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맞수 기업 열전] 기회에 강하다, 위기에 능하다

도전정신으로 오뚝이처럼 일어선 현대건설, 기초체력 키워 사업구조 재편한 GS건설
등록 2009-02-27 18:03 수정 2020-05-03 04:25

“돌파구는 중동이다.”
정주영 현대건설 회장은 1975년 중역회의에서 “오일달러를 벌기 위해서는 중동으로 가야 한다”고 말한다. 정주영 회장은 오일쇼크라는 위기에서 기회를 찾으려 했다. 1973년 닥친 1차 오일쇼크로 배럴당 1달러 75센트 하던 원유값이 2년도 안 돼 10달러까지 치솟는다. 한국은 파산 직전의 상황에 직면한다. 현대건설도 울산에 조선소를 지으면서 자금 사정이 악화된 상황이었다.
“중동은 위험합니다. 지금 중동에는 세계 굴지의 선진 건설사들이 진을 치고 있어 우리가 발붙이기 쉽지 않습니다.” 당시 현대건설 해외담당 중역은 강력하게 반대한다. 그때만 해도 중동 건설시장에서 수주를 한 한국 건설회사는 대림건설 단 한 곳뿐이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현대건설이 시공한 싱가포르 선텍시티·쿠웨이트 해상 터미널 공사 현장. 타이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삼성동 힐스테이트(사진/ 현대건설 제공).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현대건설이 시공한 싱가포르 선텍시티·쿠웨이트 해상 터미널 공사 현장. 타이 파타니 나라티왓 고속도로·삼성동 힐스테이트(사진/ 현대건설 제공).

정 회장은 “이봐, 해봤어?”라고 말하며 중동 진출에 나선다. 아라비아의 태양처럼 우리나라 건설업계를 뜨겁게 달궜던 중동 신화의 시작은 이렇게 그의 도전정신에서 나왔다. 1976년 현대건설은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산업항 공사를 따낸다. 공사 기간(44개월)을 8개월 단축하는 조건이었다. 공사 금액은 9억3천만달러로, 그해 우리나라 예산의 25%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그 뒤 현대건설은 해외에서 각종 대형 공사를 수주하며 ‘건설명가’의 자리를 굳혀나간다.

소 판 돈 훔쳐 가출한 정주영

정 회장은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가출해 1946년 현대자동차공업을 차린다. 그러던 어느 날, 정 회장은 자동차를 수리한 값을 받으러 갔다가 자신은 일한 대가로 30만~40만원을 받는데 건설업자들은 1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받는 것을 보게 된다. 부러워하거나 시기하기보다 자신도 도전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정 회장의 결심에 동업자와 가족들은 한사코 반대했다. 건설업을 할 만한 돈도 없거니와 경험도 없다는 이유에서다. 정 회장은 예외 없이 “해봤어?”로 맞서며 건설사를 차린다. 1947년 세운 회사가 바로 현대토건이다. 그 뒤 현대자동차공업과 현대토건을 합쳐 1950년 현대건설을 설립했다.

정 회장이 30년 가까이 동고동락했던 이명박 대통령과는 1965년에 만난다. 그해 이명박 대통령은 현대건설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하지만 고려대에 다닐 때 학생운동을 하다 서대문형무소 생활을 했던 전력 때문에 면접시험 대상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학생운동의 순수성과 그 충정을 토로한 뒤, 사회 진출을 막는 당국의 처사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며칠 뒤 청와대에서 면접시험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20대 이사, 30대 사장, 40대 회장이라는 샐러리맨 사상 초유의 승진 기록을 달성한다.

GS건설은 후발업체였다. 1969년 설립한 락희개발이 모태다. 락희개발은 구인회 LG그룹 창업회장의 의지가 투영된 회사였다. 구 회장이 락희개발을 만든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북악산 뒤 부암동에 디즈니랜드와 같은 서울 시민을 위한 휴식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평소 부동산 투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구인회 회장은 의외로 부암동에 115만 평의 방대한 임야를 확보해놓는다. 또 하나는 당시 국내 최고 높이인 45층 사옥을 지을 생각이었다. 락희그룹은 사옥이 없어 계열사들이 여러 곳에서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GS건설은 1987년 서울 여의도에 LG트윈타워를 완공하면서 선대 회장의 못다 이룬 꿈을 실현하게 된다.

