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회장님이 (감옥에서)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이 없겠나?” “우리 회장님이 (실형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요즘 몇몇 재벌그룹 임직원들을 만나면 듣는 질문이다. 혹자는 전관예우를 받을 수 있는 변호사를 찾거나, 총수에게 우호적인 기사가 언론에 실리도록 하는 방법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과연 원하는 결과가 얻어질까? 아니, 그것이 정말 근본 해법이 될 수 있을까? 최근 재벌 총수와 관련한 법원의 달라진 태도는 판사 개인의 소신이라기보다 사회 분위기의 변화 때문이다. 대선을 맞아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경제민주화가 문제의 본질이다. 재벌 총수라도 법을 어기면 더 이상 봐줘서는 안 된다는 민심의 압력이다.
경제민주화 리스크에 ‘대응’ 않는 재계
사실 다른 재벌들도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현대자동차·두산 등의 총수들도 불과 몇 년 전 비자금, 차명계좌, 탈세, 배임·횡령 등의 혐의로 법의 심판대에 올랐다. 그때는 시절이 좋아서 감옥행을 피했지만, 지금이라면 상황이 전혀 달랐을 것이다.
그럼 회장님을 구하는 진정한 해법은 뭘까? 경영은 기업 내부 자원과 역량을 합리적·효율적 방법으로 조직해 외부 환경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조직의 비전과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결국 경영의 핵심 중 하나는 외부 환경의 리스크(위험요소) 관리다. 경제민주화는 재벌에는 곧 리스크다. 싫다고 그냥 무시할 게 아니라, 적절히 대응해서 합리적 해결책을 찾아야 할 리스크다. 더욱이 이 리스크는 일시적인 게 아니다. 재벌그룹 임직원들도 사석에서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경제민주화는) 이제 시대의 흐름이고,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다 안다”고 말한다.
재벌들은 경제민주화라는 외부 리스크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내부적으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몰라도, 국민들 눈에는 좀처럼 달라진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중소기업과의 불공정 하도급 거래, 영세상인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골목상권 침해, 전체 고용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 문제, 총수들의 법 위반 행위 등 재벌마다 걸려 있는 경제민주화 이슈는 한둘이 아니지만, 그 누구도 국민들 마음을 속 시원히 해주는 전향적 조처를 내놨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도대체 왜 그럴까? 4대그룹의 한 임원은 “이번 정기국회에서 경제민주화 관련 법안이 어떻게 처리될지 아직 모르지 않느냐”고 답한다. 또 다른 재벌그룹 임원은 “다음 대통령으로 누가 당선될지 아직 모르지 않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국회의 법안 처리나 대선 결과에 따라 경제민주화 이슈가 달라질까? 속도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근본 방향은 거스를 수 없다.
이는 경제민주화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국민들 삶의 문제가 됐기 때문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나는 골목상권의 영세상인, 대기업과 거래하는 중소기업, 대기업 사내 하청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모두 자기 삶의 어려움을 경제민주화와 연결시킨다.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되든, 국민의 삶이 개선되지 않는 한, 경제민주화 이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민주화가 시대적 대세임을 인정한다면, 재벌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합리적일까? 가만히 있다가 남의 뒤를 따라가는 방법이 있다. 다른 하나는 남보다 앞서 변화하는 방법이다. 기업의 역량은 리스크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이다. 실제 대기업들은 경기가 어려워질 것 같은 징조가 보이면 ‘비상경영’ ‘위기경영’이다 해서 선제 대응에 나선다. 그런데 왜 가장 큰 리스크인 경제민주화에는 선제 대응을 하지 않고 온갖 집중포화를 맞는 것일까?
