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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환율 정책, 대기업엔 명약 서민에겐 쥐약?



대기업 수출에 이롭고 서민에게 불리한 정책 고수는 MB의 ‘신념’인가
등록 2010-08-26 15:58 수정 2020-05-03 04:26
정부가 환율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5월7일 외환은행 본점 모습. 한겨레 탁기형 기자

정부가 환율에 관여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5월7일 외환은행 본점 모습. 한겨레 탁기형 기자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가 지난 8월17일 한 강연에서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현재의 통화정책은 매우 완화적”이라고 밝혔다. 중앙은행 총재의 물가 걱정은 추가 금리 인상을 강하게 시사한다. 한은은 지난 7월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올린 바 있다. 추가 금리 인상으로 인한 이자 부담 증가는 경제회복의 혜택에서 소외되고 있는 대다수 서민이나 중소기업에는 이중고가 될 수 있다. 7월 이후 친서민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이명박 정부는 8월 말과 9월 초에 잇달아 대·중소기업 상생 대책과 서민물가 안정 종합대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하지만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등 야당과 시민사회단체는 반서민 고환율 정책부터 폐기하라고 요구한다.

 

<font color="#00847C">고금리 부담 줄이는 저환율 정책</font>

고환율 정책 폐기론은 환율 하락(원화가치 상승)의 긍정적 효과에 주목한다. 일반적으로 환율이 하락하면 수입품 가격이 떨어져 국내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된다. 이는 물가 불안으로 인한 금리 인상 부담을 완화한다. 또 수입 물가 하락은 내수를 촉진해, 성장률을 높이고 일자리를 늘린다. 경제개혁연대 김상조 소장은 “환율이 낮아지면 수입 물가 하락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이 유리하고 물가 상승 압력에 따른 금리 인상 부담도 줄어든다”고 말했다.

반면 고환율 정책의 가장 큰 명분은 수출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수출기업으로서는 가만히 앉아서도 가격경쟁력이 높아진다. 예를 들어 120만원짜리 텔레비전의 미국 수출 가격은 달러당 환율이 1200원일 때는 1천달러다. 하지만 환율이 달러당 1300원으로 올라가면, 수출가는 923달러로 낮아진다. 그만큼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높아져 판매와 이윤 증가로 이어진다.

하지만 고환율이 모든 기업에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고환율로 인해 고통받는 기업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대기업과 하도급 거래를 하는 중소기업에 환율 상승은 ‘쥐약’이다. 원자재를 수입해서 부품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는 중소기업은 환율이 오르면 원자재 수입 부담이 커진다. 원자재 가격 상승이 납품 단가에 반영되면 상관없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월적 지위에 있는 대기업은 중소기업의 납품 단가 인상 요청을 수용하는 대신 상시적으로 단가 인하 압력을 가하는 것이 관행이기 때문이다.

대기업도 업종에 따라 환율 효과에 차이가 있다. 고환율 정책의 최대 수혜 업종으로는 부품의 국산화율이 높은 자동차가 꼽힌다. 국내 완성차업체들은 엔고(엔화가치 강세)까지 겹쳐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격이다. 몇 년 전 엔저(엔화가치 약세) 때에는 일본 도요타의 중형차 모델인 캠리의 가격이 쏘나타보다 낮아져, 현대차가 울상을 짓던 적이 있다. 하지만 요즘은 거꾸로다. 한 완성차업체의 임원은 “올 들어 분기마다 사상 최대 실적을 경신하고 있는데, 그 공의 상당 부분은 고환율 덕분”이라고 말했다. 반면 삼성전자, LG전자 등 정보기술(IT) 업체들은 고환율 정책의 혜택이 별로라고 말한다. 수입의존도가 높아, 환율이 오를수록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다.

정부는 고환율 정책 자체를 부인한다. 김이태 기획재정부 외자과장은 “환율은 시장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급격한 환율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세 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한다. 반면 외환시장 관계자들은 정부에 고환율 정책은 일종의 신념인 것 같다고 말한다. 이명박 정부의 경제 분야 실세인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2008년 취임 초 “환율을 온전히 시장에 맡기는 나라는 없다”며 고환율 정책을 공개 천명했다. 이후 정부가 대놓고 말한 적은 없지만 고환율 정책 기조가 바뀐 적은 없다. 정부가 외환정책과 관련해 보여주는 이중성은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국제통화기금 167개 회원국 중에서 외환시장 개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했다.

