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국회에서 재벌의 ‘일감 몰아주기’ 규제 를 담은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이를 계기로 재벌의 ‘불법 상속’ 관행이 사라질까?
재벌 총수들은 자산 규모가 수십조~수백 조원에 달하는 그룹의 경영권을 세금 없이 대물림하며, 이를 ‘절세’라고 미화해왔다. 반 면 정부 당국은 불법 상속·증여를 차단하고 자 애써왔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양상만 놓 고 보면 이 쫓고 쫓기는 싸움은 재벌 총수들 의 일방적인 승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재계에서는 이를 두고 “재벌은 토끼, 정 부는 거북이”라는 우스갯소리마저 나올 정 도다.
정부 대책 마련 나섰을 땐 “버스 떠난 뒤”재벌 총수들의 세금 없는 대물림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흔히 불법 상속 방법은 ‘3 단계 진화 과정’을 거친 것으로 설명된다. 1단 계는 주식을 직접 헐값에 넘기는 방법이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는 생전에 공익재단에 주식을 출연하고, 공익재단이 이를 다시 후 계자로 지명된 이건희 당시 부회장에게 되파 는 방법을 동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건 희 회장이 1987년 자산 7조원짜리 삼성그룹 의 경영권을 세습하면서 낸 상속세는 176억 원에 불과했다.
정주영 현대 창업주는 비상장 계열사 주 식을 2세들에게 헐값에 넘기는 이른바 ‘물타 기 증자’를 애용했다. 이후 계열사가 상장을 하면 주식가치가 급등하고, 2세들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정부가 공익재단 출연 및 물타기 증자 차단에 나섰 을 때는 이미 ‘흘러간 물’이었다.
2단계는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 (BW) 등 신종 금융상품을 활용하는 방법이 다. 주식을 바로 넘기는 방법을 막으니, 주식 으로 바꿀 수 있는 권리가 붙은 특별한 회사 채를 이용했다. 비상장 계열사가 CB나 BW 를 총수 2세들에게 헐값에 발행하고, 이후 계열사가 상장해서 주식가치가 급등하면, 2세들은 CB나 BW를 주식으로 전환해 막대 한 시세차익을 거두었다. 삼성에버랜드와 삼 성SDS가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에게 CB와 BW를 헐값에 발행한 사건이 대표적 사례 다. 이 역시 정부가 대책 마련에 나섰을 때는 이미 ‘버스가 떠난 뒤’였다. 이건희 회장은 이 들 사건과 관련해 2008년 삼성특검에 의해 배임죄로 기소됐다. 하지만 법원은 SDS 사 건은 유죄, 에버랜드 사건은 무죄라는 상반 된 판결을 내렸다. 에버랜드 사건의 무죄판 결은 아버지(이건희)가 지배하고 있는 삼성 의 경영권을 (CB 헐값 발행을 통해) 아들(이 재용)에게 넘겼는데, 정작 아버지는 이를 몰 랐다는 코미디 같은 얘기다.
3단계는 국회가 이번에 규제 대책을 마련 한 ‘일감 몰아주기’ 방법이다. 총수 일가가 소 유한 회사에 그룹 계열사들이 일감을 몰아 준 뒤, 총수 일가 소유의 회사 가치가 올라가 면, 상장해서 막대한 시세차익을 거두는 수 법이다. 현대차그룹 정몽구 회장과 아들 정 의선 부회장이 주식을 보유한 현대글로비스 가 대표적 사례다. 재벌 총수들은 물류·시 스템통합(SI)·광고·건설 등 그룹 내부 물량 만으로도 ‘땅 짚고 헤엄치기’식으로 이익을 올릴 수 있는 분야에서 자신이 소유한 회사 를 만들어 계열사 일감을 싹쓸이했다. SK 최태원 회장 오누이가 주식을 보유한 SK C&C에 계열사들이 정보기술(IT) 일감을 몰 아주는 것도 한 사례다. 계열사들이 직접 수 행하면 이득이 되는 사업을 총수 일가 소유 회사가 중간에서 가로채는 것은 명백한 사 익 편취에 해당한다. 총수 일가가 이를 통해 얻는 이득은 어마어마하다. 정몽구 회장 부 자와 최태원 회장의 경우 보유 주식의 가치 상승에 따른 이익이 각각 2조원을 넘는 것으 로 평가된다.
