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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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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캠프에 ‘경제민주화’ 깃발 나부끼지만

당선 이후를 엿보게 하는 대선 후보와 경제정책 책임자의 궁합… 박근혜 당론으로 결정 못하고, 문재인 재벌 개혁 의지 분명치 않고, 안철수 구체안 못 내놓고
등록 2012-10-13 14:49 수정 2020-05-03 04:26
박근혜 캠프의 김종인 박사, 문재인 캠프의 이정우 경북대 교수, 안철수 캠프의 장하성 고려대 교수(왼쪽부터)는 모두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상징성이 큰 인물들이다.

박근혜 캠프의 김종인 박사, 문재인 캠프의 이정우 경북대 교수, 안철수 캠프의 장하성 고려대 교수(왼쪽부터)는 모두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상징성이 큰 인물들이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9월27일 안철수 대선 후보가 장하성 고려대 교수의 캠프 영입에 성공했다. 이로써 유력 대선 후보들의 정책 책임자 인선이 사실상 마무리됐다. ‘박근혜-김종인’ ‘문재인-이정우’ ‘안철수-장하성’의 조합이다. 각 캠프의 정책 책임자들은 대선을 앞두고 시대정신으로 부각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 상징성이 큰 인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한구와의 충돌에 “둘이 다르지 않다”

세 대선 후보와 경제민주화 정책 책임자들 간의 궁합은 어떨까? 결혼할 때 신랑·신부의 궁합이 좋아야 헤어지지 않고 오래 해로할 수 있다는 옛말이 있다. 대선 후보와 경제민주화 정책 책임자들의 궁합을 보면 각 후보들의 실체는 물론 당선 이후 경제민주화 정책을 전망해볼 수 있다.

김종인 박사는 박근혜 캠프의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을 맡고 있다. 그는 1987년 헌법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든 주역이다. 4·11 총선 전에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으로 영입돼 경제민주화를 당의 정강정책에 반영하는 것을 주도했다. 그는 박근혜 캠프에서 국민행복추진위의 핵심인 경제민주화추진단장을 겸할 정도로 경제민주화와 관련해서는 전권을 쥐고 있다. 하지만 김 위원장의 입지는 9월 이후 흔들렸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정체불명의 경제민주화로 기업의 의욕이 떨어지고 국민이 불안해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김 위원장이 “상식 이하”라고 반발했지만, 박 후보는 “두 분의 생각이 다르지 않다”고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서 제기한 법안들도 지금껏 당론으로 채택된 게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지난 10월4일 열린 새누리당의 의총은 경제민주화 논의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예상됐다. 김 위원장은 의총 전부터 “(경제민주화 문제에 대해) 결판을 내서 경제민주화실천모임에서 제시한 법안 가운데 한두 개는 정기국회에서 입법하기로 결정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진실성이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새누리당 의총은 박 후보를 제외한 지도부 총사퇴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며 경제민주화 당론 채택은 결론을 내지 못했다.

김 위원장은 그동안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 의지가 분명하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의총 결과는 박 후보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의지가 분명치 않음을 재확인해준 셈이 됐다. 김 위원장은 의총이 끝난 뒤 “이런 식으로는 더 이상 일할 수 없다”며 사실상 ‘최후통첩’을 했다.

문 후보의 싱크탱크인 ‘담쟁이포럼’ 연구위원장을 맡아온 이정우 경북대 교수(경제학)는 4일 문 캠프 대선정책의 중심인 ‘미래캠프’ 산하 경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됐다. 이 교수는 참여정부에서 초대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다. 그는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으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온 박정희식 성장지상주의를 대체하는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의 완성을 제시한다. 이 위원장은 평소 노무현 정부의 최대 실책으로 재벌과 관료 문제를 꼽아왔다. 이 위원장 자신도 참여정부 안에서 재벌과 관료들에 맞서며 어려움을 겪다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을 계기로 사임했다.

