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20위권의 효성그룹이 연일 화제다. 조석래 회장의 둘째아들로 3세 경영의 한 축을 맡던 조현문 전 ㈜효성 부사장이 경영에서 손을 떼고 보유 주식을 전격적으로 팔더니 셋째아들 조현상 부사장이 주식을 추가로 사들여, 큰형인 조현준 사장과의 형제간 승계 경쟁이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능력 없는 후계자 승계로 위험 처한 재벌들
그동안 재벌가의 경영 세습은 국민으로부터 동경과 더불어 비판의 대상이었다. 재벌 2·3세들이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것까지는 운이 좋은 덕으로 돌린다 해도, 경영 능력에 대한 제대로 된 검증 없이 거대 그룹의 경영권을 승계하는 전근대적 행태는 위험천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종업원, 협력업체, 소비자, 지역사회 등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이 관련돼 있는 일종의 사회적 공기(公器)다. 자칫 무능한 2·3세가 경영을 물려받을 경우 총수 가족뿐만 아니라 수많은 이해관계자들에게 치명적 피해를 안겨준다.
사실 재벌을 총수 일가의 소유물처럼 취급하는 것 자체가 무리다. 총수가 있는 43개 재벌(공정거래위원회가 지정한 대규모 기업집단)의 내부지분율(총수 일가+계열사 지분)은 2012년 4월 현재 50%에 육박하지만, 정작 총수 일가만의 지분은 4% 남짓에 불과하다. 엄밀히 얘기하면 총수 일가는 일개 대주주일 뿐, 주인 행세를 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재벌 2·3세들은 능력 검증 없이 총수의 아들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초고속 내부 승진을 거쳐 경영권까지 승계하는 것을 마치 당연한 일처럼 여긴다. 이 얼마 전 경영 세습이 진행 중인 17개 재벌의 3·4세 3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이들이 최초로 회사에 들어온 나이는 평균 27살, 최초 임원 선임 나이(상무보 이상)는 31.2살이다. 이들 가운데 회장·부회장·사장을 맡고 있는 11명의 2·3세들이 최초로 최고경영자 자리에 선임된 나이는 평균 37.2살에 불과하다.
국민은 그동안 경영 능력이 없는 후계자의 승계나 형제간 내분으로 재벌 스스로 위험에 처하는 것을 적잖이 목격했다. 흔히 ‘왕자의 난’이라고도 불리는 형제간 내분을 과거에 겪었거나 현재까지 진행 중인 재벌은 10대 그룹 안에서도 현대·삼성·한화·두산 등 4개에 달한다. 또 내분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계열 분리’라는 이름을 앞세워 기업을 파이 조각처럼 나눠 먹는 일도 다반사다. 사실 경영진이 기업을 쪼개는 것은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 배임 행위다. 독일의 강소기업인 ‘히든 챔피언들’은 가족 소유 경영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금기시하는 것이 하나 있다. 기업을 쪼개서 가족들이 나눠 갖는 일은 절대 안 한다.
80년대 유명 밴드 ‘무한궤도’ 멤버
효성 사태는 단순한 흥밋거리를 뛰어넘어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핵심은 조현문 전 부사장이 한국 재벌의 승계 공식을 완전히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조석래 회장은 그동안 세 아들에게 섬유, 중공업, 산업자재 등 3개의 주력 사업을 나눠 맡겨 일종의 ‘내부 경쟁’을 시켰다. 세 아들은 그동안 각기 맡은 분야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조현문 전 부사장은 2007년부터 맡은 중공업 쪽에서 괜찮은 평가를 얻고 있다. 효성의 한 임원은 “조현문 부사장이 한전에 치우친 중공업의 거래처를 브릭스(BRICsㆍ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국가 등을 중심으로 해외로 확대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1980년대 말 유명 밴드인 ‘무한궤도’에서 활동하기도 한 조 전 부사장은 열정적인 업무 스타일로 유명하다. 효성의 한 전직 임원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사무실과 현장에서 일을 한다. 특히 밤 1시에 지방 공장을 방문해 깜짝 놀라게 한 일도 있다”고 조 전부사장을 소개했다.