모범적인 LG, 자승자박 SK·한화
총수가 재판을 받고 있는 한 재벌그룹의 간부는 “회사 내부의 대책회의에서 온갖 아이디어가 쏟아진다”고 말한다. 그중에는 삼성식의 총수 경영 일선 퇴진 선언은 물론 소유와 경영의 분리 같은 깜짝 놀랄 방안들도 들어 있다. 갑자기 흥미가 당겼다. “그래, 위에서는 뭐라고 해요?” 돌아오는 대답이 허탈하다. “위에 보고할 수 없어요. 보고하면 목이 잘릴 각오를 해야 하는데, 누가 하겠어요.” 합리적 사고를 하는 사람이면 땜질식 임시방편으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현실은 당장 “감옥에서 나오거나, 감옥에 가지 않을 방법을 찾으라”는 윗선의 지상명령에 따르는 것 외에는 다 불충이다.
요즘 경제민주화 이슈와 관련한 재벌그룹 기사가 쏟아지지만 예외인 그룹이 있다. 바로 LG다. LG는 2001년 재벌 최초로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해 단순·투명한 소유지배구조를 갖췄다. LG는 지금 재벌 개혁과 관련해 쟁점이 되고 있는 순환출자 규제, 금산분리 강화, 계열분리명령제 도입 등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총수 일가에 대한 일감 몰아주기나, 골목상권 침해 이슈와 관련해서도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없다. 11년 전 LG가 막대한 비용을 치러가며 남보다 앞서 지주회사로 전환할 때 적잖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짓 아니냐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지금 보면 LG는 선제적 대응을 통해 외부 리스크를 근원적으로 제거한 것이다.
SK 사례는 반면교사다. 2003년 분식회계 사태로 총수가 구속되고 이어 외국계 펀드인 소버린의 경영권 장악 시도 탓에 위기에 직면했다. SK는 위기의 근원인 지배구조 개혁을 천명했다. 이사회 중심 책임경영을 전면에 내걸고 조순 전 부총리 등 명망 있는 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잇달아 영입해 신선한 충격을 줬다. 언론에서는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8년 뒤 총수 형제의 회삿돈 횡령 혐의가 터져 그동안 애써 쌓은 공든 탑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한화는 또 다른 자승자박 사례다. 김승연 회장은 이번 구속이 세 번째다. 2007년 아들 관련 폭행사건으로 구속될 때 국민 앞에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던 모습이 엊그제 같다. SK나 한화 모두 보여주기가 아니라 근본 개혁을 추진했다면 지금의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다.
재벌들은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고, 국민의 요구에도 부응하는 경제민주화 실천 방안을 신속히 찾아야 한다. 국내 대기업들이 15년 전 외환위기를 계기로 외형 확장에만 매달리던 구태에서 벗어나 내실 위주의 경영으로 환골탈태한 것처럼, 껍질을 깨는 일대 패러다임의 전환이 요구된다. 필요하다면 총수들 목에 방울을 다는 각오로 말이다.
이웃 중국에서도 부는 경제민주화 바람
경제민주화 바람은 이웃 중국에서도 분다. 중국 기업들은 빠른 경제발전 속에서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에 대한 기대가 높아져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 요구를 거세게 받고 있다. 중국 기업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일부는 시대의 변화를 거부한 채 노동자들을 억압한다. 노동자들의 잇단 자살과 시위는 그 반발이다. 하지만 일부 중국 기업들은 외부 리스크에 능동적으로 대응해 과감한 경영혁신을 시도하고 있다. 15개 계열사를 거느린 중견 그룹인 킨와는 좋은 사례다. 계열사인 정주케이블을 시작으로 ‘인간 중심 경영’을 구현한 한국의 뉴패러다임 혁신 모델을 도입해 노동자들의 삶의 질 향상, 평생학습 체제 구축을 통한 지식노동자 양성, 회사 경쟁력 강화, 노사관계 개선 등 노사 상생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재벌이 어떤 자세를 갖느냐에 따라 경제민주화라는 위기는 기회로 바뀔 수 있다. 또 그렇게 해야 총수들이 다시 감옥에 가는 일이 사라질 것이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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