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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들의 경제민주화 사보타주

등록 2013-02-25 06:07 수정 2020-05-02 19:27

삼성이 지난 2월13일 전 계열사 임원들의 준법경영 활동을 평가해 인사에 반영한다고 발표했다. 한화는 이에 앞서 지난 1월 말 2천여 명의 비정규직 직원을 3월부터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천명했다. 한화는 지난해 그룹 창립 60돌을 맞아 경제·사회적 책임을 성실히 이행해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26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대기업 최고경영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지난해 12월26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에 위치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해 대기업 최고경영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추상적 수준에 그친 ‘기업경영헌장’

하지만 이것뿐이다. 지난해 4·11 총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부상한 지 1년이 지났건만 재벌들의 가시적 조처는 거의 없다. 일부 재벌이 여론에 밀려 마지못해 빵집을 철수하고, 몇몇 총수가 사회책임경영을 강조하는 립서비스를 한 것을 빼고는 말이다. 재벌그룹 임원들은 사석에서 경제민주화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대세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2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요즘에는 (경영권 승계 과정을 밟고 있는 재벌) 3세들에게 단순한 교통법규도 절대 어기지 말라고 당부할 정도”라고 귀띔한다.

하지만 국민을 감동시킬 수 있는 경제민주화의 실천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한화의 발표 이후 몇몇 유사업종의 대기업들에서 세부 시행 내용, 예상 문제점 등에 대한 문의가 왔다고 한다. 해당 그룹들에 확인한 결과 ‘아직 구체적으로 결정된 것은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한 임원은 “검토는 할 만하지만 회사마다 근무 형태나 경영 여건이 달라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고 말끝을 흐렸다.

박근혜 당선인은 대선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경제민주화 공약의 이행 의지를 분명히 했다. 지난해 말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회장 허창수 GS그룹 회장)를 방문했을 때는 “대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국민의 희생과 국가 지원이 많았기 때문에 국민기업 성격도 크다. …경영목표가 이윤 극대화에 머물면 안 되고 공동체 전체와의 상생을 추구해야 한다”며 구조조정 자제와 정년 보장 등을 통한 일자리 안정, 골목상권 침범 자제, 재벌 2·3세의 부동산 투기 자제 등 구체적인 주문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한 달 반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이 없다. 딴청을 부리거나 시늉만 하기는 경제단체들도 마찬가지다. 전경련은 2월21일 정기총회에서 차기 회장 선임과 함께 경제민주화 관련 7개 항의 ‘기업경영헌장’을 발표할 예정이다. 전경련은 헌장 발표가 1996년의 기업윤리헌장 제정 이후 처음이고, 일본 재계 단체인 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기업행동헌장’을 참고해 만든다고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망스럽다. 일자리 창출, 수출 증대 등 기업 본연의 역할 수행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소비자와 노동자의 권익 보호, 사회공헌 및 지역사회 발전 기여, 윤리·투명·준법경영 준수 등 지극히 상식적이고 추상적인 수준에 그치기 때문이다. 전경련이 17년 전에 내놓은 기업윤리헌장도 기업의 사회적 책무, 대·중소기업 협력 등 지금의 경제민주화 요구와 동일한 내용을 상당 부분 담고 있지만 그동안 구두선에 그쳤다는 지적을 받는다. 전경련은 분야별 가이드라인을 만들 계획이지만, 얼마나 구체성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경련은 이미 대선 전부터 구체적인 경제민주화 실천 방안을 모색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전경련의 한 임원은 “경제민주화와 관련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추진하려고 해도 그룹마다 영위 업종이 다르고 이해관계가 엇갈려 조정이 쉽지 않다”며 “결국 사업 포기는 그룹 총수의 결단이 필요한데 어느 전문경영인이 목을 내걸고 건의할 수 있겠느냐”고 고충을 털어놨다. 대·중소기업을 아우르는 종합 경제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는 지난 2월14일 ‘새 정부의 정책 과제’를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다. 하지만 발표 내용을 살펴보면 시대정신으로 불리는 경제민주화에 대한 언급은 단 몇 줄에 그치고, 온통 기업 하기 좋은 환경, 규제 개혁 등 5년 전에 나왔던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제도 차원 아닌 경영철학 바뀌어야

