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재계와의 첫 회동에서 ‘중소기업 대통령’을 선언했다.
지난 50년간 지속된 소수 수출 대기업에 편향된 경제정책에서 벗어나 대기업·중소기업, 수출·내수가 균형을 이루고,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도 성장의 축으로 자리잡아, 과실을 골고루 나누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약속했다.
그를 반대했던 개혁진보 진영으로서는 반가움과 당혹스러움이 교차한다. ‘기업(재벌) 하기 좋은 나라’와 대척점에 있는 ‘중소기업 하기 좋은 나라’는 개혁진보의 오랜 화두다. 중소기업은 전체 사업체의 99%를 차지하지만, 생산액이나 부가가치 비중은 절반에 그치고, 생산성은 대기업의 3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또 중소기업 종사자가 전체의 88%를 차지하지만, 청년들의 외면 속에 값싼 임금의 이주노동자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는 게 현실이다. 이런 상태에서는 양극화 해소나 일자리 해결은 요원하고, 국가경제의 지속 성장도 불가능하다.
종기 났는데 소독하고 반창고만?
1등의 필승 전략 중 하나는 2등을 카피(베끼기)하는 것이다. 2등이 1등과의 차별성을 보여줄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보수인 박 당선인은 경제민주화·복지 등과 같은 개혁진보 진영과 야당의 화두를 일찌감치 차용했다. 경제민주화의 상징인 김종인 박사의 영입이 대표적이다. 박 당선인은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좋아한다고 한다. 우파인 메르켈은 독일 좌파의 정책을 적극 수용해 중도보수로 영역을 확장하며 성과를 거두었다. 여성·저소득층 등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복지정책, 과도한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한 반대, 은행 국유화 등 정부의 적극적 시장 개입, 영미식 자본주의의 탐욕에 대한 비판 등이 대표적이다. 이것은 메르켈이 7년째 총리로 장수하는 비결 중 하나로 꼽힌다. 박 당선인이 개혁진보 진영의 화두를 차용하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오히려 다행스런 일이다. 문제는 그것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느냐다.
“중소기업을 살리겠다니 반갑지만, 좀더 두고 봐야 한다.”
정보기술(IT) 업종의 한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지인이 솔직히 털어놓는 얘기다. 실현이나 성공 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이다. ‘중소기업 살리기’를 뒤집으면 바로 재벌 개혁이다.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재벌이 중소기업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아무리 열심히 공장을 돌리고 일해도, 대기업이 납품단가 인하를 통해 과실을 다 거둬가기 때문이다. 이런 재벌의 행태를 바꾸지 않는 한 중소기업은 발전할 수 없다. 박 당선인이 2012년 12월26일 재벌 총수들인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과 만나 “대기업도 이제 변해야 한다. 이윤 극대화에만 혈안이 될 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와의 상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박 당선인은 부당 납품단가 인하, 중소기업 영역 침해, 기술 탈취 등 재벌의 횡포를 일일이 열거했다.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키워낸 재벌이라는 공룡을 딸인 박근혜 당선인이 길들이는 데 성공할 가능성을 일단 열어놓았다.
하지만 박 당선인이 중소기업 대통령으로서 성공할지 확신이 안 서는 것은 인식과 방법론의 한계 때문이다. 박 당선인은 대기업의 불공정행위에 대한 엄정한 법 집행을 약속했다. 반면 대기업이 횡포(경제력 남용)를 부리는 원천이 되는 경제구조(경제력 집중)에 대한 개혁에는 소극적이다. 마치 배에 종기가 났는데 소독만 하고 반창고를 붙여주는 격이다. 종기의 뿌리를 걷어내는 근본 치유를 하지 않으면 결국 곪아 터져버린다.
중소기업 지원 방식도 획기적 전환이 필요하다. 개별적인 자금이나 기술 지원은 실효성이 떨어진다. 아프리카 물소떼가 뿔은 바깥을 향하고 엉덩이는 서로 붙인 채 둥그런 원을 만들어, 달려드는 사자와 맞서듯 중소기업도 상호 협력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이를 통해 혼자서는 역부족인 구매, 생산, 판매, 시장 개척, 가격 협상 등을 공동으로 해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독일·일본 등 중소기업 강국들은 모두 중소기업 네트워크가 발달돼 있다.
김종인 기용하지 않은 점 불길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책의 일관성이 중요하다. 새누리당의 김종인 국민행복위원장은 “(박근혜가) 성공하려면 선거 때와 인수위원회, 정권 출범 뒤에 모두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보면 당선됐다고 좋아하다가 일관성을 잃어서 다 망쳤다”고 말한다.
박 당선인은 그동안 신뢰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강조해왔다. 박 당선인이 정책의 일관성을 통해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느냐의 바로미터는 인수위와 새 정부의 첫 인사다. 인수위 위원장과 부위원장에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과 진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을 임명한 것만으로는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두 사람 모두 당선인의 말을 좇아 민생과 통합을 강조하고, 대선 공약의 철저하고 신속한 이행을 다짐한다. 하지만 그들은 ‘중소기업 대통령’에 대해 분명한 자기 소신을 가진 경제 전문가로 보기 어렵다. 오히려 경제민주화와 통합에 대한 상징성이 큰 김종인 위원장을 기용하지 않은 사실에 더 눈길이 간다. 경제민주화 공약과 경제정책 방향 결정 과정에서 박 당선인과 갈등하고, 새누리당 내 보수 인사들과 대립한 것이 배제 요인이었다면 조짐이 불길하다. 박 당선인의 의중은 앞으로 인수위 경제분과 위원장과 위원들의 인선을 보면 좀더 분명히 드러날 것이다.
10년 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은 인수위 부위원장에 모피아(재무부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금융관료를 의미) 출신으로 재벌들이 선호한 김진표 의원을 앉혔다. 당시 인수위 분과위원장과 위원에는 개혁적 인사들이 다수 포진했지만, 번번이 김진표라는 벽에 부딪혀 혼선과 갈등을 야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첫 정부 구성에서도 김진표 경제부총리·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등 안정(보수)과 개혁(진보)을 버무려 ‘짬뽕’을 만들었다. 안정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겠다는 욕심이었겠지만, 실제로는 모두 놓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은 “인수위와 첫 정부 인사는 대통령이 던지는 일종의 메시지”라며 “이것이 모호하면 경제주체들이 자기 행동을 바꾸기보다 정부 정책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키려고 로비에 돌입하고, 이것은 정부 정책 실패의 지름길이 된다”고 경고한다. 경제민주화의 전도사로 불리는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도 “참여정부 출범 때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핑계로 성장주의로 회귀해 관료 출신을 경제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 개혁이 실패하는 단초가 됐다”고 회고했다.
‘대통합’과 ‘민생’은 상호 보완적다행인 것은 박 당선인이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대통합(개혁)과 민생(안정)을 병행 추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점이다. 새누리당 내 보수파들은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대통합보다는 민생을 우선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은 상호 보완적이고 동전의 양면과 같다. 대통합을 가로막는 결정적 요인 중 하나는 양극화이고, 양극화를 해소하지 못하는 한 민생 문제는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중소기업 대통령’의 성공 가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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