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리틀 이건희’ 이부진, 그가 닮지 말아야 할 것

사회책임 이행 선택의 갈림길에 선 삼성가 3세대…노조인정·공정거래·준법경영 없이는 삼성의 미래도 없다
등록 2011-07-29 14:23 수정 2020-05-03 04:26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하려고 김포공항 출국장을 찾았다. 그의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삼성전자 제공

이건희 삼성 회장이 지난 6월 일본을 방문하려고 김포공항 출국장을 찾았다. 그의 뒤로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의 모습이 보인다. 삼성전자 제공

“1등만 살아남는다.”
삼성전자 경기도 수원 사업장에서 지난 7월18일부터 ‘선진제품 비교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7월29일까지 계속되는 이번 전시회는 삼성 제품과 해외 제품을 비교하는 행사다. 4년 만에 참석하는 이건희 삼성 회장이 경쟁력이 낮은 제품에 대해 강도 높은 질책을 쏟아낼 것이라는 관측 때문에 임직원들은 초긴장 상태다. 이번 행사를 ‘부정·비리 뿌리뽑기’에서 ‘품질경영 강화’로 이어지는 이 회장의 친정체제 가속화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많다. 일부에선 ‘제2의 신경영’ 선언 가능성을 점치기도 한다.

이 회장은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삼성 임원들을 불러놓고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모두 바꾸라”며 ‘신경영’을 선언했다. 삼성전자 구미공장에서는 통화 품질이 불량한 휴대전화 단말기 수십만 대를 불태우는 화형식까지 벌였다. 삼성의 한 최고경영자는 갑작스러운 신경영 추진은 무리라고 이의를 제기했다가, 이 회장의 격노를 사서 전격 경질되기도 했다. 이 회장의 신경영은 경쟁력의 핵심을 기존의 양(규모·가격)에서 질(품질)로 바꾸는 전환점이 됐다. 또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됐다.

품질에만 머물러 있는 이건희식 신경영

기업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 소비자의 최우선 선택 기준은 가격에서 품질로 바뀐 데 이어, 이제는 3단계인 사회책임 이행으로 빠르게 옮아가고 있다. 사회책임의 국제표준인 ISO 26000 제정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의 마르틴 노이라이터 교수는 “유럽의 소비자들은 이미 제품 선택의 최우선 순위가 가격과 품질이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했느냐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기업이 인권·노동·환경·소비자·지역사회 등과 관련된 사회책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아무리 값싸고 질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해도 소비자가 외면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삼성의 신경영은 2단계인 품질에 계속 머물 게 아니라, 3단계인 사회책임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지난 6월 말, 삼성전자 반도체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으로 사망한 노동자에게 산업재해를 인정하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삼성 안에서는 이를 계기로 “(백혈병) 책임을 인정하고 문제를 털고 가자”는 의견이 제기됐다. 삼성으로서는 설령 억울한 점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게 오히려 부담을 줄이는 길이라는 취지였다. 하지만 삼성은 최근 노동자들의 백혈병 발병이 반도체 생산과는 무관하다는 자체 연구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종전 태도를 고수했다. 삼성의 한 고위 임원은 “고양이(이건희) 목에 방울 달기인데, 누가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또 중소 협력사들에 불공정 하도급거래를 한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다.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는 한 협력사 사장은 “정부가 동반성장 정책을 펴고 대기업은 상생경영을 강조하지만, 실제 바뀐 것은 없다”고 털어놨다. 이건희 회장이 임직원의 평가 기준을 단기수익 대신 사회책임(협력사와의 동반성장) 우선으로 바꾸는 결단을 내려야 근본 변화가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구체제 깨지 못하는 이부진식 경영

재벌 체제에서 오너의 한계를 전문경영인이 돌파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대신 오너의 세대 교체는 구체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비전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계기가 된다. 18년 전 이건희 회장이 양 위주의 경영 패러다임을 질 위주로 전환한 것과 마찬가지다. 마침 삼성은 지금 3세 경영 체제로 전환 중이다.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인 재용씨는 지난해 말 삼성전자 사장으로 승진했다. 맏딸인 부진씨는 두 단계나 파격적으로 승진해 호텔신라와 삼성에버랜드 사장, 삼성물산 고문을 겸하게 됐다. 특히 부진씨는 최고운영책임자(COO)라는 직함만 그럴싸한 오빠와 달리, 대표이사로서 명실상부하게 최고경영자의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감수하는 도전 정신을 보였다.