재벌들은 오히려 경제민주화에 역행하려는 대담함도 보인다. 최근 신세계그룹의 이마트가 노조 설립을 막으려고 직원들을 불법 사찰했다는 의혹을 뒷받침하는 내부 문서와 전자우편이 공개됐다. 불과 얼마 전 그룹 최고경영자들이 줄지어 서서 “경제가 어려울수록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며 ‘책임경영’을 외쳤던 게 무색할 지경이다. 국민은 두 얼굴을 가진 대기업이 신세계뿐이라고 생각할까? 일부 재벌은 박근혜 당선인의 총수 일가 일감 몰아주기 및 부당 지원 행위 규제 강화 추진에 맞서 형제 그룹 간 거래를 활용하는 꼼수와 편법까지 동원하고 있다.

삼성은 그동안 시장경제의 공적으로 불리는 담합(짬짜미), 중소기업을 울리는 불공정 하도급 행위를 상습적으로 저질러 ‘반칙왕’이라는 오명을 들어왔다. 삼성의 준법경영은 그런 점에서 때늦은 감이 있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실제 삼성전자의 한 고위 임원은 “요즘 사내 회의에서 자료를 발표할 때는 준법경영 준수 내용이 가장 먼저 나온다”며 달라진 분위기를 전한다. 하지만 삼성에 준법경영이 뿌리내리려면 일부 제도의 도입 차원을 뛰어넘어 기업문화, 경영철학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래야 회사를 위해서는, 또는 상급자의 지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해야 한다는 임직원들의 인식이 바뀔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제2의 안기부 X파일 사건, 비자금 사건, 불법 미행 사건, 불산 누출 사고 보고 지연이 재발할 수 있다.

2013년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모두 바꿔라”고 신경영 선언을 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제2의 신경영’ 선언을 내놓는 것 아니냐는 추측이 무성하다. 20년 전 신경영 선언이 오늘날 삼성이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토대를 만들었다면, 이제는 제2의 신경영 선언(사회책임경영 선언)으로 단순히 이익만 많이 내는 기업이 아니라 사회의 존경도 받는 지속 가능한 기업으로 거듭나는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

전경련은 애초 1월 말까지 600대 기업의 2013년 투자·고용 계획 조사를 마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약속 시한을 넘겨 한 달이 다 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상당수 재벌들이 아직 계획이 확정되지 않았다며 자료를 제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전경련은 지난 1월 회장단 회의에서 경기가 어려울수록 투자 계획을 더 적극적으로 수립하고, 일자리를 늘리도록 독려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는 모양새다. 이미 2013년이 시작된 지 두 달이 됐는데도, 아직 사업계획조차 공개하지 않는 것을 단순히 대외 경영환경의 불확실성 탓만으로 돌릴 수 있을까? 10대 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새 정부로서는 투자·고용 문제가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대기업들이 아직 사업계획을 내놓지 않는 것은 눈치보기 반, 사보타주 반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 물러설 여지 별로 없어

역대 정권은 재벌의 사보타주에 종종 약한 모습을 보였지만 박근혜 정부는 물러설 여지가 별로 없다. 경제민주화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새 정부의 순항도 낙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국회 정무위원회는 지난 2월13일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 재벌 총수의 일감 몰아주기(부당 지원) 규제 강화와 대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적용 확대를 담은 공정거래법과 하도급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그동안 말로만 하던 경제민주화 조처들이 드디어 법제화되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재벌들은 이제 시대 흐름에 맞춰가는 지혜를 보일지, 아니면 역행하는 무모함을 보일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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