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양호 보고펀드 대표는 이른바 ‘변양호 신드롬’의 주인공이다. 변양호 신드롬은 공무원이 사후에 책임질 것이 두려워 중요한 정책 결정을 꺼리는 ‘보신주의’를 일컫는다. 변 대표는 최근 이 용어가 만들어지는 계기가 된 사건들을 담은 자서전적 성격의 이라는 책을 펴냈다.
변 대표는 2005년 초 28년간의 공직 생활을 스스로 정리하고 토종 투자펀드인 ‘보고펀드’를 만들었다. 행정고시 수석 합격, ‘관료의 꽃’으로 불리는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최장수 역임, 금융정보분석원장(차관보급) 승진, 확실한 미래의 장차관 후보 등 그의 화려한 이력과 세간의 평가에서 보여지듯 최고로 잘나가던 금융관료의 사퇴는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됐다.
누구나 잡아들일 수 있는 대한민국 검찰
그의 순탄하던 인생은 2006년 6월 대검 중수부에 긴급체포되면서 급전직하로 곤두박칠쳤다. 금융정책국장 시절인 2001~2002년 현대자동차의 돈심부름꾼에게서 구조조정 기업의 인수와 관련해 잘 봐달라는 명목으로 수억원의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변 대표는 동시에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의 조사도 받았다. 2003년 미국계 투자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매입할 수 있게 해서 배임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변 대표는 이후 4년4개월 동안 2번 구속됐고, 292일 동안 감옥살이를 했으며, 142번의 재판을 받았다.
하지만 변 대표는 2009년 9월 현대차 로비 의혹 사건 재판에서 무죄 선고를 받았다. 1년여 뒤인 2010년 10월에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 의혹 사건에서도 무죄가 확정됐다. 검찰의 무리한 수사를 통한 법치주의 유린은 변양호라는 한 개인은 물론 한국 사회 전체에 큰 상처를 남겼다.
변 대표는 책에서 검찰이 마음만 먹으면 죄 없이도 감옥살이가 가능한 우리나라의 불합리한 사법 시스템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그는 김두식 경북대 교수가 쓴 이라는 책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해 무소불위의 대한민국 검찰을 이렇게 표현했다. “대한민국의 검찰은 ‘누구나 풀어줄 수 있는 검찰’이자, ‘누구나 잡아들일 수 있는 검찰’이다.”
변 대표는 책 발간과 관련한 인터뷰 요청을 사양했다. 감옥에서의 고초를 통해 기독교 신자가 되어 검찰에 대한 복수심을 버렸고, 이 책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일 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변 대표가 신앙심에 의거해 검찰을 종교적으로 용서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검찰 개혁과 법치주의 확립은 여전히 한국 사회의 숙제로 남아 있다.
최근 CJ그룹 비자금 의혹 사건은 ‘누구나 풀어줄 수 있고, 누구나 잡아들일 수 있는’ 대한민국 검찰의 모습을 그대로 재연하고 있다. CJ 비자금의 실체는 이미 5년 전인 2007~2008년 검경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확인됐다. 이재현 CJ 회장의 자금관리인이 사채업자 청부살인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임직원 명의의 수많은 차명계좌와 수천억원의 비자금이 드러났다. 심지어 국세청이 1700억원의 탈루세금을 추징하기까지 했다. 또 2009년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수사 과정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이 이재현 회장의 부탁으로 세무조사를 무마한 혐의까지 포착됐다. 하지만 검찰은 지난 5년간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고 있다가 돌연 칼을 빼들었다. 검찰은 차명재산이 선대에게서 상속받은 돈이라는 이재현 회장의 해명이 있었고, 회사 자금을 빼돌린 증거가 없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로 세무조사 무마 사건을 수사할 형편이 안 됐다는 변명을 늘어놓지만 궁색할 뿐이다.
