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김승연 없는 한화 어디로 갈 것인가



앞으로 상당 기간 경영 복귀 힘들 것이라 예상되는 한화 김승연 회장
아들과 아내의 대리 경영으로 갈지, 전문 경영인 도입할지 기로에 서
등록 2013-05-24 21:13 수정 2020-05-03 04:27

한화는 지난해 10월 창립 60주년을 맞았다. 하지만 행사는 없었다. 총수인 김승연 회장이 배임죄로 실형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집안에서도 가장에게 우환이 있으면 잔치를 미루는 일이 종종 있다. 더욱이 총수 1인 체제인 재벌그룹에서야. 김 회장의 재판 과정에서도 “회장은 신의 경지이고 절대적인 충성의 대상”이라는 한화 내부 문건이 공개돼 화제가 된 적이 있다.

2011년 5월 한화 인재경영원에서 열린 한화그룹 핵심가치 선포식에서 김승연 회장(왼쪽)과 김동관 차장(현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이 함께 터치 버튼을 누르고 있다. 한화그룹 제공

2011년 5월 한화 인재경영원에서 열린 한화그룹 핵심가치 선포식에서 김승연 회장(왼쪽)과 김동관 차장(현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이 함께 터치 버튼을 누르고 있다. 한화그룹 제공

아들 김동관씨의 역할 부각돼

한화는 지난 4월 말 2013년 임원 인사를 단행했다. 예전에 연말·연초에 하던 것에 비하면 몇 달이 늦어진 것이다. 이 역시 최종 인사권자인 김승연 회장의 공백 때문이다. 김 회장은 지난 1월 건강 악화로 구속집행정지 결정을 받고 서울대병원에 입원 중이다. 한화의 한 관계자는 “온종일 병상에 누워 눈을 감고 있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업무를 볼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한화는 인사 지연으로 업무 차질이 적지 않았다. 승진해야 할 사람, 회사를 떠나야 할 사람, 자리를 옮겨야 할 사람이 모두 대기 상태였으니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힐 리 없다. 하지만 인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단행한 것이다.

한화는 지난해 77억달러 규모의 이라크 신도시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라크가 계획하고 있는 발전소, 정유시설, 병원 등 100억달러의 추가 공사 수주에도 한화가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는 분석이 많았다. 하지만 김 회장의 실형 선고는 다 된 밥에 코 빠뜨린 격이 됐다. 이라크의 권력 핵심에서는 이런 사람을 믿고 어떻게 대형 공사를 맡기겠느냐는 지적까지 나왔다고 한다.

김 회장의 경영 공백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83년 불법 외화유출 사건, 2007년 술집 종업원 보복폭행 사건 때도 구속된 전력이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백기가 3~4개월에 불과했지만, 이번에는 지난해 8월 이후 9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김 회장의 형기는 항소심에서 4년에서 3년으로 줄었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전 정부 때와 달리 재벌 총수에 대한 사면·복권에 신중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김 회장이 3년은 아니더라도 앞으로 상당 기간 경영 복귀가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재벌그룹 최초 ‘수렴청정’ 가능성

