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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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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수 기업 열전] 글로벌 비즈니스맨의 또 하나의 집

웨스틴조선, 서구문화를 처음 소개한 정통의 변신 vs 신라호텔, 한국미를 자랑하는 순수 토종 브랜드
등록 2009-01-09 11:13 수정 2020-05-03 04:25
지친 여행자가 무거워 보이는 가방을 들고 호텔 앞에 서 있다. 벨보이가 씨익 눈인사를 하며 가방을 든다. 여행자는 체크인을 하며 호텔 안을 둘러본다. 붉은색 벨벳과 나뭇결이 살아 있는 가구들이 어우러져 클래식한 느낌이다. 고풍스러운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샹들리에에선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왔다. 로비 저편에서 감미로운 재즈피아노 선율이 흘러나온다. 세련된 턱시도와 우아한 이브닝드레스가 잘 어울릴 것 같은 사람들이 서서 잡담을 나누고 있다. 여행자는 호텔 바 한켠에서 한 잔의 와인을 떠올려본다. 눈송이가 바닷물 위로 떨어져 부드럽고 은은한 향기만 남기고 사라지는 그런 와인이다. 여행자는 웃으며 고개를 흔든다.
웨스틴조선호텔 전경과 침실, 주방, 레스토랑, 로비사진.

웨스틴조선호텔 전경과 침실, 주방, 레스토랑, 로비사진.

조선호텔, 역사적 인물들의 거처

여행자들의 안식처인 호텔. 웨스틴조선호텔과 신라호텔은 한국을 대표하는 맞수 호텔이다. 시작은 조선호텔이 빨랐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10월10일치 를 보면, ‘진선진미한 조선호테루 낙성-본일부터 개업’이라고 기록돼 있다. 호텔 터는 고종 황제가 즉위식을 베풀고 천신께 제를 지내던 환구단 자리였다.

당시 조선호텔은 건평 580평에 52개의 객실, 커피숍, 로비라운지, 바, 댄스홀 등을 갖췄다. ‘수직열차’로 불린 엘리베이터, 아이스크림, 뷔페, 댄스파티, 서구식 결혼식 등 서구문화를 국내에 선보인 곳이기도 했다. 당시 ‘임페리얼 수우트’라 불렸던 201호실엔 일본 왕족이 묵었다. 해방 뒤 이승만 대통령과 김구 선생이 숙소로 쓰기도 했다. 한국전쟁 때엔 북한 인민군이 호텔을 점령해 마오쩌둥과 김일성 초상화를 걸어놓은 적도 있다. 53년부터 미8군 숙소로 쓰였던 조선호텔에선 보브 호프와 마릴린 먼로 등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이 위문 공연을 벌였다. 애초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 소유에서 시작한 조선호텔은 해방 뒤 교통부와 한국관광공사를 거쳐 83년 삼성그룹에 인계됐다. 92년부터 삼성에서 계열 분리한 신세계가 운영하고 있다.

조선호텔은 67년 철거됐다가 3년 만인 70년 현재의 조선호텔로 정식 개관했다. 당시 건설은 현대건설이 맡았는데, 기공식에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참석하기도 했다. 새로 지은 호텔은 지하 2층, 지상 18층(최고층은 20층이었으나 실제로는 동양인과 서양인이 싫어하는 4층과 13층이 없었다), 건평 1463평의 500실 규모 호텔이었다. 고층건물이 거의 없던 당시, 조선호텔은 서울 시내에 새로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했다. 설계에 참여한 정인국 홍익대 교수는 “모든 객실의 창문이 시내 전경을 볼 수 있도록 바깥쪽으로 향하도록 한 것이 자랑거리”라고 말했다.

신라호텔은 박정희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세웠다. 72년 이 회장은 정부로부터 영빈관을 인수해 국빈이 투숙하고 대규모 국제회의를 열 수 있는 호텔을 건설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영빈관은 59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건축한 외국 귀빈 숙소였으나, 당시 심각한 운영난에 빠져 있었다. 이 회장은 검토 끝에 이듬해 봄 정부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신라’라는 이름도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취지에서 이 전 회장이 직접 지은 것이다. 나중에 이 회장은 “찬란한 우리 고유문화를 꽃피웠던 신라시대의 우아한 품위와 향기를 재현시켜보고자 호텔신라를 건설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호텔 경영에는 별반 지식이 없었고 자본이 없어 일본에서 기술과 차관을 도입하기로 했다.