공란으로 남은 창업주 결재란

락희개발을 설립한 구 회장은 70년대를 맞기 하루 전인 1969년 12월31일 타계한다. 락희개발이 설립된 지 불과 보름도 안 된 뒤의 일이었다. 그해 12월12일에 기안된 ‘락희개발주식회사 설립’ 품의서 결재란에도 회장란은 빈 공간으로 남아 있다. 갑작스런 창업주의 타계로 GS건설은 한동안 서류상의 페이퍼컴퍼니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된 건 현대건설의 중동신화 때문이었다. 현대건설이 중동에서 막대한 달러를 벌어들이자 국내에서도 건설 붐이 일기 시작했다. GS건설도 해외건설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GS건설은 당시 국내 건설업계에서도 이렇다 할 경험을 갖고 있지 못했다. 충분한 사전 준비와 정보 입수도 없이 해외의 대형 건설공사에 뛰어들었다. 1985년 GS건설의 중동 수주 물량은 바로 전해에 견줘 38.3% 줄었고, 부채 비율은 777%까지 솟구쳤다. 당시 그룹의 기획조정실 감사팀이 감사에 나설 정도로 부실은 심각했다. 창사 이래 최대의 임원진 개편이 뒤따랐다. 공사 관리와 정보 입수 및 판단력 미숙에 대한 문책성 인사였다. GS건설은 기본으로 돌아가는 전략으로 사업 방향을 수정한다. 수익성에 초점을 맞춰 사업을 벌이고 환경 변화에 대한 예측 시스템을 강화한다. 이같은 전략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진가를 발휘한다.

새 천년을 맞으며 국내 건설사들은 건설경기 침체로 고난의 시절을 맞게 된다. 2000년 11월 초 100위권 안의 건설업체 가운데 38곳이 워크아웃·법정관리 및 청산 작업에 들어갔다. 업계 3위였던 대우건설도 워크아웃됐다. 업계 7위였던 동아건설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아파트 건설로 이름을 얻었던 우성건설은 청산됐다.

왼쪽 위 사진부터 GS건설이 준공한 터키의 투프라스 정유공장·서울 남대문로 GS건설 본사·반포 자이·자이 아파트 내부(사진/ GS건설 제공).

왼쪽 위 사진부터 GS건설이 준공한 터키의 투프라스 정유공장·서울 남대문로 GS건설 본사·반포 자이·자이 아파트 내부(사진/ GS건설 제공).

40여 년 동안 건설업계 부동의 1위를 고수하던 현대건설도 2000년 그룹 후계 구도를 둘러싼 ‘왕자의 난’으로 위기를 맞게 된다. 회사 신뢰도가 미끄러지기 시작했고 그해 7월 신용평가회사는 현대건설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했다. 차입금 규모가 5조4천억원으로 금융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차 부도를 냈다. 현대건설이 시장에서 퇴출되는 게 아니냐는 시각도 있었다. 자구책 마련으로 간신히 퇴출 보류 판정을 받았다. ‘부도 처리 뒤 법정관리’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났다. 결국 현대건설은 2001년 외환·산업·우리은행 등 채권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하지만 5년 만인 2006년 워크아웃에서 졸업하며 홀로서기에 성공하는 저력을 보인다.

그러는 사이, 2001년 3월21일 밤 10시 정주영 명예회장은 향년 87살을 일기로 타계한다. 어릴 적 가난이 싫어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 무작정 상경했던 그는, 1998년 6월 1001마리의 소떼를 몰고 방북하며 남북교류의 물꼬를 트기도 했다. 지난 2007년 대한상공회의소가 대학교수와 최고경영자(CEO)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기업가 정신 실태 및 존경받는 기업인’ 설문에서 가장 많은 34.1%가 ‘존경하는 기업인’으로 그를 꼽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 GS건설은 그저 그런 건설업체였다. 하지만 GS건설은 외환위기 이후 이어진 건설업계 불황기에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하며 위기를 기회로 바꿨다. 외환위기 전까지만 해도 GS건설의 건설공사는 그룹에서 발주하는 공사가 대부분이었다. 무엇보다 그룹 공사 중심에서 벗어나 업종을 다양화할 필요가 있었다. 단순 공정에 속하는 건축공사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술집약적인 플랜트 공사에 참여해야 한다는 목표를 설정했다.

앞서 1990년대 초 국내 대형 건설사들은 그룹의 엔지니어링 회사를 앞세워 해외 플랜트 사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동남아 지역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사업은 대부분 중단됐고 타격을 받은 국내 기업들은 엔지니어링 부문을 정리했다.

