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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잃어버린 10년’ 만들지도 모를 ‘선택’

등록 2012-12-15 00:27 수정 2020-05-03 04:27

“개혁진보 성향의 사람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들 경사라고 했다.”(유종일·손석춘 공저, ) 맞는 얘기다. 2012년 대선에 나선 모든 후보가 경제민주화를 약속했기 때문이다. 결국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경제민주화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낙관론이 지배했다.

지난 9월2일 청와대를 방문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이명박 대통령이 맞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지난 9월2일 청와대를 방문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이명박 대통령이 맞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기회 균등, 공정 경쟁, 약자 보호가 핵심

하지만 대선을 코앞에 두고 상황은 급변했다. 여론조사에서 가장 앞서 있는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캠프의 정책 책임자이자 경제민주화의 상징 같은 인물인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내치며 재벌들에 타협의 신호를 보냈다. 가장 강력한 경제민주화 공약을 내건 민주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는 무소속의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를 이루고도 우위를 점하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후보는 여전히 “경제민주화를 꼭 하겠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 말은 곧이곧대로 믿기 힘들다.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는 치명적인 약점과 오류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박 후보는 대선 전략을 경제민주화 원트랙에서 경제민주화와 성장을 병행하는 투트랙으로 바꾸었다. 이는 경제민주화가 성장과 배치된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선 성장·후 분배’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 뿌리를 같이한다. 김종인 위원장의 역할을 사실상 대신하고 있는 새누리당 선거대책위원회의 김광두 힘찬경제추진단장은 지금 같은 경제위기에서는 경제민주화의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속도조절론을 편다. 경제위기가 더 심해지면 경제민주화는 언제든 뒷전으로 미룰 수 있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성장과 배치되는 게 아니다. 소수 재벌 중심의 경제구조로는 양극화가 심화돼 지속 가능한 경제발전이 불가능한 만큼 중소기업, 골목상권, 서민들이 동반 성장하는 경제구조로 전환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민주화는 근본적으로 ‘친성장적’이다. 성장주의자들은 기본적으로 경제민주화와 복지와는 거리가 멀다. 지금껏 역대 정권들이 개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도 이런 박정희식 성장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둘째,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은 반쪼가리다. 박 후보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장질서의 확립을 강조한다. 재벌의 잘못된 점은 바로잡되 장점은 살리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등한시한다. 김종인 위원장이 제시한 공약 중에서 기존 순환출자 금지, 국민참여재판제, 기업집단법 제정 등을 빼버린 것이 단적인 예다. 경제민주화는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사전적으로는 기회 균등, 과정에서는 공정 경쟁, 사후적으로는 약자 보호다. 박 후보의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은 세 가지 중 하나에 불과하다. 이것만 가지고는 경제민주화의 완성이 어렵다.

두 사람이 격투기를 한다고 가정하자. 한 사람은 근육질로 무장한 몸무게 100kg의 건장한 사내다. 맞상대는 50kg밖에 안 나가는 여린 몸매의 여인이다. 심판이 아무리 공정하게 격투기 룰을 집행해도 결과는 ‘안 봐도 비디오’다. 진정으로 공정한 경쟁이 되려면 체급이 같아야 한다.

 

박근혜는 이명박과 과연 다를까?

경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시장에서 불공정 행위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소비자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은 막강한 경제력 때문이다. 재벌의 불공정 행위를 제대로 견제하려면 경제력 집중을 개선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경제민주화는 공정한 시장경제 확립과, 재벌의 경제력 집중 완화를 위한 기회 균등, 보편적 복지 확대를 통한 약자 보호라는 세 바퀴가 맞물려야 이뤄질 수 있다.

셋째, 박 후보의 주변에는 온통 경제민주화 반대론자들뿐이다. 김종인 위원장은 “박 후보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경제민주화를 아는 사람들이 아니다. 경제민주화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고 증언한다. 경제민주화 속도조절론을 펴는 김광두 단장은 박 후보가 2007년 새누리당 경선에서 내걸었던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치 세우고) 공약의 입안자다. 이정우 민주당 경제민주화위원장은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는 줄푸세와 상극”이라고 말한다.

이명박 후보는 5년 전 대선에서 경제를 살리겠다며 ‘친기업’(사실상 친재벌)과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내걸고 당선됐다. 하지만 결과는 딴판이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성적표는 성장률 2.9%, 명목 기준 1인당 국민소득 2천만달러, 경제규모 세계 13~15위로 ‘747 공약’(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세계 7위 경제대국)과 거리가 멀다. 이명박 정부의 실적은 스스로 ‘경제 파탄’이라고 공격한 노무현 정부에 비해서도 초라하다. 이명박 정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2.9%)이 노무현 정부(4.3%)보다 훨씬 낮은 상황에서 새누리당이 참여정부의 경제 실정을 공격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첫째, MB노믹스(이명박 정부의 경제정책)는 원칙부터 잘못됐기 때문이다. 친대기업 정책은 달리 말하면 반중소기업, 반소비자 정책이다. 한 예로 친대기업 정책으로는 중소기업에 대한 재벌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를 제대로 시정할 수 없다. 또한 재벌이 가격을 담합해 소비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제대로 막을 수 없다. 정부는 재벌을 편드는 게 아니라, 시장경제의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한다.

둘째, MB노믹스는 한국 경제의 구조 변화를 간과했다. 경제발전 초기에는 대기업이 성장하면 그 과실이 중소기업과 국민에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의 적하(트리클다운) 효과가 더욱 약해지며 양극화 심화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이명박 정부의 친대기업 정책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것처럼 양극화를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명박 정부가 집권 중반기인 2010년 9월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정책을 표방한 것은 MB노믹스의 실패를 자인한 것이다.

적잖은 경제전문가들이 이명박 정부의 실패를 예견했다. 하지만 국민은 ‘경제대통령’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박근혜 후보는 말로는 경제민주화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박 후보 본인은 정말 경제민주화를 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박 후보나 새누리당의 본질과, 그 주변 환경은 경제민주화의 성공을 어렵게 하는 조건으로 가득 차 있다. 국민은 이제 다시 ‘경제민주화 대통령’ 박근혜를 선택하고자 한다. 혹자는 “박근혜는 이명박과 다르다”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 내내 박근혜 후보가 견제받은 것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같은 계급이나 집단 내부의 권력 다툼에 불과하다.

 

제 발등 찍는 자승자박 재연 안 돼

다수의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5년 전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이명박 정부의 최대 희생자가 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바로 이명박 정부의 출범에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제 발등을 찍는 자승자박이었다. 국민은 이제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섰다. 최소한 이번에는 자승자박을 재연해서는 안 된다. 새누리당은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공격했다. 지금 우리의 선택은 진짜로 ‘잃어버린 10년’을 만들지 모른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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