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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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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의 ‘아킬레스건’ 상속 문제를 푸는 법

현행 상속세법의 경영권 프리미엄 할증평가 폐지 주장하는 재계
기업보다 소유가족 더 중시하는 전근대적 인식부터 먼저 고쳐야
등록 2013-04-13 10:56 수정 2020-05-03 04:27

3주 전 이 지면을 통해 ‘재벌 승계 공식을 바꾼 효성 조현문 부사장’에 관한 얘기를 소개했다(953호 참조). 조 전 부사장이 국외에서 내 글을 보고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효성을 그만두고 새로 몸담은 법무법인의 글로벌 법률시장 개척과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해외 출장 중이라 당장은 힘들지만, 귀국하면 만나자고 약속했다. 기자에겐 독자로부터, 특히 기사의 주인공에게서 공감을 얻을 때가 가장 보람 있는 순간이다.

편법·불법적인 상속증여와 관련해 크게 경을 친 재벌이 한두 곳이 아닌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2008년 2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가 서울 용산구 조준웅 특검사무실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편법·불법적인 상속증여와 관련해 크게 경을 친 재벌이 한두 곳이 아닌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2008년 2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아들 이재용씨가 서울 용산구 조준웅 특검사무실로 조사를 받기 위해 들어서고 있다. 한겨레 이종근 기자

한 재벌 회장 “현 세법 범죄자 만드는 악법”

조 변호사(효성을 떠난 만큼 앞으로는 새 직함으로 부르는 게 옳을 듯하다)는 평소 재벌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필자도 틈만 나면 재벌이 바뀌어야 대한민국이 바로 선다고 주장해왔다.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재벌그룹 회장과 만났을 때, 재벌들의 불법·편법적인 상속증여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재벌들이 세금도 내지 않고 주식을 물려받아 경영 세습을 하는 잘못된 관행을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 편법·불법적인 상속증여와 관련해서 크게 경을 친 재벌이 한두 곳이 아닌 게 우리나라 현실이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이나 현대글로비스의 부당지원(일감 몰아주기) 사건이 대표적이다.

회장의 대답은 명확했다. “잘못된 관행이 맞다. 하루속히 단절돼야 한다. 하지만 그와 함께 재벌들이 제대로 세금을 낼 수 있게 상속세법을 바꿔야 한다. 현행 세법은 범죄자를 양산하는 악법일 뿐이다.”

이게 무슨 얘기인가? 현행 상속증여세 최고세율(과표 30억원 초과시)은 50%다. 여기에 대주주에게 적용되는 경영권 프리미엄 할증과세까지 적용하면 실제 세율은 최대 65%에 달한다. 우리나라는 최대주주의 주식을 상속증여받으면 경영권 프리미엄을 적용해 20~30% 할증평가해서 세금을 물린다.

이를 창업주가 100% 지분을 갖고 있는 재벌그룹에 가상적으로 적용해보자(각종 공제 때문에 실제로는 좀더 복잡하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단순화했다). 아들이 정상적으로 세금을 내고 주식을 물려받으면 지분은 35%로 대폭 감소한다. 손자 세대가 또 세금을 내고 물려받으면 지분은 10% 중반대로 다시 축소된다. 증손자 세대에서는 지분이 한 자릿수로 격감해, 결국 소액주주로 전락한다. 이론적으로는 후손이 자기 돈으로 주식을 추가로 사들이지 않는 한, 상속증여에 의한 가족경영은 3세대가 마지막이다. 마침 대한상공회의소가 ‘한·독·일 비상장주식 평가제도 비교 및 시사점’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대한상의는 현행 상속세법의 경영권 프리미엄 할증평가는 외국에서 찾아보기 힘들고, 가업 승계에 걸림돌이 되는 만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초 독일에 출장 가서 히든챔피언(강소기업)을 취재했다. 히든챔피언은 독일이 중소기업 강국임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독일은 재정위기와 경기침체로 벼랑 끝에 서 있는 유럽연합(EU)의 마지막 구원투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독일의 힘을 히든챔피언을 필두로 한 강소기업에서 찾는 독일 전문가가 많다. 현지 취재 과정에서 깜짝 놀란 것 중 하나는 히든챔피언의 대다수가 창업 이후 수세대가 지났음에도 가족소유 기업 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점이다. 독일의 히든챔피언은 2012년 말 현재 1300여 개로 추산된다. 이 중 75%는 ‘나이’가 40년을 넘었고, 100년 이상 된 기업도 34%에 달한다. 역사가 오래된 히든챔피언의 대부분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기업들이다.

