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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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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쏘았지?

❶ 연재를 시작하며… 베트남 마을에 울려퍼진 총성의 수수께끼, 증언과 기록을 넘어
등록 2013-10-05 11:07 수정 2020-05-03 04:27

탕!
운명의 총소리가 평온하던 마을을 깨운 것은 오전 11시께였다. 짧은 여운이 채 식기도 전에 또 한 발이 울렸다. 탕!
줄을 지어 근처를 지나던 무장 군인들은 순식간에 땅바닥에 엎드렸다. 벼를 보러 논에 나갔던 늙은 농부는 불안한 시선으로 꾹 눌러썼던 삿갓을 추켜올렸다. 초가집 마당 우물가에서 갓난아기를 업고 달래던 엄마의 낯엔 하얀 근심이 서렸다. 동네 어귀에서 동무들과 장난을 치던 아이들의 눈은 호기심으로 동그랗게 커졌다. 대문 앞을 지키던 개들은 컹컹 짖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한가롭게 병아리들을 몰고 다니다 푸드덕 날아올랐다. 하늘은 높고 푸르렀다. 구름 한 점 없었다. 평균기온 15~30℃. 찌는 더위는 없다. 습하지도 않다. 베트남 최상의 계절. 사위는 조용했고, 동네 주민들은 설과 정월 대보름 사이의 농한기를 느긋하게 보내고 있었다. 오전의 느닷없는 총소리만 아니었다면, 여느 날과 똑같은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낮과 밤의 권력이 다른 마을

빡!
땅바닥에 엎드린 무장 군인들 속엔 스물여섯 살 최영언 중위가 있었다. 3개월 전 수송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이국땅에 온 대한민국의 해병 장교. 해병 제2여단(청룡부대) 제1대대 1중대 1소대장. 중대 작전이 한창이었다. 마을 남쪽 개활지를 통해 서쪽 좌표로 이동하며 수색 정찰을 벌이는 임무. 그가 지휘하는 1소대는 선두에 있었다. 맨 앞에선 1분대·2분대·화기분대가 걸었고, 다음에는 소대장인 최 중위가 통신병·전령과 함께 움직였다. 끝에는 3분대가 있었다. 그 뒤로는 2소대와 중대장과 3소대가 따라왔다. 일렬종대로 대원들 간 2~3m의 간격. 풀이 사람 키만큼 자란 어느 묘지를 지날 때였다. 빡!

1968년 2월12일 총성이 울린 베트남 중부의 농촌마을 퐁니와 퐁넛. 사진 오른편 동쪽에서 왼편 서쪽으로 마을을 비껴 지나가던 한국의 무장 군인들은 저격을 받고 부상병이 발생하자 민가가 있는 서북쪽 방향으로 진입했다. 그날로부터 45년이 흐른 2013년 1월의 풍경.

1968년 2월12일 총성이 울린 베트남 중부의 농촌마을 퐁니와 퐁넛. 사진 오른편 동쪽에서 왼편 서쪽으로 마을을 비껴 지나가던 한국의 무장 군인들은 저격을 받고 부상병이 발생하자 민가가 있는 서북쪽 방향으로 진입했다. 그날로부터 45년이 흐른 2013년 1월의 풍경.

그의 귀는 그날의 총소리를 그렇게 기억한다. ‘탕’이라는 의성어로는 상황마다 다른 총성을 세분화할 수 없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며 다가오는 소리는 짧고 굵게 끊어진다. 전투 현장에서 극도로 예민해진 귓바퀴다. 아마도 소련제 AK47 소총. 숲 속에 숨은 게릴라의 저격이 틀림없다. 예감은 적중했다. 당했다. 누군가 단말마적인 비명을 질렀다.

고래고래 고함을 터뜨리며 아픔을 호소하는 1소대 부하 병사. 치명적 상처를 입은 자는 말이 없거나 모기만 한 목소리를 낸다. 비명과 고함의 크기는 상처의 심각성과 반비례한다는 걸, 최영언 중위는 그간의 경험으로 익혔다. 부상병을 후송 조치했다. 통신병을 통해 중대장에게 저격과 부상자 발생을 알렸다. 그리고 즉각 응사. 총알이 날아온 지점은 서쪽 방향으로 추정됐다. M16 소총이 천천히 불을 뿜었다.

쾅!

