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누구냐고요? 파절이가 될 때까지 농사짓는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파절이’라 부르는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있다. 한창 파릇파릇한 나이에 왜 축 처진 파절이라 부르냐고 했더니 사실 ‘파릇한 절므이(젊은이)’의 준말이란다. “그런데 이름을 잘못 지었는지 몸이 파김치가 될 때까지 일해요!” 불만을 토로하는 이는 파절이 대표 나혜란(26)씨다. 파절이는 2011년 12월 결성돼 도시 텃밭에서 재배한 채소를 자전거에 싣고 서울 홍익대 인근 레스토랑과 카페에 제공하는 청년들의 모임이다. 꾸려진 지 갓 1년 된 모임이지만 지난해 누구보다 활발히 활동했다. 도시 농부들의 장터에 참가하고, 토론회를 열고, 파절이를 응원하는 이들과 포틀럭 파티를 열고, 의 저자 리처드 레이놀즈와의 만남을 주최하고, 홍대 앞 한 카페 안에 작은 채소가게를 열고, 제철 작물을 활용한 레시피를 개발해 페이스북을 통해 정보를 제공하는 등 열정적으로 움직여왔다.
“지난해 여름 처음 잎채소를 팔아 돈을 받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가 했던 ‘뻘짓’들이 머릿속에서 지나가는데…. 늘 생각하거든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반나절을 이렇게 허리 굽혀 일해도 밥값도 안 나오겠지? 그러면서도 밭을 일구고 수확을 해요. 기분이 정말 묘했어요. 엄청 좋으면서도 그렇게 제 손을 떠나고 나니 허무하기도 하고. 이제까지 제가 해왔던 일과는 만끽하는 스릴이 다르고 감정의 깊이도 달랐어요. 이 경험을 다른 파절이 멤버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손끝에서 발끝까지, 뼛속까지 느꼈던, 머리가 아닌 몸으로 이해한 소중한 경험을요.”
파절이 활동 1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물으니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나혜란씨에게 지난 1년은 폭풍과 같았다.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가장 변화가 많은 시기였다. 대학에서 광고디자인을 전공하고 환경 문제를 고민하며 환경연합에서 1년8개월간 일했고 지난해 파절이를 꾸렸고 내년에는 1년 휴직계를 내고 본격 도시농업에 몰두하기로 했다. 함께 대학을 졸업한 친구들과 다른 길을 선택했지만 자신의 활동이 디자인과 무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광고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해서 광고나 편집 디자이너의 길을 걸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박원순 서울시장이 ‘소셜 디자인’이라는 것을 제안하잖아요. 듣고는 그게 뭐지? 내가 이때까지 배웠던 상업적인 디자인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건데 무엇일까? 궁금해서 공부를 했죠. 저는 소셜 디자인의 테마를 환경으로 하고 싶었어요. 알맹이를 배워야겠다 생각했어요. 환경연합에서 일하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환경 문제와 관련해 다양한 경험을 했어요. 개발에 속수무책인 이 땅을 보고 여러 가지 고민이 들었어요.”
‘니네 집 지렁이는 잘 지내니?’
대학 때 롤모델이 영화 의 편집장 미란다(메릴 스트리프)였다는 나씨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꾸미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고 사회에 나가면 “시크하고 카리스마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대학 때 알던 친구들이 자신의 수수한 차림과 바뀐 생각이나 태도에 깜짝 놀란다고 한다. “내가 잘 실천할 수 있는 것, 사람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어요. 그때 답이라고 여긴 것이 농사였어요. 도시를 떠나지 않고 어떻게 농사를 잘 지을 수 있을까. 마침 도시 텃밭 운동이 활발해졌어요. 텃밭 활동을 하는 대학 모임에 공지를 띄우고, 주변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을 알음알음 모으기 시작했죠.”