8월 이후 원화의 달러 대비 환율은 1100원 후반대에서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평균환율 1276원에 비하면 많이 떨어졌지만, 연초 주요 기관 예측치보다 높은 수준이다. 한 예로 삼성경제연구소는 하반기 평균환율을 1070원으로 전망했다. 이를 모두 정부의 개입 탓으로 돌리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정영식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5월 말 이후의 달러 강세는 기본적으로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안전자산(달러) 선호, 정부가 6월에 취한 외국은행 국내 지점들에 대한 외환거래 규제 강화, 천안함 사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font color="#C21A8D">“무림 고수도 관군을 이길 수 없다”</font>

하지만 외환시장에서는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의 영향이 여전히 강력하다고 말한다. 환율의 급격한 변동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환율이 많이 떨어질 때마다 수시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의 한 재무담당 임원은 “정부가 환율 하락을 막기 위해 ‘달러 사재기’를 하지 않아도, 언제든 그럴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만으로도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귀띔한다. “아무리 뛰어난 무림의 고수(외환시장 세력)도 관군(정부)을 이길 수 없다”는 게 외환시장의 속설이다. 오석태 SC제일은행 상무는 “당국은 전세계 통화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일 때는 시장 개입을 자제하지만, 원화만 내려간다고 판단될 때는 시장에 개입하는 전략을 구사한다”고 분석했다.

외환 당국은 이명박 정부의 친서민 정책과 환율정책을 직접 연결짓는 것에 반대한다. 김이태 외자과장은 “환율과 같은 거시경제 정책을 친서민이냐 반서민이냐는 식으로 연결짓는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반대 논거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환율을 정부 입맛대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부가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작하면, 곧 환투기 세력의 공격만 자초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공공연한 비밀인 현실에서 설득력이 떨어진다.

현재의 환율은 실질 실효환율보다 높다. 실질 실효환율이란 이론적으로 경상수지가 균형을 이룰 수 있는 환율 수준이다. 전문가마다 의견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달러당 1100원 안팎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또 환율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경상수지나 성장률을 감안하더라도 현재의 원화는 저평가돼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올 들어 7월까지 경상수지 흑자는 233억달러로 정부의 연간 목표치를 이미 넘어섰다. 상반기 성장률도 7.6%로 1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정부가 내세우는 두 번째 이유는 환율을 내린다고 해서 서민에게 꼭 유리하냐는 것이다. 이 부분은 상당한 논쟁거리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환율이 5% 오르면 소비자물가가 0.29% 상승한다고 추정한다. 이는 물가 하락을 위해서는 환율 하락이 유리하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김이태 외자과장은 “환율이 내리면 수출이 부진해져, 수출의 성장 기여도가 높은 한국 경제의 특성상 성장률이 낮아지고, 이는 다시 일자리 축소로 이어져 서민의 어려움이 가중될 수 있다”고 말한다.

 

<font color="#008ABD">중립적 환율 연구 필요해</font>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고환율과 저환율 정책 중에서 어느 것이 국가 경제에 득이 되느냐를 판단하는 데는 종합적이고 실증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지금껏 불문율로 여겨져온 고환율 정책의 정당성이 크게 흔들리는 것은 경제위기 이후 양극화 심화 현상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소수 수출 대기업의 실적이 아무리 좋아도 그 과실이 나머지 국민에게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서민에게 불리한 고환율 정책을 굳이 고수할 필요가 있느냐는 비판론이 커진 것이다. 성장의 선순환 고리가 끊어진 데 따른 자업자득의 측면이 강하다. 이근 서울대 교수(경제학)도 “정부가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한다고 하면 먼저 고환율 정책부터 고쳐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쉽게도 환율정책의 영향을 종합적이고 균형감 있게 보여주는 연구 성과가 부족하다. 이는 환율 하락 때 기업들의 수익성이 악화된다는 보고서가 쏟아지는 현실과 대비된다. 이제는 정부가 고환율 정책을 맹목적으로 고수하기보다는 환율 수준이 전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더 종합적이고 중립적으로 검토해 방향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정부 안에서도 “환율 수준은 수출을 통한 적정 성장과 물가 안정이 조화를 이룰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린다. ‘무림의 고수’(외환시장 세력)가 ‘관군’(정부)을 이길 수 없지만, 관군도 천하의 대세(국가 경제의 큰 흐름)를 거스를 수 없다.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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