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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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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기업 열전] 한류 타고 아시아로, 음반 띄워 빌보드로

이수만의 SM 문화 콘텐츠로 수익모델, 박진영의 JYP 음악의 기교로 정면승부
등록 2009-02-12 16:15 수정 2020-05-03 04:25

2009년 새해는 소녀시대의 (Gee) 신드롬으로 시작됐다. 1월 미니앨범 발매 뒤 4주 연속 가요차트 정상에 올랐다. 소녀시대는 스쿨룩을 선보였던 풋풋한 소녀에서 성숙미가 살짝 묻어나는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몸에 딱 붙는 스키니진에 몸매가 드러나는 티셔츠를 걸쳐 입었다. 평범한 아이템이지만 패션리더만이 소화할 수 있다는 진에 티셔츠다.

소녀시대와 원더걸스 신드롬

소녀시대는 ‘소녀들이 평정할 시대가 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 말처럼 그녀들은 10~20대는 물론 30~40대를 그들만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만들었다. 김은아 SM엔터테인먼트 팀장은 “소녀시대는 30~40대 시장을 핵심 타깃으로 삼고 있다. 30~40대가 대중문화의 소비 주체로 커지고 있었지만, 그들을 만족시켜주는 가수들은 없었다. 이젠 30~40대 아저씨나 아줌마가 ‘나는 소녀시대 팬’이라고 말한다 해서 민망해하거나 놀라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샤이니·슈퍼주니어·소녀시대·동방신기.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샤이니·슈퍼주니어·소녀시대·동방신기.

2007년 가을 (Tell Me)는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텔 미, 텔 미, 테테테테테 텔 미~”. 경쾌한 리듬과 중독성 강한 디스코풍 멜로디는 거리 어디에서나 흘러나왔다. 인터넷에선 ‘군인 텔 미’ ‘경찰 텔 미’ ‘고3 텔 미’가 잇따라 히트를 쳤다. 국민 모두가 평균 나이 17살의 깜찍한 다섯 소녀에게 매혹당한 해였다. 원더걸스는 그해 삼성경제연구소가 발표한 10대 히트상품으로 선정될 정도였다.

이듬해 원더걸스는 (Nobody)로 다시 다가왔다. 찰랑거리는 미니 원피스와 과장되게 부풀린 헤어스타일, 진한 마스카라와 속눈썹을 강조한 메이크업 차림이었다. 두현수 JYP엔터테인먼트 팀장은 “원더걸스의 기획 의도 중 하나가 바로 ‘역발상’이었다. 이렇다 할 걸밴드가 없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더 적기였다.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국내 걸밴드 시장에선 원더걸스가 블루오션이었다”고 말했다.

1990년대 S.E.S와 핑클이 그랬던 것처럼, 2000년대 소녀시대와 원더걸스는 여성그룹의 맞수다. 두 그룹은 친구 같고, 동생 같고, 가족 같은 이미지로 특정 세대나 집단을 넘어 다가오고 있다.

두 그룹 뒤엔 맞수기업이 있다. 소녀시대의 ‘성공시대’를 연 SM엔터테인먼트와 원더걸스의 ‘원더풀 신화’를 일궈낸 JYP엔터테인먼트가 바로 그들이다. 일단 두 회사는 닮았다. 대중음악계의 ‘미다스 손’으로 불리는 최고경영자(CEO)가 가수 출신으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점에서다.

이수만(57) SM엔터테인먼트그룹 회장은 71년 듀엣 ‘4월과 5월’로 데뷔한 뒤 가수 활동을 했다. 이 회장은 89년 SM기획에 이어 95년엔 SM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세웠다. 96년 발굴·기획한 H.O.T에서 S.E.S, 신화, 보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샤이니까지 그가 키워낸 아이돌 스타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국내 대중음악계를 주름잡았다. 박진영(37)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94년 데뷔한 뒤 를 히트시키며 가요계에 등장했다. 박 대표는 작곡과 가수 생활을 병행하며 연예활동을 해오다 99년 JYP엔터테인먼트를 설립했다. 월드스타가 된 비를 비롯해 진주, god, 박지윤 등을 발굴했다.

하지만 두 회사의 전략은 차이를 보인다. SM은 한류를 기반으로 한 현지화 전략이다. 일본에선 보아와 동방신기가 일본어로 된 음반을 발매하고 중국에선 한국인과 중국인 멤버로 구성된 슈퍼주니어-M이 활동하는 등 아시아 시장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펼치고 있다.