열한 살 소년 응웬탄꺼는 그날 오전 집 마당에서 쌍둥이 여동생들과 놀다 폭발음을 들었다. 지뢰 소리 같았다. 소년의 집은 남과 북을 잇는 1번 국도와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방으로 들어와 동쪽 창문을 살폈다. 1번 국도에 서 있는 미군 전차가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를 찾았다. 서른아홉 살의 가장 응웬수는 자식들을 안심시켰다. “괜찮아, 아무 일도 아니야.”

총소리가 연이어 들린 것은 그다음이었다. 불길했다. 응웬수는 가족들에게 “나갈 생각 말고 집에 가만있으라”고 일렀다. 응웬탄꺼는 무서웠다. 다섯 살짜리 쌍둥이 여동생 응웬티씨에우, 응웬티응우는 엄마 보티찌(46)의 품에 안겨 떨었다. 아버지 응웬수의 마음은 복잡했다. 마을은 낮과 밤의 권력이 달랐다. 해가 뜨면 미군과 남베트남군과 따이한(한국군)의 세상. 해가 지면 베트콩 천하. 지금은 낮이다. 창문으로 마을 북쪽을 살폈다. 군인들 무리가 보였다. 따이한이다. 조마조마한 정적이 찾아왔다. 가족들은 집 안에서 잠자코 숨죽여 있었다. 30분, 아니 1시간이 흘러도 총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음속 표적지의 얼굴은

탕!

실내 가득 총성이 울렸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경호실 지하사격장. 대통령 박정희(51)는 권총을 쥐고 표적을 노려보며 천천히 방아쇠를 당겼다.

베트남은 따뜻했지만 한국의 서울은 추웠다. 영하 10℃의 매서운 한겨울. 군용 점퍼 차림의 박정희는 사격을 계속했다. 한 손으로 권총을 쏜 뒤엔 두 손으로 소총을 들었다. 총성이 울릴수록 적중률은 좋아졌다. 박정희는 만족스런 웃음을 날렸다. 아부인지 덕담인지, 측근들이 말했다. “사격 솜씨가 군 재임시와 다름이 없으십니다.” 그날 대통령 부인 육영수(43) 여사도 잠깐 총을 들었다.

한국 시간으로 1968년 2월11일 일요일 오후 3시. 최영언 중위가 수풀 바닥에 엎드려 있던 그 초긴장의 순간으로부터, 소년 응웬탄꺼가 방 안에 숨죽여 있던 침묵의 시간으로부터 불과 하루 전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뭔가 작정을 하듯 총을 쏘았다. 마음속 표적지엔 어떤 얼굴을 그려넣었을까. 21일 전인 1월21일, 무장 특수부대를 청와대 코앞까지 내려보내 자신의 생명을 위협한 북한 김일성(56)이었을까? 10일 전인 1월31일부터 사이공을 비롯한 남베트남 전역에서 미군과 한국군에 기습적 대공세를 펼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베트콩)들이었을까? 대북 응징 보복을 간청하는데도 명쾌한 답을 하지 않는 미국 대통령 린든 존슨(60)이었을까?

박정희는 이날 아침 김포공항에 도착한 미국 존슨 대통령의 사이러스 밴스(51) 특사와 예정된 만남까지 미뤘다. 대신 사격장으로 향했다. 사격을 끝내고 총을 내려놓을 땐 옆에 있던 박종규(38) 경호실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만하면 나도 급할 때는 싸울 수 있겠지?” 다음날치 관련 기사의 마지막 문장은 묘하다. “…이날 사격은 글쎄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타타타!

최영언 중위는 다시 콩 볶는 듯한 총소리를 들었다. 첫 총성이 울린 뒤 1시간이나 지난 뒤였다. 그동안 소대원들과 함께 마을로 진입해 민가를 뒤졌다. 저격범은 색출하지 못했다. 어디론가 꽁꽁 숨었다. 마을엔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젊은 남자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민간인들을 2·3소대가 있는 뒤쪽으로 보냈다. 최 중위는 민가 수색을 마칠 즈음 작은 물웅덩이 앞에 다다랐다. 똬리를 튼 구렁이가 한 마리 죽어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그때 다시 울린 총소리. 마을 쪽이었다. 단발이 아니었다. M16 소총을 자동 모드에 맞춰놓고 갈기는 듯했다.