아버지의 외모와 성격을 빼닮아 ‘리틀 이건희’로 불리는 부진씨는 ‘온실 속 화초’ 이미지인 오빠와는 정반대로 ‘지독하다’ ‘집요하다’는 평을 듣는다. 업계 맞수인 롯데와의 혈투 속에 지난해 말 인천공항 신라면세점에 명품 브랜드인 루이뷔통을 세계 최초로 유치하는 데 성공해 강한 추진력과 승부 근성을 보여주었다. 지난해 2월에는 에버랜드의 비전을 발표하며, 2조원도 안 되는 매출을 2020년까지 8조원으로 끌어올리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호텔신라의 경우도 지난해 말 부임할 때 ‘성장과 혁신’을 화두로 내건 데 이어 7월 초에 ‘2020 비전 선포식’을 가졌다. 삼성그룹의 한 임원은 “평소 삼성에 비판적인 것으로 알려진 도올 김용옥 교수의 아들 결혼식이 지난 5월 호텔신라에서 열렸을 때, 이 사장이 행사가 끝날 때까지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켜 모두들 깜짝 놀랐다”며 그녀의 집요함에 혀를 내둘렀다.

이부진 사장이 지휘봉을 잡은 호텔신라와 에버랜드의 사회책임 성적표는 어떤가? 호텔신라 면세점은 최근 공정위로부터 현장 조사를 받았다. 2007년 하반기 한 중소기업과 구두로 납품계약을 맺어놓고 몇 달 뒤 합리적 이유 없이 일방적으로 거래 중단을 통보해, 불공정거래 혐의로 제재를 받게 됐다. 또 에버랜드는 급식사업을 하면서 경쟁업체를 폄하하는 자료를 만들어 배포했다가 부당한 고객유인행위 혐의로 지난 6월 말 시정 명령을 받았다.

복수노조 설립에 해고 칼질…시험대에 오른 에버랜드

최근에는 복수노조 소용돌이의 한복판에 놓여 있다. 지난 7월13일 에버랜드 직원 4명이 삼성노조를 설립한 뒤 18일 신고필증을 받음으로써, 무노조경영을 고수하는 삼성에 자주노조 시대가 처음으로 열렸다. 하지만 지난 6월 말 또 다른 에버랜드노조가 비밀리에 설립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고, 회사 쪽이 7월18일 자주노조 설립을 주도한 부위원장을 징계 해고함으로써 노조 탄압 시비가 재연되고 있다. 삼성은 노조 탄압이 아니라며 억울함을 주장한다. 하지만 삼성중공업(1987)·에스원(2000)·캐피탈(2001)·플라자(2003)·SDI(1997~2004) 등에서 벌어진 유령노조 시비와 회사의 회유·협박·미행·납치·감금·폭행·징계 등으로 얼룩진 과거사를 기억하는 국민으로서는 의혹을 떨치기 어렵다.

중소기업과의 공정거래, 준법경영, 노동자 권리 보호는 기업의 사회책임에서 핵심이다. 에버랜드 문제는 전문경영인인 최주현 사장의 책임이라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오너가 전문경영인의 그늘 뒤에 숨는 것은 당당하지 못하다. 삼성의 창업자인 이병철 회장은 생전에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노조는 안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법으로 복수노조를 보장하는 시대가 됐다. 삼성의 영향력이 아무리 커도 사회적 합의의 산물인 법과 제도의 변화를 정면으로 거스르며 계속 갈 수는 없다.

15년 전인 1995년 삼성전자 독일지사가 독일 직원들의 종업원평의회(노동자 대표조직) 결성을 막고, 관련 노동자들을 해고했다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된 것은 물론 언론에도 보도돼 국제적 망신을 산 일이 있다. 지금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아예 회사 문을 닫아야 할지 모른다. 이미 유럽에서는 삼성이 계속 무노조를 고집하면 머지않아 소비자나 비정부기구(NGO)들의 불매운동에 직면할 위험이 높다는 경고가 늘고 있다. 삼성의 한 임원도 “시간이 걸리겠지만, 최고경영진들도 노사가 상생할 수 있는 새로운 노사관계로의 전환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상생 외면한 무노조 고집에 유럽서도 불매 경고음

결국 관건은 누가 구체제의 질곡을 깨는 ‘창조적 파괴’를 신속하게 주도할 것이냐다. 이부진 사장 등 삼성의 3세들은 아버지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책임이라는 제3의 신경영을 주도할 것인지, 아니면 과거 체제에 안주할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그 결정에 삼성 3세들의 미래도 걸려 있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