재벌 주장처럼 보이는 문제적 연설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 정신의 계승을 천명했다. 이는 이 위원장의 문제의식과 충돌할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것이 단순한 기우만은 아님이 드러나고 있다. 문 후보는 대선 출마 선언 이후 경제민주화를 시대정신으로 강조했다. 하지만 9월16일 후보 수락 연설에서 새로운 시대로 가기 위해 열어야 할 ‘다섯 가지 문(門)’을 제시하며, 경제민주화를 일자리 혁명과 복지국가의 뒷전으로 밀어놨다. 재벌들은 그동안 경제민주화가 대기업의 투자를 위축시켜 일자리 창출을 저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국민은 경제민주화보다 일자리 창출을 더 간절히 바란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재벌의 이런 주장은 경제민주화를 폄하하려는 궤변에 불과하다. 한국 경제의 현실에서 재벌 개혁은 곧 일자리 창출을 뜻한다. 국내 사업체 수의 99%를 차지하는 중소기업들이 재벌 개혁을 통해 공정한 대우를 받고 경쟁력을 높인다면 바로 일자리 확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문 후보의 연설은 결과적으로 재벌의 주장과 타협했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는 소지를 남겼다. 문 캠프는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의 영입에도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 교수는 경제민주화에 동조하면서도 다른 개혁진보 진영 경제학자들과 달리 재벌과의 대타협을 주장하는 인물이다.

결국 문 캠프는 재벌 개혁에 실패한 노무현 정부와의 차별성을 어떻게 보여줄 것이냐는 과제를 안고 있다. 전망은 불분명하다. 공식적으론 이정우 위원장이 문 캠프의 정책 좌장이지만, 실제로는 친노 관료그룹으로 분류되는 변양균 전 청와대 정책실장이 강한 입김을 행사한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문 캠프의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문 캠프 안에서 공식 정책라인의 의견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얘기가 많다”며 “문 후보가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재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복안을 분명히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안철수 캠프에서 통일·외교·안보를 제외한 나머지 정책을 총괄한다. 장 교수는 참여연대 경제민주화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재벌개혁론자다. 문 후보도 장 교수에게 직접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로 공을 들였으나 결국 고배를 들었다. 장하성 교수가 문 캠프 대신 안 캠프를 선택한 것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장 교수는 “그동안 기존의 틀 안에서, 기존 것들을 조합해서 한국 사회에서 변화의 변곡점을 만들려 했지만 실패한 만큼 이제는 새로운 틀로 변화를 만들어야 한다”며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어젠다를 맡기는 것이 옳다”고 말했다.

장 교수의 안 캠프행에는 2002년 노무현 대통령과의 좋지 않은 기억도 한몫한다. 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집권하면 꼭 도와달라고 장 교수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선거 승리 뒤 연락은 끊겼다. 더욱이 집권 초부터 재벌과 관료들에 포섭돼 재벌 개혁 약속을 저버리고, “권력은 시장(재벌)에 넘어갔다”며 사실상 항복 선언을 했다. 노무현 정부의 한-미 FTA 강행 추진까지 덧붙여져 개혁진보 진영 학자들의 노무현 정부에 대한 불신은 지금도 강하다.

행정 경험이 없는 학자들 일색

재벌 개혁에 상징성이 큰 장 교수의 영입은 다른 개혁진보 진영 학자들에게도 흡인력을 발휘하고 있다. 전성인 홍익대 교수가 안 캠프 참여를 사실상 결정했다. 추석 연휴 중 개혁진보 진영 학자들 모임에서 “(학자들이) 대선 캠프별로 나뉘어 정치인들 들러리나 장식품으로 전락해선 안 되고, 일(경제민주화)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이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안 캠프는 아직 정책 방향만 밝혔지 구체적인 정책 내용을 내놓은 것은 없다. 주요 정책 입안자들이 행정 경험이 없는 학자들 일색인 것도 약점으로 꼽힌다.

대선 후보와 경제민주화 정책 책임자들 간의 궁합을 종합해보면 각 캠프의 약점이 드러난다. 박근혜 후보는 경제민주화 의지가 불분명하고, 문재인 후보는 재벌 개혁에 실패한 노무현 대통령과의 차별성을 입증해야 하며, 안철수 후보는 정책의 구체성과 국정수행 능력을 보여줘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한겨레 선임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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