태양이 지고 나면, 달과 별이 만물을 비추는 게 세상의 이치다. 김 회장이 없는 한화에서는 큰아들 김동관 한화솔라원 기획실장의 역할이 부각되고 있다. 김 실장은 이전에도 그룹 안에서 황태자로 여겨졌지만, 부친의 공백 이후에 더 큰 힘이 실리고 있다. 그룹의 핵심 투자나 경영진 인사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김 실장은 미국의 명문 하버드대를 졸업했다. 평소 김 회장은 이를 큰 자랑거리로 삼았다(김 회장은 명문 경기고를 졸업했지만 공부를 잘해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1983년생인 김 실장의 나이는 올해로 만 30살이다. 회사 일을 시작한 지도 불과 3년이 지났을 뿐이다. 본격적으로 경영을 한다기보다는 아직 경영 수업을 받아야 할 상황이다. 원석이 아무리 뛰어나도 잘 갈고닦아야 보석이 되는 법이다. 김 실장의 패기와 총명함 등 잠재력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 능력을 발휘하려면 연륜이 더해져야 한다. 이미 한화 내부에서는 김 실장의 경영 실패 사례가 임직원들의 입길에 오르내린다. 김 실장이 주도한 태양광사업이 죽을 쑤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광에 대해서는 김승연 회장도 걱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들이 말을 듣지 않자 주변 지인들에게 설득을 부탁했을 정도다. 하지만 한번 필이 꽂힌 김 실장은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김 실장과 함께 주목받는 사람은 김 회장의 아내 서영민씨다. 그룹 안에서는 ‘SM’(사모님)으로 불린다. 김 회장은 평소 사석에서 “아들(김동관 실장)의 머리는 나보다 아내를 닮은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한다. SM은 서울대 약대 출신의 재원으로 알려진다. 계열 광고사인 한컴의 디자인사업부는 사실상 그가 관장하는 곳이다. 한화그룹의 광고·디자인 분야는 SM의 승인을 받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한화는 지난해 가을 그룹 광고 제작을 계열사인 한컴에 맡기지 않고 처음으로 경쟁 시스템을 도입해 추진했다. 하지만 제일기획과 이노션 등 외부 광고사들은 반신반의했다. 한화가 괜히 들러리를 세우는 것 아니냐는 거였다. 하지만 SM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증하자 참여했다고 한다. SM은 계열사가 새로 매장을 낼 경우 개관 전에 미리 가서 꼼꼼히 살펴보고 시정 사항을 지적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SM의 경영 참여는 이미 김 회장의 공백 이전부터 시작됐으니, 김 회장의 용인을 받은 셈이다. 최근 그의 영향력이 더욱 커졌다. 아들이 아직 어리다보니 김 회장의 공백이 장기화할 경우 사실상 재벌그룹 최초로 ‘수렴청정’이 이뤄질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하지만 아직 어린 아들과, 역시 경영 경험이 적은 부인이 김승연 회장의 공백을 대신할 수는 없다. 혹자는 김승연 회장도 29살의 어린 나이에 회장에 올랐으니, 아들도 못할 게 없다는 말도 한다. 김 회장은 선친 김종희 회장(창업자)의 갑작스런 작고로 젊어서 경영권을 이어받은 뒤, 한화를 성공적으로 키웠다. 지난 30년간 한화의 매출은 1조1천억원에서 35조원으로 35배 늘어났다. 계열사 수는 19개에서 49개로 2.6배가 됐다. 당기순이익은 61억원에서 1조3천억원으로 210배 늘어났다. 건강이 좋은 편이 아닌 김 회장은 평소 아들에게 경영권을 빨리 넘겨주고 싶다는 의중을 사석에서 밝혔다. 그러나 30년 전과 지금은 격세지감이다. 당장은 큰 수익이 나는 사업도 10년 뒤에는 사라질지 모를 정도로 글로벌 경쟁이 치열하다. 또 30년 전에는 최각규 전 경제부총리 등과 같은 원로들이 뒤에 있었다.

‘강소기업의 대명사’로 불리는 독일의 히든챔피언 중에는 가족 소유 기업이 많다. 히든챔피언 중에서 역사가 100년 이상 된 기업은 대개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다. 창업자 가족 간의 이해관계 조정이 쉽지 않고, 후손의 경영 능력도 갈수록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자 가족은 일정 세대가 지나면 기업의 존속과 발전을 위해 능력 있는 외부 전문경영인을 수혈하고, 자신들은 경영에서 손을 떼는 지혜를 발휘했다. 이런 합리적 대안을 찾지 못한 기업은 결국 오래 못 가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임시 기구로 꾸린 전문경영인 비경위

한화는 지난 30여 년간 김승연 회장 한 사람에게 권한이 집중된 중앙집권식 경영 시스템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꼭대기 자리가 비는 공백 상태가 빚어지면서 혼선의 위험성이 커지고 있다. 단적으로 지난 4월 임원 인사에서도 후유증이 컸다. 인사위원회를 통과한 인사안이 발표를 앞두고 합리적 이유 없이 갑자기 뒤바뀌는 유례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 4월 뒤늦게 전문경영인들로 비상경영위원회가 구성됐지만 말 그대로 임시 기구일 뿐이다.

김승연 회장이 없는 한화는 이제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합리적 대안을 찾아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할 것인지, 아니면 위험을 자초할 것인지.

한겨레 경제부 선임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