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국제유가가 배럴당 150달러를 위협하며 고공행진을 벌였다. 골드만삭스는 수급 불균형으로 6~24개월 안에 배럴당 200달러까지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는 2008년 유가 전망을 ‘60~70달러’로 예측했다. 지난해 치솟던 유가는 하반기부터 하락해 최근에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예측과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보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유가 전망이 맞은 셈이 됐다.
2003년 4월23일 ‘책의 날’을 맞아 청와대는 노무현 대통령이 정독하고 있는 몇 권의 책을 소개했다. 그중 하나가 LG경제연구원이 그해 3월에 내놓은 라는 제목의 단행본이었다. 이 책은 성장 한계에 직면한 한국 경제를 한 단계 끌어올리려면 ‘혁신 주도형 경제’로 전환해야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세계 수준의 싱크탱크를 꿈꾸며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 민간 경제연구소의 맞수, 삼성경제연구소와 LG경제연구원이다.
LG경제연구원은 1986년 4월 럭키투자증권 조사부 인력 중심의 럭키경제연구소로 출발했다. 럭키증권이 100% 출자한 럭키증권 자회사였다. 최종성 LG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 부장은 “증권 조사 업무를 전문화하는 게 1차 목적이었다. 당시에는 증권 열풍이 불면서 대기업들이 증권사 부설 경제연구소를 잇따라 세울 때였다”고 말했다.
86년 나란히 연구소 출범시켜LG경제연구원도 증권회사의 조사부 기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주로 자본시장을 중심으로 국내외 경제와 산업동향 조사업무를 했다. 연구과제 역시 증권투자 정책 수립이나 투자기법 개발 등 증권 관련 업무 위주였다. LG경제연구원은 2년 뒤 그룹 직할 조직으로 개편되면서 럭키금성경제연구소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연구 대상도 증권회사 지원 연구조사에서 그룹사 전체를 위한 연구조사 컨설팅 기능으로 전면 개편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이 다부치 세쓰야 일본 노무라증권 회장을 만난 뒤 설립이 추진된다. 1986년 4월 이 회장의 지시에 따라 삼성 비서실은 경제연구소 설립계획안을 마련한다. 일본의 대표 싱크탱크인 노무라총합연구소(NRI)가 벤치마킹 대상이었다. 처음에는 독립법인이 아닌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부설 기관으로 설립하기로 했다. 초기 자본금은 대략 7억원. 당시 동방생명이 갖고 있던 금융조사 및 증권·신용평가 기능을 확대해, 막대한 자산(1985년 말 기준 2조5천억원)의 효율적 운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동방생명은 연구소 이름에 어떤 형태로든 ‘동방생명’이라는 글자를 넣도록 요구했다. 보험업계 최초로 연구소를 설립하는 명분을 살리고 회사 이미지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회장이 최종 결정했다. 이 회장은 “지금은 역량이 부족해 당분간 삼성그룹 일에 전념하겠지만, 어디까지나 그 지향점은 사회과학 분야의 종합 연구소에 있다”며 ‘삼성경제연구소’로 정했다. 영문 이름은 세리(SERI)가 됐다. 1986년 7월 25명의 연구원으로 출발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는 두 연구소에 도전이자 기회였다. 1994년부터 한국 경제는 가파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국가 경쟁력이 좋아진 게 아니었다. 외부 환경이 좋아서였다. 엔고와 반도체 호황 덕분이었다. 구조조정이 시급했지만, 기업들은 오히려 투자를 확대했다. 투자 재원은 대부분 차입으로 조달해 기업 재무구조는 악화됐다. 경제 곳곳에 거품이 끼었다. 1996년부터 엔고와 반도체 특수가 끝나면서 97년부터 한보·삼미·진로·기아·해태·한라·청구 등 대기업들이 무더기로 쓰러졌다.
