉장히 힘센 사람들을 상대하니까 무리수나 언론플레이를 (국민이) 필요악 정도로 용인해줬던 거 아닐까 해요. 그런데 그 수사를 했던 사람들이 정치권으로 가는 걸 보면서 ‘끝까지 책임을 안 지네’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사건을 지휘했던) 윤석열 대통령도 아무 입장을 안 내놓잖아요. 항소가 부당하다고 보수 언론들이 떠들어도 한동훈 위원장은 계속 침묵하죠. 검사가 정치권에 갔다면 목표는 정의구현일 텐데, 국민이 볼 땐 ‘그럼 대체 왜 정치하나’ 싶은 거죠.”(김민하 시사평론가)
김양진 기자 ky029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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