많은 국민이 CJ의 불법 혐의에 대해 엄정한 수사를 촉구하면서도 검찰 수사에 대해 석연치 않은 느낌을 지우지 못하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검찰이 5년 전 해묵은 사건을 지금껏 눈감아줬다가 지금에야 뒤늦게 문제 삼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부를 곤경에 빠뜨린 윤창중 방미 스캔들 잠재우기, 개혁 대상으로 몰린 검찰이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기 위한 한탕주의, 골목상권 침해 논란의 단골 주역인 CJ에 대한 수사를 통한 재벌 길들이기 등 갖가지 분석이 흘러나온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상속재산을 둘러싸고 CJ와 치열한 골육상쟁을 벌이는 삼성 배후설까지 나돈다.
삼성 비자금 사건 수사와도 180도 딴판
CJ 비자금 수사의 실무 책임자는 서울중앙지검의 윤대진 특수2부장이다. 공교롭게 윤 부장검사는 7년 전 대검 중수1과에서 변양호 사건을 담당한 주임검사였다. 또 채동욱 현 검찰총장은 당시 중수부의 핵심인 수사기획관이었다. 이것을 단순히 우연으로만 봐야 할까?
검찰의 CJ 비자금 수사는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 수사와도 180도 딴판이다. 검찰의 전광석화 같은 수사 진행 상황은 언론을 통해 연일 생중계되고 있다. 아직 기소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고 재판도 열리지 않았는데, CJ는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혔다. 검찰 출입 기자들은 검찰이 언론에 수사 상황을 흘려주기 전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명백한 피의사실공표죄에 해당한다.
삼성 특검은 수사팀 구성 이후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형식적으로 이건희 회장의 자택 등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로 관리해온 4조여원의 비자금도 선대 회장에게서 물려받은 상속재산으로 인정해 사실상 면죄부를 주었다. 만약 검찰이 지금 CJ에 하는 것처럼 삼성을 철저히 수사하고 엄정하게 법 적용을 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검찰이 눈앞의 도둑을 안 잡는 것도 ‘반(反)법치’이지만, 검찰이 제 입맛에 따라 도둑을 잡는 것도 명백한 ‘반법치’다.
6월 국회에서 처리해야 할 경제민주화 법안 중에는 배임·횡령 등의 범죄를 저지른 재벌 총수 등을 집행유예로 풀어주는 ‘봐주기 판결’을 막기 위한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검찰 수사 단계부터 ‘법의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바로잡지 않고는 법치주의를 제대로 구현할 수 없다. 법원과 검찰의 재벌 봐주기로 인한 법치주의 훼손은 경제에도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검찰과 법원이 경제적 강자들의 부당한 횡포나 법 위반 행위를 눈감아주는 것이 바로 남양유업 사태와 같은 갑을 문제를 온존시키는 결정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재현 CJ 회장은 지난 6월3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전자우편에서 “이번 사건으로 직원들의 자부심에 상처를 준 데 깊이 사죄한다”면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책임질 것”이라고 밝혔다. 사실 이재현 회장과 CJ의 행태는 검찰 못지않게 이해하기 힘들다. 5년 전 수많은 차명계좌와 수천억원의 비자금이 드러나 거액의 세금까지 추징당하고도, 지금까지 차명계좌를 정리하지 않고 비자금을 은닉해왔다면 제정신이라고 할 수 없다. 검찰이 한번 봐주었으니 설마 다시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면 너무 순진하지 않은가?
검찰의 봐주기 수사 막기 위한 제도 필요검찰의 CJ 비자금 수사는 단순히 이재현 회장 일가의 탈세 여부를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검찰이 수년간 제대로 수사하지 않은 이유와 그 과정에서 권력의 외압이나 재벌과의 유착 여부도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불법을 저지른 재벌 총수에 대한 사법부의 봐주기 판결뿐만 아니라 검찰의 봐주기 수사도 막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 재벌과 함께 검찰이 변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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