두 연구소 모두 경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지 못했다. 적절한 대응책도 내놓지 못했다. 두 연구소는 이러한 반성을 발판으로 새로운 변신에 도전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눈높이에 맞춘 보고서를 찾아나선다. 1995년부터 8년 동안 연구소장을 맡은 최우석 소장은 보고서를 사회수요에 맞추고, 연구를 위한 연구보다 실질적 연구를 할 것을 강조했다. 최 소장은 “각종 보고서가 실질적이지 않고 시의성이 적으며 너무 어려웠다. 현장 연구와 빠른 일처리를 요구하고, 보고서를 알아보기 쉽게 쓰라는 소리를 많이 했다. 이상은 높이 두되 현실에 발을 디딘 연구를 지향했다”고 말했다. 보고서에도 현실성·신속성·가독성이 강조됐다. 정통적 연구 방식과는 다른 요구에 연구원들은 “연구소가 호떡 굽는 덴 줄 아느냐” 며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동북아경제 중심 국가론’ 화두 던져하지만 삼성경제연구소의 이같은 방식은 IMF를 거치면서 빛을 발한다. 트렌드를 중시하는 빠른 분석과 이슈 제기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오상우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 부장은 “보고서가 시의에 맞고 읽기 쉬워 언론도 자주 탔고 지식인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도 삼성경제연구소를 알리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LG경제연구원도 IMF를 거치면서 변신한다. LG경제연구원은 IMF 이전까지 기업은 물론 정부부처, 학교, 공공기관 등 다양한 고객을 대상으로 컨설팅 사업을 벌였다. 그러나 IMF 경제위기 뒤 많은 기업이 사회적 부담만을 남긴 채 몰락했다. 건실하다고 평가받던 기업도 어려움을 겪는 것을 지켜보면서 LG경제연구원은 연구의 우선순위를 기업으로 정했다. 국내 기업을 탄탄한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것이 국가 경제 발전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일이라고 여긴 것이다. 채정훈 LG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 차장은 “이를 계기로 LG경제연구원은 국내 주요 사업의 경쟁력 강화, 신사업 창출 등의 연구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면서 두 연구소는 점차 다른 길을 걷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연구 주제의 무게를 거시 분야에 두는 반면 LG경제연구원은 상대적으로 기업 안으로 파고든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굵직굵직한 사회·경제적 이슈를 선점하고 화두를 던진다. ‘강소국론’이나 ‘동북아경제중심 국가론’ ‘국민소득 2만달러 달성’은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먼저 던진 화두였다. 강한 메시지를 던지면서 정부 정책에 반영하도록 했다. 성장률·금리·환율 등 경제 변수들 중심의 다른 민간 연구기관들과 차별화를 한다.
신현암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 상무는 “민간 연구소지만 국익도 생각해야 한다. 한국 사회에 도움이 되는 정책 제안도 강화하고 있다. 2000년을 전후해 우리나라에서도 글로벌 기업이 나왔듯, 글로벌에서 인정받는 연구소를 지향하기 위해 그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고객 맞춤형 보고서도 강점이다. 최고경영자(CEO)를 상대로 하고 있는 는, CEO들의 라이프스타일과 욕구, 필요를 철저하게 분석해 각종 건강·문화 정보까지 알려주고 있다. 와인·재즈·등산·독서 등 다양한 주제의 보고서도 내놓는다. 삼성경제연구소는 각종 이슈를 발 빠르고 광범위하게 보여준다. 재미있고 대중적이면서 현장감이 강하지만, 깊이가 부족하고 가볍다는 비판도 나온다. 임태윤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조정실 팀장은 “아카데믹한 연구는 대학과 국책 연구기관의 몫이고, 삼성경제연구소는 실용적이고 현장 정보가 담긴 보고서를 강조한다”고 말했다.
지주회사 전환 밑그림 그려내LG경제연구원은 기업을 가장 잘 알고 기업 성공을 지원하는 민간 연구소를 추구한다. LG경제연구원은 LG의 지주회사 출범 과정에서 이론적 뒷받침과 조직 운영 구상에 이르기까지 큰 그림을 그렸다. 그룹 구조조정본부와 손발을 맞춰 자회사의 역량 조사, 지주회사의 방향 제시 등 주요 과제를 소화해냈다. LG의 지주회사 변신은 한국 기업의 고질적인 문제점 가운데 하나인 재벌의 문어발식 소유지배 구조를 탈피하는 출발점이 됐다.
김영민 LG경제연구원 연구조정실장은 “전자와 화학, 통신 산업에서 다양한 리서치와 풍부한 컨설팅 경험도 강점이다. 이를 통해 현장감 넘치고 심도 있는 내용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론과 실전’에 두루 강한 것도 LG경제연구원의 강점이다. 현재 전자·화학·텔레콤·상사·유통 등 LG그룹 주요 계열사에 연구원 출신 임원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도 LG경제연구원 원장 출신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새로운 어젠다(의제)와 정책 대안을 제시하며 2010년 동아시아 지식 허브를 꿈꾼다. LG경제연구원은 10년 뒤 미래 비즈니스의 진화 방향을 가장 잘 읽어내는 싱크탱크를 지향한다. 두 연구소 가운데 누가 먼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간 싱크탱크로 자리매김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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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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