사실 SM은 ‘한류’(Korean Wave)라는 용어를 만든 주인공이다. 2000년 2월 H.O.T는 중국 베이징에서 단독 콘서트를 연다. 김은아 팀장은 “당시 중국 청소년들이 H.O.T 공연을 보기 위해 새벽부터 진을 치고, 가방에 태극기 배지를 달고 다닐 정도로 한국 열풍이 불었다. 그 뒤 중국 신문들도 따라서 ‘한류가 중국을 강타했다’고 보도하면서 한류라는 말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JYP 세계화 전략, SM은 현지화로

96년 H.O.T는 ‘10대들의 우상’(High-five Of Teenagers)이란 콘셉트를 들고 나왔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첫 그룹이다. 당시 청소년들은 팝보다 가요가 수준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다. H.O.T 이전까지 여자 중고생들의 방에는 외국 팝가수 사진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H.O.T의 등장으로 한국 가수가 여자 중고생들의 방 안 사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수만 SM 회장은 ‘컬처 퍼스트, 이코노미 넥스트’를 강조한다. 문화가 먼저 뜨면, 다음으로 경제적인 부가가치를 생산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동방신기가 아시아에서 성공하면서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젊은이들이 가장 가고 싶은 나라가 한국이 됐다. 이처럼 그 나라의 문화에 끌리게 되면, 애인과 사귈 때 삼성 휴대전화를 사고 결혼할 땐 LG 냉장고를 사는 식으로 자연스레 경제적 소비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왼쪽 위 두 사진은 2PM 공연장면, 아래는 원더걸스, 오른쪽은 JYP 본사 건물.

왼쪽 위 두 사진은 2PM 공연장면, 아래는 원더걸스, 오른쪽은 JYP 본사 건물.

반면 JYP는 한류를 벗어나려 한다. 박진영 대표는 지난 2007년 연세대에서 ‘한국 문화의 세계화’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한국 엔터테인먼트가 활동하게 될 영역은 아시아가 아니다. 나는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연예 상품들은 미국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 대표는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음악으로 아시아의 리더가 되겠다”는 포부도 밝혔다. 박 대표는 같은 해 미국 뉴욕 기반의 비즈니스 전문지 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처음으로 데모 CD를 보내기 시작했을 때 본명을 쓰지 않고 ‘JYP’라고 썼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아시아인인 것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지역색으로 나의 음악을 2류로 단정지을까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이 때문에 해외 진출을 두고서도 두 회사는 차이를 보인다. JYP는 미국에 좀더 초점을 두고, SM은 아시아와 미국을 동시에 겨냥한다. 박 대표가 미국 시장 문을 두드린 것은 2004년이었다. 로스앤젤레스 주택가의 방 한 칸에 세 들어 살면서 발로 뛰며 자신이 만든 음악을 들고 흑인음악의 거물들을 무작정 쫓아다녔다. 그런 밑바닥 생활 11개월 만에 마침내 윌 스미스의 음반에 자신의 곡을 수록시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는 이같은 정열을 바탕으로 비를 아시아의 스타를 넘어 월드스타로 성장시켰다.

SM은 다른 전략이다. 이 회장은 3년 연속 하버드대 경영학석사(MBA) 과정 학생을 대상으로 한류를 강의했다. 이 회장은 “최고의 스타는 최대 시장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시아 시장이 세계 일류 연예인의 중요한 산실이다. 중국이 미래의 할리우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SM은 미국 현지 법인인 SM USA를 통해 보아의 미국 활동을 진두지휘하며 할리우드와 아시아 엔터테인먼트 사업을 잇는 에이전시 사업도 추진 중이다.

콘텐츠 다각화-음반 프로듀싱 차별화

두 회사는 연예 콘텐츠 면에서도 약간 차이를 보인다. SM은 콘텐츠 다각화를 추구한다. 스타을 이용해 새로운 수익모델을 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유스’의 선두주자이기도 하다. SM은 사용자제작콘텐츠(UCC)로 신인들을 미리 홍보하고, 잡지에서 그들이 원하는 기사를 만들어내며, 팬들의 입맛에 맞는 음악과 영화를 제작한다. 슈퍼주니어는 데뷔 당시부터 멤버들이 가수와 연기자, 버라이어티쇼 출연 전문으로 역할을 나눠 쉴 새 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냈다. 춤·음악·외국어를 가르쳐 스타로 키워내는 아이돌 시스템도 눈에 띈다. 백댄서는 줄이 틀려도 동방신기는 칼같이 줄을 맞추며, 한국어를 쓰면 벌금을 매기는 외국어 교육을 받으며 스타로 커나갔다. SM은 음반과 매니지먼트는 물론 노래방·반주기 사업, 외식사업, 게임, 뮤지컬 등 문화 콘텐츠로도 사업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JYP의 목표는 그들이 키운 가수가 그들이 만든 곡으로 미국 빌보드차트 1위에 오르는 것이다. 박 대표는 음반 프로듀싱에 좀더 집중한다. 실제 그는 JYP의 모든 가수들의 곡을 쓰고 음반을 직접 프로듀싱했다. 특유의 리듬앤드블루스(R&B) 창법과 흑인음악 색깔을 입힌 대중적인 곡으로 그룹 god와 같은 가수를 길러냈다.

