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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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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소유 재벌을 총수 일가가 꿀꺽?



개인 소유물이 아닌 경영권을 검증 없이 상속하는 재벌들…

소유-경영 분리한 재보험사 ‘코리안리’ 주목할 만
등록 2010-12-22 15:02 수정 2020-05-03 04:26

“입장 바꿔 생각해봐요. 곽 기자라면 자기가 키운 기업을 남에게 넘겨주고 싶겠어요?”
한 재벌그룹 회장에게 경영 세습에 대한 생각을 묻자 날카로운 반격이 날아왔다. 재벌 총수들은 기업에 대해 ‘내가 키운 것’이고, ‘내 소유’라는 의식이 확고하다. 따라서 ‘내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게 무슨 문제냐’고 주장한다. 그럴듯한 얘기다. 사유재산제도는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세금을 제대로 내고 불법적 용도로 쓰지 않는다면, 자기 재산을 어떻게 쓰든 각자의 재량이다.

기업을 정부 소유로 생각한 박정희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모습. 삼성전자 제공

2010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소비자가전전시회(CES)에 참석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부사장의 모습. 삼성전자 제공

문제는 기업이 총수가 멋대로 처분할 수 있는 개인 재산이냐는 점이다. 법률적으로 기업의 주인은 주주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올해 4월 지정한 53개 대기업집단(재벌)의 소유 현황을 보면 총수가 있는 35개 재벌의 총수 일가 지분율은 4.4%에 불과하다. 한 예로 재계 1위인 삼성은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분율이 0.99%에 그친다. 지분이 1%도 안 되는 이 회장 일가가 세계적 기업인 삼성의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장하성 고려대 경영대학장은 이를 두고 “이건희 회장은 오너가 아니라 전문경영인”이라고 말한다.

총수가 적은 지분만으로도 재벌을 지배하는 것은 계열사가 가진 지분 때문이다. 총수가 있는 35개 재벌의 계열사 지분은 평균 43.6%에 달한다. 총수 일가는 실제 소유권이 4%에 불과한데도, 계열사 지분을 더해 50%에 가까운 지배권을 행사하며 이른바 ‘황제경영’을 한다. 재벌 총수 일가의 소유권과 지배권 간의 큰 괴리는 재벌 소유지배구조의 아킬레스건이다. 프랑스·독일 등 유럽 국가들에도 한국처럼 대주주가 직접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유럽 기업의 대주주는 자신의 지분만큼 지배하기 때문에 소유-지배 간 괴리가 거의 없다.

재벌에 대한 총수 일가의 소유권을 원천적으로 부정하는 이들도 있다. 주요 재벌들은 대부분 창업한 지 50년을 넘었다. 삼성이 1938년에 창업됐고, 이어 현대와 LG가 1947년에, SK가 1953년에 각각 세워졌다. 하지만 그룹으로서 틀이 갖춰진 것은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기인 1960년대 후반 이후 1970년대까지다. 당시 정주영·이병철 등 창업자 세대는 특유의 기업가 정신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성공 신화를 만들었다. 정주영 회장은 생전에 김우중 대우 회장을 심하게 깎아내렸다. “나는 혼자 사업했는데 대우는 만날 정부의 도움을 받아 사업했다.” 하지만 4대 그룹의 최고경영자를 거쳐 장관까지 지낸 한 인사는 반문한다. “그럼 정 회장은 누구 돈으로 사업했지? 정부가 차관 들여와 돈 대주고, 땅 주고, 세금 깎아주고 해서 성장한 것 아닌가?” 정경유착에 의한 성장은 비단 현대와 대우만의 문제는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기업을 정부 소유라고 생각했다. 총수는 단지 정부를 대신해 기업을 관리하는 ‘마름’일 뿐이다. 그렇다면 정부 소유이던 재벌이 언제부터 총수 일가의 사유물로 바뀌었나? 그 인사는 “박 대통령의 죽음과 전두환 정권의 집권이라는 혼란기를 틈타 국가 재산이 개인 재산으로 탈바꿈한 것”이라고 말한다.

총수 일가의 경영 세습은 보유지분 상속과 경영권 상속으로 구분된다. 보유지분 상속은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한국 재벌은 1단계인 보유지분의 상속·증여에서조차 사회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자녀들에 대한 불법·편법적 상속·증여가 대표적 사례다. 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은 무죄판결이 내려졌지만 면죄부 논란이 끊이지 않고, 삼성SDS의 신주인수권부사채 헐값 발행은 유죄가 확정됐다.