노무현 정부는 일감 몰아주기 차단을 위 해 2004년 ‘상속증여세 완전포괄주의’를 도입했지만, 정부는 이후에도 9년 동안 법 시행을 제대로 하지 않는 직무유기를 저질렀다. 이명박 정부는 2012년 계열사 일감 몰아주기 혜택을 받은 재벌 총수 일가에게 증여세를 부과하도록 세법을 개정했다. 하지만 일감 몰아주기에 대해 부과되는 증여세는 실제 얻은 이익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다. 한 예로 조 단위 이익을 얻은 정몽구 회장 부자와 최태원 회장에 대한 증여세 부과액은 각각 160여억원과 70여억원 으로 추정된다.
17년의 시차 두고 반복되는 역사정부는 2007년 일감 몰아주기를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행위의 한 유형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실제 이 규정에 따라 제재한 사례는 드물다. 그나마 ‘가물에 콩 나듯’ 제재한 사건들도 법상 미비점 때문에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SDS의 BW 헐값 발행과 현대글로비스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를 ‘부당지원’으로 제재했다. 하지만 삼성SDS 사건은 대법원에서 패소했다. 공정거래법상 부당지원으로 제재하려면 ‘경쟁제한성’을 입증해야 한다는 규정에 발목이 잡힌 것이다. 또 현대글로비스 사건은 대법원에서 수년째 낮잠을 자는 중이다.
2012년 대선에서 주요 후보들은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을 위한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를 공약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를 국정과제로 채택했다. 이번 공정거래법 개정안도 대선 공약과 국정과제 내용을 담고 있다. 우선 재벌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근절을 위한 규제 조항을 기존의 부당지원금지 조항이 있는 공정거래법 5장에 추가했다. 일감 몰아주기 행위를 ‘정상 거래보다 상당히 유리한 조건의 거래’ ‘사업능력, 재무상태, 품질, 거래조건 등에 대한 합리적 고려나 다른 사업자와의 비교 없이 상당한 규모로 거래하는 행위’ ‘회사가 직접 또는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회사를 통해 수행하면 이익이 될 사업 기회를 제공하는 행위’ 등 3가지로 명시하고, 이에 대해서는 ‘경쟁제한성’ 입증 없이도 제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계열사 간 부당지원의 위법성 요건인 ‘현저히 유리한 조건’을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완화하고, 부당지원을 해준 ‘지원 주체’뿐만 아니라 지원을 받은 ‘지원 객체’도 함께 제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기업 간 거래에 총수 일가 소유 회사가 끼어들어 수수료를 챙기는 이른바 ‘통행세’에 대한 규제도 신설했다.
이번 법 개정은 재벌의 불법 상속을 차단하는 데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계기가 될 전망이다. 전직 공정위 고위 관료는 “다른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 열 가지를 이행하는 것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 하나가 재벌 문제 해결에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공정위는 총수 일가 사익 편취 규제 조항을 아예 공정거래법 3장(경제력 집중 억제)에 넣으려고 했으나 재벌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공정위가 1996년 말 공정거래법에 부당지원금지 규정을 처음 도입할 때도 같은 이유로 3장 대신 5장에 들어갔다. 17년의 시차를 두고 반복되는 역사는 많은 것을 함축한다. 한 예로 경제개혁연대는 개정안이 일감 몰아주기 규제 대상을 일정 규모 이상 재벌로 국한하고, 재벌 계열사가 총수 일가나 총수 일가 소유 회사와 거래할 때만 적용하기로 한 것이 규제의 사각지대를 발생시킬 것으로 우려한다.
‘세금 없는 대물림’ 향한 탐욕법을 만들어도 제대로 집행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공정위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강화를 계기로 2005년 재벌의 압력으로 폐지된 조사국의 부활을 추진하고 있다. 공정위 조사국은 재벌의 부당지원 관련 정보 수집·관리, 조사, 과징금 부과 등을 전담했던 조직이다. 하지만 최경환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조사국 부활을 공정위의 ‘조직 이기주의’로 매도하며 선수를 쳤다.
재벌 옹호론자들은 재벌을 합리화하기 위해 진화론을 동원한다. 재벌은 환경 변화에 적응해 살아남은 성공의 결과라는 것이다. 결국 재벌은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회피하기 위해 제4의 방법을 찾을 것이다. 재벌의 불법 상속을 차단하는 일은 세습경영을 막는 것이고, 이는 곧 재벌체제의 종언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세금 없는 대물림’을 향한 재벌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정부와의 ‘추격전’은 지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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