일감 몰아주기·기업 분할 불가능한 독일

독일 기업들이 불법·편법으로 탈세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3세대 이상을 넘어 가족소유가 이어질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해답은 간단했다. 독일에선 가업 상속에 대한 세금공제율이 85~100%에 달해, 사실상 세금을 거의 안 낸다. 또 중소·중견 기업에만 적용되는 한국의 가업상속지원제도와 달리, 독일은 대기업에도 똑같이 혜택이 주어진다. 우리나라 국민 입장에서는 기업주에 대한 엄청난 특혜로 비칠 수 있다. 독일은 사회적 시장경제 체제로,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는 시장 만능과는 거리가 멀다. 이런 독일에서 대주주에게 상속증여세를 거의 물리지 않는 것은 기업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 때문이다. 기업의 주식은 개인이 소유하지만, 기업 자체는 그 속에서 일하는 수많은 종업원, 그리고 기업과 거래하는 수많은 업체, 또 기업이 자신의 터전인 지역사회에 하는 다양한 기여 등을 고려하면 일종의 ‘사회적 공기(公器)’라는 것이다. 기업이 없어지면 단순히 오너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지역사회, 나아가 국가 전체에 큰 손실이 되기 때문에 장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지원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독일은 가업 상속 지원이 대주주에 대한 특혜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견제 장치를 두고 있다. 주식을 물려받은 뒤 5~7년 이내에 회사 문을 닫거나 고용을 줄이면 공제세금을 되돌려받는 것이다. 하지만 독일에서 가업 승계에 대한 혜택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더 근본적인 조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로 ‘기업이 소유 가족보다 더 중요하다’는 인식이다. 박근혜 정부는 재벌 총수 일가의 일감 몰아주기를 통한 사익 편취에 대해 규제 강화를 추진하고 있다. 일감 몰아주기는 회사의 희생을 통해 오너가족의 이익를 챙기는 행위로서, 오너가족보다 기업이 더 중요하다는 전제에 정면 배치된다. 독일에서는 이런 행위를 상상할 수 없다.

‘범삼성가’ ‘범현대가’라는 말이 있다. 범삼성가는 삼성, CJ, 신세계, 한솔 4개 그룹이다. 범현대가는 현대·기아차, 현대중공업, 현대, 현대백화점, KCC, 한라, 현대산업개발 7개 그룹이다. 이들은 이병철 삼성 창업주나,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생전이나 사후 모태그룹에서 계열분리된 그룹이다. 우리나라 국민은 재벌들의 계열분리에 대체로 무감각하다. 그냥 부모 잘 만나 후손이 각기 대기업 총수가 됐나보다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기업이 경영상 합리적 이유 없이 오너가족의 상속을 위해 분리되는 행위는 주주들의 이익에 반하는 명백한 배임 행위다. 이것은 기업을 사회적 공기가 아니라, 오너가족이 쥐고 있는 금붙이나 토지와 똑같은 개인 재산으로 생각하는 전근대적 발상이기도 하다. 실제 독일에서는 오너가족의 상속을 위한 기업분할이나 계열분리는 상상도 못한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반론도 나온다. 그동안 한국은 재벌들의 세금 없는 대물림을 사실상 용인해왔지만, 앞으로는 철저히 과세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 결과 재벌의 가족소유 경영체제가 존립할 수 없다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재벌의 오너경영 체제는 전문경영인 체제로 대체하면 된다는 것이다.

문제 해결 열쇠, 재벌 스스로 갖고 있어

하지만 한국 재벌의 오너 체제는 많은 문제점의 원인인 동시에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독일 히든챔피언의 성공 이유 중 하나로 가족소유에 바탕한 경영 리더십의 지속성이 꼽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단기 경영 실적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 의한 사업전략 추진은 기업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다. 재벌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라 죽일 생각이 아니라면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말 당선인 신분으로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했을 때 “대기업은 국민의 뒷받침과 희생, 국가 지원을 통해 성장했기 때문에 국민기업의 성격을 갖고 있어 우리 공동체와의 상생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재벌 회장들 스스로 가족보다 기업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분명히 하고 솔선수범한다면, 정부나 국민이 장수기업의 탄생을 반대할 이유는 없다. 상속 문제는 재벌의 가장 큰 아킬레스건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열쇠는 재벌 스스로가 갖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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