공사는 처음부터 난관에 부닥쳤다. 73년 1차 석유파동(오일쇼크)이 일어났다. 배럴당 3달러 수준에 머물던 국제유가가 11달러로 치솟았다. 74~75년 우리나라는 마이너스 성장의 수렁에 빠졌다. 정치 문제까지 불거졌다.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한-일 관계는 급속하게 얼어붙는다. 74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가 피격돼 숨진다. 결국 75년 공사는 일시 중단된다.

개장까지 우여곡절 vs 전통의 위기

이듬해부터 경기가 회복세로 접어들었다. 국제 금융시장 상황도 좋아지기 시작했다. 악화됐던 한-일 관계도 차츰 개선됐다. 중단된 지 1년7개월 만인 76년 11월 다시 공사에 들어갔다. 그땐 한창 중동 붐이 일던 때여서 건설노동자를 찾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같은 우여곡절 끝에 신라호텔은 79년 문을 연다. 하지만 또 다른 시련에 부닥친다. 79년 하반기에 닥쳐온 2차 석유파동이었다. 경기가 급속히 냉각됐다. 그해 10·26 사태로 외국인 관광객의 발이 뚝 끊겼다. 위기였다.

조선호텔도 80~90년대 서울에 고층의 특급호텔이 하나둘씩 올라가면서 위기를 맞는다. 송병호 웨스틴조선호텔 상무는 “화려한 것만을 선호하던 당시 인식으로 보면 역사가 오래되고 다른 호텔에 견줘 규모가 작은 것이 약점이었다. 하지만 도심 중심에 있어 은행과 대기업 본사, 공공기관이 포진해 있는 점은 강점이었다”고 말했다. 조선호텔은 ‘비즈니스맨’ 고객에 타깃을 맞추게 된다. 객실부터 연회장까지 비즈니스맨 중심으로 리노베이션했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화되면서 글로벌 비즈니스맨들이 한국에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개장 초 석유파동을 맞은 신라호텔은 초기 적자에 허덕였다. 신라호텔은 고품격 서비스로 위기에 맞선다. 외국인 비즈니스 고객을 우대했다. 우선 돈이 된다고 해서 무리한 할인으로 단체여행객을 받지 않았다. 성매매 여성의 동반을 금하는 영업 방침도 세웠다. 또 팁을 받지 않는 ‘노팁’ 제도를 만들어 고객들로부터 호응을 받았다.

이병철 회장도 호텔 서비스 강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신라호텔의 새 메뉴가 나올 때마다 집으로 가져다 시식해온 이 회장이 중국 만두를 맛본 뒤 “맛이 없다”고 하자 호텔이 발칵 뒤집혔다. 직원들은 서울 시내 유명 호텔을 돌며 만두 속재료의 비결을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 “회장이 별걸 다 시킨다”며 짜증을 냈던 주방 직원들도 분석 작업을 하며 많은 것을 느꼈다고 한다.

신라호텔 전경과 로비, 영빈관, 주방 사진.

신라호텔 전경과 로비, 영빈관, 주방 사진.

고객과 만나는 모든 순간이 기업 수익

호텔은 MOT(Moments of Truth)로 불리는 ‘접점 마케팅’을 펼치는 대표적인 곳이다. MOT는 투우사가 소의 급소를 찌르는 순간을 말하는데, ‘실패가 허용되지 않는 중요한 순간’을 의미한다. 고객이 직원과 만나 서비스를 받는 모든 순간이 여기에 해당된다. MOT는 고객에게 어떠한 인상을 심어주고 고객을 얼마나 만족시키는가가 관건이다. 이는 곧바로 기업 수익과 직결된다.

조선호텔은 ‘집을 떠난 또 하나의 집’(Home Away From Home) 같은 편안함을 주는 데 초점을 둔다. 대표적인 게 ‘익스프레스 체크인 서비스’다. 객실을 예약한 고객은 공항에 내리면 호텔 직원의 영접을 받는다.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에는 차 안에 그가 좋아하는 음악, 좋아하는 잡지 등을 갖춰놓는다. 버스나 택시를 타는 고객은 생수, 물수건 등의 서비스를 받는다. 차에서 내리면 또 다른 직원이 고객을 기다리고 있다. 직원이 이미 그를 위한 객실 키를 준비해뒀기 때문에 고객은 체크인하려고 프런트에서 기다릴 필요가 없다. 한국에 처음 오는 고객이나 밤늦게 도착하는 여성 고객에게 인기다.