남베트남 민병대원 응웬싸(31)는 1번 국도 망루에서 자동소총 소리를 들었다. 현장도 목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웬만큼 볼 수 있는 거리였다. 더 자세히 보고 싶었다. 그는 두 손으로 쌍안경을 들었다.

부근에서 작전 중이던 미 해병대 지휘관 실비아 중위도 같은 소리를 들었다. 마을은 불타고 있었다. 상황 파악에 들어갔다. 한국군 해병 제2여단에 무전을 쳤다. 유엔 장교를 찾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논물 위 수습하는 이 없는 주검

쾅!

집 안 동굴에 숨어 있던 소녀 응웬티탄(7)은 공포에 질렸다. 작은 초가집 안에서 발사된 총탄은 폭격처럼 고막을 찢을 듯했다. 얼굴이 검고 덩치가 산만 한 군인이 어서 나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소름이 끼쳤다. 서서히 지하 동굴에서 위로 올라와 부엌을 지나자마자 다시 쾅! 오른쪽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져내렸다.

탕!

1968년 2월11일, 미국 대통령이 보낸 사이러스 밴스 특사 를 만나는 대신 청와대경호실 사격장을 찾아 총을 든 대 통령 박정희(왼쪽). 박정희의  회견 내용을 전하는  1968년 2월13일치 1면.

1968년 2월11일, 미국 대통령이 보낸 사이러스 밴스 특사 를 만나는 대신 청와대경호실 사격장을 찾아 총을 든 대 통령 박정희(왼쪽). 박정희의 회견 내용을 전하는 1968년 2월13일치 1면.

소년 쩐찌옙(10)도 외양간 앞에서 무너졌다. 나오지 말아야 했다. 집 동굴에 숨어 두 살 어린 동생 쩐뜨를 안심시켜야 했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났다. 외양간에 매놓은 물소가 걱정이었다. 쩐찌옙은 잠깐 밖으로 나온 사이 총을 맞았다. 오른쪽 다리가 휙 꺾였다. 군인들이 저 멀리서 달려왔다. 그는 용수철처럼 튀어 일어나 쩔뚝거리며 다시 집으로 숨었다.

탕!

응웬응예(68)와 그의 아내 응웬끙(66)은 논에서 맥없이 쓰러졌다. 두 사람은 논물 위에 둥둥 떠다녔다. 다음날도, 다다음날도 수습해주는 이가 없었다. 동네 주민들은 딴 데 정신이 팔려 그들이 논에 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일주일 뒤 두 주검은 물에 퉁퉁 불은 채로 발견되었다.

베트남의 작은 마을이 불타오르던 그날 아침, 미국에서 발행된 는 박정희 대통령과의 단독 인터뷰를 실었다. 박정희는 말했다. “미국이 북한의 침략 행위를 방임함으로써 북괴의 도발이 계속 조장되어왔다. 미국은 이제라도 보복 조치를 취하라.” 한국 정부는 이날 전국의 철도경비원 550명에게 무기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1968년 2월12일, 베트남 중부에 위치한 꽝남성 디엔반현 디엔안사 퐁니·퐁넛에서 벌어진 집단학살 사건의 수수께끼는 온전히 풀리지 않았다. 수수께끼의 중심엔 한국군 해병대가 있다. 총 몇 방으로 그들을 부른 베트콩 전사는 유유히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군 일부 대원들은 어떤 행동은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를 마을로 불렀다. 같은 날, 대한민국 대통령 박정희는 전날의 좁은 사격장이 아니라, 한반도 북녘땅을 향해 총을 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미국 대통령 존슨은 베트남 전선도 감당이 안 돼 피곤하고 난처한 상태였다. 북위 38도선으로 갈라진 남북한과 북위 17도선으로 갈라진 남북 베트남, 그리고 미국이 얽히고설킨 삼각관계.

총성의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연재를 시작한다. 1968년 2월12일의 퐁니·퐁넛은 시공간의 축이다. 2000년 5월, 2001년 4월, 2013년 1월 세 차례에 걸쳐 현장을 방문해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1968년 그날에 관한 피 묻은 증언을 쏟아냈다. 사건 기록에만 갇히지는 않으려 한다. 베트남전과 연결된 세계사의 그물망을 따라, 멀리 흘러갔다 되돌아오기를 반복할 것이다.

왜 하필 1968년인가. 그 총성과 피투성이의 시대는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질문에 답할 채비를 하며 출발한다.

토요판 에디터본문 속 나이는 1968년 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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