2008년 1월 재계 전문 사이트 재벌닷컴의 연예인 주식지분 평가에선, 코스닥 상장사 키이스트의 최대 주주인 배용준씨가 133억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SM의 최대 주주 이 회장은 69억원으로 2위였다. 비상장 부문에선 JYP의 대주주인 박 대표가 161억원으로 1위를 차지했다.

두 회사는 가능성을 가진 원석을 발굴·가공해 스타라는 보석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제 두 회사는 지구촌 사람들을 함께 뛰어놀게 만드는 스타를 찾고 있다.


스타가 되기까지
보아도 비도 지독한 연습벌레


보아 · 비

보아 · 비

가수 보아(왼쪽)는 ‘걸어다니는 1인 기업’이다. 보아가 한 해 음반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은 웬만한 중소기업을 뺨친다. 1년에 수백억원씩 번다. 이밖에 광고 출연과 콘서트, 방송 출연, 기념품 판매 등으로 벌어들이는 돈을 단순 합산할 경우 천문학적 금액이다.
보아는 초등학교 5학년 때 SM에 발탁됐다. SM 오디션을 보는 둘째오빠를 따라갔다 영입됐다. 그는 3년 동안 철저한 트레이닝을 받았다. SM 쪽은 스타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3가지를 든다. 철저한 준비와 현지화 전략, 본인의 노력이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본인의 노력을 꼽는다. 보아가 대표적이다. 철저한 준비는 하루에 5~10시간씩 이어지는 노래 연습과 춤 연습을 하는 것이다. 현지화 전략은 언어였다. 보아는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 아나운서 집에서 유학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본인의 노력을 보여주는 사례 하나. 스타를 꿈꿀 당시 보아의 집은 경기 남양주에 있었다. 보아는 학교를 마친 뒤 서울 방배동 연습실까지 2시간 넘게 시외버스와 전철을 번갈아 타며 왔다갔다 했다. 보아는 3년 동안 생활을 했지만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하지 않았다.
보아의 성공에는 일본 진출에 대한 철저한 사전 조사와 계획도 있었다. SM은 일본 댄스음악이 주로 10대 초반의 청소년에게 어필한다는 점에 착안해 10대 초반의 보아를 발굴해 일본을 공략했다. 아무로 나미에 이후 빈자리를 메울 대표적인 여성가수로 일본 대중음악계에 자리 잡았다. 보아는 천재이기도 하지만 대단한 노력파다. 지금도 노력한다.
지난해 JYP와 전속 계약이 만료돼 제이튠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며 독립한 비(본명 정지훈)도 수없는 좌절과 연습을 거치면서 스타가 됐다. 비는 “데뷔 전 18번 정도의 오디션을 봤는데 그때마다 노래와 춤은 인정했지만 얼굴에 대해 지적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비는 박진영 대표를 처음 만났을 때 “아, 이거다”라는 생각에 3시간 넘게 그 앞에서 춤을 췄다고 한다. 음반을 안 내줄까봐 술을 먹고 바다에 뛰어들어 못하는 수영을 하기도 했다. 당뇨로 고통받으면서 노점상을 하던 어머니가 약값이 없어 돌아가신 뒤, 어머니가 남긴 통장과 편지를 보며 “나는 쓰러질 수 없다”고 이를 악물었다.
‘비’라는 이름은 박 대표가 지어줬다고 한다. 비에게 줄 노래들이 꼭 비 오는 날에만 써져서 그렇게 붙였다는 것이다. 비 역시 지독한 연습벌레다. 스케줄이 일찍 끝나도 집으로 가지 않고 안무실로 간다. 연습을 하루도 빼먹지 않는다. 비는 자신이 정상의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들보다 재능이 많아서가 아니라 자신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의 하루 평균 연습량은 10시간에서 12시간이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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