토목과 플랜트 부문서 비교우위

하지만 GS건설은 1999년 LG엔지니어링을 합병했다. 합병으로 동반 부실을 초래할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그럼에도 70%에 이르는 건축과 주택 사업 비중을 줄이고, 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의 전문 기술과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선 합병이 필요했다. GS건설은 금융위기 신호가 포착되자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현금을 최대한 확보해 초유의 위기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2000년 다른 건설사들이 경영난을 겪는 가운데 매출과 순이익을 20% 이상 늘렸다. 현재 GS건설은 수익 구조의 30% 이상을 플랜트 부문에서 달성할 정도로 사업 구조를 성공적으로 재편했다.

현대건설은 모두가 인정하는 ‘전통의 강호’다. GS건설은 이른바 ‘신흥 강호’다. 두 회사는 관록과 패기로 맞선다. 모두 주택에서 강하고, 해외시장 개척에 적극적이다. 현대건설은 토목에 강하고, GS건설은 플랜트에서 우위에 서 있다.

올해 현대건설은 건설업계 1위 자리를 되찾았다. 현대건설은 지난해 7조2700억원 매출에 48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려 건설업계 1위를 차지했다. 매출액 7조원 돌파는 국내 건설업체 가운데 처음이다. GS건설은 매출 6조8671억원에 영업이익 4768억원으로 대우건설을 제치고 2위로 올라섰다.




아파트 브랜드와 모델
이영애의 품격 vs 고소영의 자존

이영애·고소영(왼쪽부터)

이영애·고소영(왼쪽부터)

현대건설의 ‘힐스테이트’(Hillstate)는 2006년 첫선을 보인다. 아파트 브랜드를 만들지 않았던 현대건설이 2년여 동안 고심 끝에 내놓은 브랜드다. 현대건설은 건설업계에선 선두업체였지만 브랜드에선 후발업체였다.
현대건설은 ‘H’라는 알파벳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나라 경제를 부흥시킨 ‘현대’의 정통성을 현대건설이 잇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또 새 브랜드 출시 뒤에는 ‘H’로 시작하는 단어들을 명예(Honor), 열정(Hotness), 역사(History), 사람(Human)이라는 키워드와 연결시켰다. 이러한 키워드는 광고에서도 이어진다. 임권택 감독은 역사, 가수 윤도현은 열정, 헤드헌터 유순신은 휴먼, 작가 최인호는 명예를 상징하는 인물로 나온다.
현대건설은 새 브랜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모델을 누구로 쓰느냐가 문제였다. 웬만한 건설업체가 모두 TV광고를 하고 있는 터라 유명 연예인 가운데 인물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현대건설은 고소영을 선택했다. 고소영은 “당신의 ‘H’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그동안 아파트 빅 모델은 GS건설 ‘자이’의 이영애와 대우건설 ‘푸르지오’의 김남주가 양강체제를 이뤄왔다. 이영애는 2002년 9월부터, 김남주는 그해 10월부터 각각 자이와 푸르지오의 분신처럼 활동하고 있다. 둘은 공교롭게 1971년생 동갑내기다. 이들에게 지난해 도전장을 내민 사람이 바로 고소영인 셈이다.
이영애는 자이 모델로 세련된 도시 여성의 생활을 보여준다. GS건설의 아파트 브랜드 자이는 2002년 9월 태어났다. 자이의 영문자 ‘XI’는 ‘특별한 지성’(eXtra Intelligence)을 의미하는 영문 약자다. 품격 있고 세련된 느낌으로 남보다 한발 앞선 사람들이 선택하는 첨단 고급 아파트를 상징한다고 건설사 쪽은 말한다. GS건설은 이같은 브랜드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품격 있고 지적인 이미지의 광고모델을 찾다 이영애를 선택했다. 이영애의 강점은 신뢰다. 그가 모델로 활동해온 카드·전자제품·화장품 등은 미모도 중요하지만 신뢰도가 모델의 우선 조건으로 꼽히는 상품들이다. 이영애는 드라마 을 통해 한류 스타로 발돋움해 GS건설이 베트남 등 해외로 진출할 때 인지도를 높여주기도 했다.
건설회사들은 빅 모델에 집착한다. 브랜드 이미지가 아파트 분양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지적이면서 감성적인 빅 모델은 아파트의 주 소비층인 여성에게 “그 집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