서울 남산 자락에 자리잡은 신라호텔은 전통적인 한국의 미와 현대적 감각을 지향한다. ‘세계 속의 한국을 대표하는 종합 호스피탤리티(Hospitality) 기업’이 목표다. 신라호텔은 외국 유명 호텔 체인과는 관계없는 순수 토종 브랜드다. 하지만 등 세계 유수의 호텔 평가 매체들이 하얏트, 힐튼 등 세계적 체인호텔들을 제쳐두고 한국의 최고 호텔로 꼽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전 회장, 제너럴일렉트릭(GE)의 잭 웰치 전 회장과 제프리 이멜트 현 회장, 휼렛 패커드(HP)의 칼리 피오리나 전 회장,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 등 세계적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단골 고객일 정도다. 장우종 신라호텔 팀장은 “신라호텔은 숙박 식음료 시설이 아닌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을 제공하는 복합 문화시설로 거듭나려 한다. 차별화된 문화와 감성을 서비스하는 생활문화 기업으로 성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탁. 여행객은 객실로 들어왔다. 이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도시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그는 옷을 벗고 더운물에 몸을 맡긴다. 외국의 밤은 왠지 모를 향수에 젖게 해 떠나온 집을 그립게 만든다. 그의 손에는 붉은빛 와인잔이 들려 있다.



사촌지간 여성 상무
프로세스 혁신 vs 디자인 변신


이부진(39·왼쪽) 신라호텔 상무와 정유경(37) 조선호텔 상무

이부진(39·왼쪽) 신라호텔 상무와 정유경(37) 조선호텔 상무

이부진(39·왼쪽) 신라호텔 상무와 정유경(37) 조선호텔 상무는 사촌지간이다. 이 상무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첫째딸이다. 정 상무는 이 회장의 여동생인 이명희 신세계그룹 회장의 외동딸이다. 그동안 대부분 재벌가 2~3세 여성들은 결혼 뒤 집안 밖의 활동을 자제하거나 미술관 운영 등 문화예술 활동에 주력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경영 일선에서 적극적으로 활동 중이다.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가까이 지내온 친척이지만 호텔 경영에선 자존심을 건 치열한 대결을 펼쳐나가야 한다.
호텔 경영에 먼저 나선 사람은 정 상무다. 정 상무는 이화여대(비주얼디자인 전공)와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그래픽디자인 전공)를 졸업하고 1996년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호텔 경영에 뛰어들었다. 2003년부터 조선호텔 프로젝트실 상무로 일하고 있다.
이 상무는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5년 삼성복지재단에 입사한 뒤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등을 거치며 실무 경험을 쌓았다. 2001년 8월 호텔신라 기획팀 부장으로 호텔 업무를 시작해 2004년 경영전략담당 상무보로 승진했다. 2005년에는 핵심경쟁력 개선과 프로세스 혁신 부문에서 성과를 인정받아 1년 만에 상무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그는 신라호텔의 변신을 이끌었다. 호텔을 단순히 먹고 자는 곳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편의를 증진할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상무는 업무에 관해선 집요하고 끈질기게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신라호텔을 개혁하는 1년 동안 엄청날 정도로 유통, 인테리어 등 호텔과 관련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새벽 3시에 업무와 관련한 전자우편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면 벨보이에게 두툼한 내복을 선물하고, 명절 때엔 룸메이드에게 선물을 하는 등 자상한 모습도 갖고 있다고 한다.
정 상무는 호텔의 인테리어나 외식사업, 소품 등과 관련한 디자인 부문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호텔 경영 전반에 참여하기보다 전공을 살린 분야에 치중한다. 조선호텔의 주요 레스토랑이나 웨딩 사업 등 디자인 요소가 필요한 분야는 대부분 정 상무의 손길을 거쳤다고 한다.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는 호텔업계 최초로 비주얼 디자이너를 두도록 제안했다. 비주얼 디자이너들은 작게는 소소한 호텔 내 소품부터 크게는 리노베이션까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의 디자인 콘셉트를 정하고 업체 선정에 참여하는 등 총괄적인 비주얼 디자인 업무를 진행하고 있다.
이 상무는 신라호텔 5층에 사무실을 두고 업무를 보지만 정 상무는 주요 현안이 있을 때만 호텔에 나와 업무를 보고 협의를 한다. 사무실은 신세계 빌딩에 두고 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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