조현문 전 부사장이 스스로 경영에서 물러나기로 한 것은 오랜 고심의 산물이다. 조 전 부사장 쪽 관계자는 “고민을 시작한 지 1년6개월여로 꽤 오래됐다”고 말했다. 조 전 부사장은 평소 재벌 전반의 경영 행태, 기업문화에 대해 적잖은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재벌이 변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특히 법학박사와 변호사 출신답게 준법·윤리·정도경영을 강조했다. 최근 가족 관련 스캔들, 회사 내부 비리에 대해서도 안타까워했다. 효성 직원들은 조 전 부사장에 대해 “매우 원칙적”이라고 말한다. 이로 인해 내부 경영진과도 크고 작은 갈등이 있었다.
경영 스타일의 차이도 작용했다. 효성은 ‘두드린 돌다리도 다시 두드리는’ 식의 신중하고 꼼꼼한 조직문화로 유명하다. 조석래 회장은 평소 “잘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한다”는 경영철학을 강조한다. 이런 경영방식은 안정성은 높일 수 있지만 성장성은 떨어지기 쉽다. 효성이 스판덱스·타이어코드·에어백모듈 등 다수의 세계 1위 품목을 보유하고 있지만, 한때 재계 5위권에서 지금은 20위권으로 밀려난 것은 보수적 경영 스타일과 깊은 연관이 있다. 젊고, 자신감이 넘치고, 적극적이고, 추진력 강한 조현문 전 부사장이 갑갑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조현문 전 부사장은 결국 효성의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 새로운 사업에 도전하는 길을 선택했다. 이는 현실론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결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잘하면 효성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고, 그렇지 않아도 그룹의 3분의 1은 차지할 수 있는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했기 때문이다. 실제 효성의 창업주인 조홍제 회장은 조석래 회장 등 아들 삼형제에게 사업을 골고루 나눠줬다.
하지만 조현문 전 부사장은 편한 길을 마다하고 자신의 비전과 적성,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했다. 그는 법무법인 현의 고문변호사를 맡았다. 이제 변호사인 그는 로펌을 세계적 회사로 만들겠다는 꿈을 갖고 있다. 조 변호사는 서울대와 미국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고, 법학박사와 국제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다. 동문을 중심으로 한 법률서비스 시장 관련 국제적 네트워크를 보유한 것이 강점이다. 때마침 국내 법률서비스 시장도 개방됐다. 그동안 국내의 대형 로펌들은 힘있는 정부부처 출신 고위 관료들을 영입해 인맥 위주의 장사를 해왔다. 하지만 조 변호사는 기업 인수·합병(M&A) 등 국제 분야에서 실력으로 승부하겠다는 포부를 보인다.
조 변호사의 결단은 효성, 총수 일가, 투자자 등 다른 이해관계자들에게도 긍정적이다. 무엇보다 후계 구도의 불확실성, 나아가 형제간 분란의 위험성을 완화했다. 조 변호사의 보유 주식 매각으로 주가가 일시 하락하면서 ‘오너 리스크’라는 지적도 제기됐다. 하지만 중·장기적으로는 오히려 ‘오너 리스크’를 해소시켜, 주가 상승 요인으로 작용할 공산이 높다. 조 변호사가 지분을 계속 보유하면서 형제간 경쟁에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려고 했다면, 역으로 후계 구도의 불확실성과 갈등이 훨씬 더 커졌을 것이다. 조 변호사 스스로도 지분 매각 이유를 “불필요한 오해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실제 효성 주가도 지분 매각 이후 바닥을 치고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오너 리스크’ 해소, 주가 상승 요인 될 듯조 변호사는 사태 이후 외국으로 출장을 떠났다. 그가 돌아오면 꼭 만나볼 생각이다. 그래서 재벌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봐야겠다. 재벌이 변해야 대한민국이 제대로 설 수 있으니….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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