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린 시절 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또 다른 매를 떠올리곤 했지. 이 매를 말하는 사람 앞에서 저 매를 떠올리고, 저 매를 말하는 사람 앞에선 이 매를 떠올렸어. 어쩌다가 하늘을 나는 매와 사람을 때리는 매는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을까. 매섭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일까. 하늘과 땅 사이에 매가 날고, 옳음과 그름 사이에 매가 날아든다. 2026년 전북 고창 선운산.
맞아야 정신 차린다. 한때 이 말은 진리처럼 들렸다.
때리는 사람들이 주로 내뱉는 말이지만, 맞는 사람마저 부지불식간에 수긍하고 마는 괴력을 발휘했다. 매는 빠르게 사람을 노예로 만들고, 억울한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맞고 나면 과연 정신이 ‘차렷’ 자세를 취할까. 맞아본 사람은 안다. 맞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기는커녕 정신 차릴 수가 없다는 사실을. 순식간에 판단력이 마비되고 그저 맞지 않기 위한 생존 모드에 돌입한다는 그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은 매에 굴복한다. “술과 매엔 장사가 없다”는 속담에 어찌 과장이 있겠는가.
16세기 러시아정교회의 가정규범서 ‘도모스트로이’엔 가장의 절대권위와 가족구성원에 대한 물리적 처벌을 정당화하는 지침이 실려 있다. 시간이 흐르자 그것은 “마누라는 점심에 패고 저녁에 다시 한번 패라. 그러면 보르시(슬라브족 전통 수프)는 따뜻해지고, 귀리죽에는 버터가 올라갈 것이다”라는 비루한 격언이 되었다.
“여자와 북어는 삼 일에 한 번 패야 좋다”거나 “한국인은 맞아야 말을 잘 듣는다”는 출처도 알 수 없는, 그러나 널리 퍼진 혐오의 문장은 어떠한가. 말도 안 되는 그 말을 마치 세상사 이치라도 된다는 듯 내뱉는 사람을 본 적 없는가.
매는 봉건시대 대역죄인의 자백을 받아내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매 맞는 자는 죄인이 아니어도 죄인이어야 했고, 하지도 않은 범행의 기억을 쥐어짜서라도 실토해야만 했다. 실토하지 않으면 실토할 때까지 맞았고, 실토하면 죄에 따른 벌을 받아야 하므로 맞았다. 옛일이기만 할까.
군사독재 시절 매는 민주화운동 인사들을 고문하는 수단이었다. 재벌 회장님이 아들의 복수를 대신 하는 방법이었으며, 노동자의 1인시위에 화가 난 사장님의 화풀이 방식이기도 했다.
매는 ‘사랑의 회초리’라는 낭만의 탈을 쓰곤 했다. 1981년 첫 방영 후 무려 1200회를 이어간 학교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의 손엔 언제나 학생명부와 회초리가 들려 있었다. 엄하지만 자상한 그의 손에서 누가 ‘폭력’을 보았겠는가. 어느 날 선생님은 칠판에 큰 글씨로 ‘옮음과 그름’이라 쓰고는 가슴 아프게 회초리를 든다. 다 너희들 잘되라는 뜻에서.
전두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방송 통폐합 후 일본 애니메이션 대신 국산 어린이드라마 제작을 지시했다는 건 씁쓸한 뒷이야기다. 전두환은 자신이 휘두른 총칼과 몽둥이가 사랑의 회초리로 여겨지길 바랐을까. 그랬을 것이다. 이순자는 남편을 “민주화의 아버지”라 불렀으니까.
‘일베’라 불리는 이들도 그자의 탱크와 몽둥이를 숭배한다. 총칼에 죽어간 이들을 조롱한다. 질타해야 마땅하지만, 저들을 “탱크로 밀어버려야 한다”거나 “몽둥이가 약”이라고 외쳐야 하는가.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는 지긋지긋한 괴물의 언어와 무엇이 다른가. 예나 지금이나 매는 효과적이다. 시간차를 둘 뿐 맞는 자와 때리는 자를 기어이 쓰러뜨린다. 그나저나, 저 매를 써야 하는데, 이 매만 쓰고 끝내다니.
사진·글 노순택 사진사
*노순택의 풍경동물: 어릴 적부터 동물 보는 걸 좋아했습니다. 동물을 키우려고 부모님 속을 썩인 적도 많았지요. 책임의 무게를 알고부터 키우는 건 멀리했습니다. 대신 동물책을 많이 읽었지요. 시골로 내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개와 닭과 제가 한 마당에서 놉니다. 작업을 위해서, 또는 다른 일로 국내외 여러 곳을 오갈 때면 자주 동물원에 들릅니다. 편안한 마음과 불편한 마음이,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스며들거든요. (격주로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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