경영권 상속은 지분 상속과는 전혀 별개다. 기업을 지배하고 경영할 수 있는 경영권은 사유물이 아니다. 더구나 후계자의 경영 능력에 대한 검증 없이 이뤄지는 경영 세습은 사회적 범죄다. 자격 없는 2세들의 경영 세습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1997년 경제위기 때 확인됐다. 30대 재벌 중 16개가 간판을 내린 ‘대마불사 붕괴’의 근저에는 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2세들의 무리한 차입 경영과 사업 다각화가 있었다.

경영능력은 유전되지 않아

능력에 대한 검증 없는 경영 세습의 위험성은 총수들 스스로도 잘 안다. 대다수 총수들이 죽을 때까지 경영에서 손을 떼지 못하는 이유 중에는 후계자에 대한 불안도 있다. 기자가 아는 한 재벌 총수는 이제 50대에 접어들었다. 부친인 창업주는 명예회장이다. ‘평소 부친을 자주 찾아뵙고 경영에 대한 가르침을 받느냐’고 물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지) 앞에 가면 깨지는 게 일인데, 왜 내가 스스로 찾아가 곤욕을 당합니까?” 창업자들이 장자 우선의 전통적 승계 방식을 깨는 것도 경영 세습의 위험성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택이다. 삼성 이병철 회장은 4남인 이건희 회장을, 정주영 회장은 5남인 정몽헌 회장을 후계자로 선정했다. 여러 자식 중에서 가장 역량이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아들을 택한 것이다. 이건희 회장 역시 아들인 이재용씨와 딸인 이부진씨 간에 경쟁 구도를 만들었다.

문제는 자식 중에 경영권을 물려줄 그릇이 아예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다. 대부분의 총수는 그런 경우에도 자식에게 경영권을 물려준다. 하지만 좀더 합리적인 대안을 찾는 이들도 있다. 소유-경영의 분리다. 대주주는 소유만 하고, 경영은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것이다. 소유-경영의 분리는 신속·과감한 의사결정과 단기 성과에 연연치 않고 미래를 내다보고 투자하는 오너 체제의 강점과 함께 전문성·합리성이라는 전문경영인 체제의 강점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소유-경영의 분리가 기업지배구조의 유일한 정답은 아니다. 오너 체제의 실패 사례만큼이나 성공 사례도 많다. 최근 일본 언론들은 한국 경제에 관한 특집 기사에서 오너 경영의 뛰어난 실행력과 스피드를 한국 기업의 강점으로 조명하고 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대주주가 경영 능력까지 겸비한 ‘오너=전문경영인 체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거대 재벌을 일군 창업 세대가 여기에 해당한다. 하지만 창업자의 2·3세에게도 이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경영 능력이라는 유전인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은 기업의 경영 환경과 총수의 경영 역량을 감안해 가장 적합한 경영 체제를 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재보험사인 코리안리는 흥미로운 연구 대상이다. 코리안리는 1997년 경제위기 때 대주주가 바뀐 이후 13년간 소유-경영 분리 체제로 운영 중이다. 대주주인 원혁희 회장은 이사회 의장을 맡고, 전문경영인인 박종원 사장이 실제 경영을 한다. 박 사장은 위기 탈출에 성공한 뒤 여세를 몰아 회사를 아시아 1위, 세계 13위의 재보험사로 키워낸 공으로 올해 5연임에 성공했다.

“효율적인 경영방식을 찾았을 뿐”

흥미로운 것은 원 회장이 소유-경영 분리를 자신의 경영 철학으로 내세우지 않는 점이다. “오너가 직접 경영을 하는 것보다 전문경영인에게 맡기는 게 회사를 위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만약 내가 (회사 인수 당시) 좀더 젊고 능력이 있었다면 직접 경영을 했을 것이다.” 원 회장의 장남은 대림산업에서 20년간 일하다 부장직을 끝으로 그만두고 지난여름부터 코리안리의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상무로 근무 중인 3남은 입사 동기들에 비해 승진에서 특혜를 받지 않았다. 이는 재벌 2·3세들의 초고속 승진이 일반화된 한국 풍토에서는 극히 이례적이다. 그렇다고 원 회장이 경영 세습에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이 능력이 된다면 경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되, 시간을 갖고 경영 능력을 검증할 것이다. 절대 서둘러서는 안 된다.” 원 회장은 소유-경영의 분리를 내세우지도, 경영 세습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신은 직접 경영을 하지 않고, 아들들에게도 성급하게 경영 세습을 하지 않는다.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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