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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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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

등록 2005-07-07 00:00 수정 2020-05-02 04:24

▣ 길윤형 기자 charisma@hani.co.kr

이강일(사망 당시 66살)씨를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5월이다. 서울 동대문경찰서에 출입하던 나는 청계7가쯤에 흉물스럽게 서 있던 삼일아파트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 아파트는 1969년 ‘원조 불도저’ 김현옥 전 서울시장이 청계천 주변의 ‘하꼬방’들을 허물고 지은 시민아파트로, 1970년 4월8일 마포에서 무너진 와우아파트의 사촌쯤 된다. 아파트 주변에 가면 ‘시큼한’ 70년대 냄새가 났다.
그 안에는 200여 가구가 남아 하루빨리 건물을 헐어야 한다는 서울시와 종로구를 상대로 벼랑 끝 대치를 하고 있었다. 이씨는 그때 “집에는 물과 전기가 끊겼다”며 “서울시에서 여기를 떠나라는데 내가 갈 수 있는 곳이 어디 있겠느냐”고 말했다. 집에는 더러운 담요, 라면 봉지, 통조림 캔 등의 쓰레기가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사연을 모아 사회면 톱 기사를 한번 썼고, 아파트를 기억에서 지웠다.
그해 12월 그를 두 번째로 만났다. 200가구가 넘던 주민들은 30가구로 줄어 있었다. 그들은 임대아파트가 나왔는데도 1천만원 안팎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해 아파트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씨는 그동안 몸이 많이 상한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주민들은 그가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고 했다. 독립문 근처에 아들이 하나 산다고 했는데(실제 확인해보니 둘이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왕래를 하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스티로폼을 깔고 한겨울을 나고 있었다. 내 손을 잡고 뭐라 웅얼거렸는데, 그게 “배고프다”였는지 “아프다”였는지 “반갑다”였는지 지금 와서 확인할 도리가 없다. 핏기 없는 그의 체온이 섬뜩해 서둘러 손을 뺐던 것 같다.
올해 3월 세 번째로 아파트를 찾았을 때 그가 보이지 않았다. 주변 병원과 파출소를 이잡듯 뒤져 그가 지난 1월29일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를 기억하는 경찰은 “숨지기 전날 밤 11시께 서울 을지로 6가 한 빌딩 앞에 노숙자가 쓰러져 있다는 신고를 받고 서울 동부시립병원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보름이 지난 2월16일, 가족이 찾아와 장례를 치렀다고 했다.
유준호(사망 당시 50살)씨를 만난 것은 올해 1월이었다. ‘편견의 사슬에 묶인 한센병 환자들’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를 준비 중이었다. 내 기사에서 그는 ‘유정호’라는 가명으로 등장했다.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1동 쪽방촌 4층 구석방이 그의 집이었다. 한센병 때문에 생긴 합병증으로 다리가 점점 썩어들어가는 버거병과 백혈병, 당뇨 등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방 한구석에는 쌓인 약봉지들은 종류만 해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그는 서울역, 영등포역 주변 사무실을 돌아다니며 볼펜·사인펜·인주 등을 구걸해 팔아 약값을 댔다. 그에게서 강한 ‘반골’기질을 느꼈는데, 그 때문에 답답한 소록도 생활을 못 견뎌했던 것 같다.
석달이 지나 영등포 쪽방촌 철거민들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러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의 집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장사하러 나갔겠거니 했다. 어느 토요일인가 “그가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알지 못한다. 장례식장에 꼭 오라는 전화에 “가겠다”고 말만 해놓고 가지 않았다. 그가 죽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우리가 무엇을 하고자 했다면, 그럴 만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프고 가난하면, 얼마 못 가 죽는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쓰는 게 두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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