그렇게 시작한 것이 한강대교 아래 노들섬의 231m²(약 70평) 남짓한 땅에서 시작한 농사와 서울 종로구 누하동 환경연합 마당과 옥상, 베란다에 펼친 상자텃밭이다. 텃밭에는 로즈메리·세이지·오레가노 등 허브와 상추·쑥갓·케일·치커리·시금치 등 잎채소, 오이·토마토·호박 같은 열매채소를 비롯해 감자·고구마·비트·무 등 뿌리채소까지 다양한 작물을 심고 길렀다. 첫 농사다 보니 우여곡절도 많았다. 노들텃밭의 흙이 소금기가 많아 봄 농사가 매우 힘들었단다. 그런데 한 번 식물을 키우고 나니 가을 농사는 확실히 잘됐다. “우리끼리 봄 농사는 1학기, 가을 농사는 2학기라고 불러요. 2학기에는 작물의 품질이 달라졌어요. 워낙 정성을 많이 쏟기도 했죠. 퇴비는 다 유기농을 쓰고, 지렁이를 키워서 분변토 주고, 커피 찌꺼기 말려서 이불처럼 덮어주고. 농사에 집중하다 보니 우리끼리 대화가 ‘니네 집 지렁이는 잘 지내니? 우리 집 지렁이는 새끼를 쳤어’ 이러기도 하고요. (웃음)”
멤버 중 한 명이 홍대 앞 한 오가닉 카페 대표와 알고 지냈는데, 마침 유기농업·도시농업에 관심이 많았던 대표가 자기 가게에 납품을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물꼬를 터 지금은 밥집, 빵집, 아이스크림 가게에 납품을 한다. 채소를 키우고 가게에 제공하는 일 외에 다양한 ‘꿍꿍이’를 기획한다. 파절이 멤버가 아니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 ‘Be파절이데이’를 열고 밭일을 돕고 싶은 사람, 같이 농업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보통 도시 텃밭을 일구는 사람들은 직접 기르고 자기가 소비하는데, 우리는 생산·유통·소비하는 로컬 푸드의 전 과정을 직접 해봤다는 데 뿌듯함을 느껴요. 그래서 저희 스스로 농부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코디네이터라고 생각해요. 농사란 하나의 놀이이기도 해요. 도시에 일군 텃밭에서 사람들이 재미를 많이 얻어가면 좋겠어요. 그래서 한창 바쁠 때는 땡볕에 나가 일하면서도 기획이나 행사에 시간을 투자해야 해서 힘들었어요. 농사와 엮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많이 만들고 싶어요.”
텃밭 생산물로 요리 만들 예약제 식당 계획
“꽂히면 뒤도 안 보고 쫓아가는 스타일”이라는 나씨는 지금 꽂힌 세 가지가 소셜 디자인, 환경, 협동조합이란다. 지금 하는 활동들이 연결된 하나의 과정이라고 설명하는 그는 농사를 통해 커뮤니티를 회복하고, 커뮤니티를 꾸린 사람들이 지역의 환경과 관련한 여러 활동의 주체가 되면 좋겠다고 했다.
내년에는 지하철 6호선 광흥창역 근처 옥상을 기부받아 옥상 텃밭을 일구기로 했다. 흙을 올리고 울타리 치는 작업을 업체에 의뢰했더니 2천만~3천만원쯤 견적을 내줬단다. 엄두도 안 나고 자신들이 하는 활동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흙을 얹을 수 있는 만큼만 얹어 정원과 텃밭을 꾸미고, ‘원테이블 레스토랑’을 기획해 텃밭에서 난 생산물로 만든 요리를 제공하는 예약제 식당을 차릴 계획이란다. 농한기지만 내년을 기약하며 매일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내느라 더 바쁘다는 나씨는 이렇게 말했다. “‘농부로부터’를 운영하는 쌈지 농부 대표가 ‘농사는 예술이다’라고 말했거든요. 맞아요. 농업은 또 다른 차원의 예술이에요.”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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