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화수’(雪花秀)는 화장품 업계의 신화다. 아모레퍼시픽은 1997년 한방 화장품 설화수를 선보인다. 영어 이름이 대부분인 화장품 시장에서 생소한 브랜드였다. 국내 화장품 업계의 평가는 차가웠다. 하지만 고객의 반응은 뜨거웠다. 올해 설화수 매출은 5천억원을 돌파했다. 국내 화장품 시장 규모는 5조원대다. 단일 브랜드 하나가 화장품 시장의 10%를 차지한 것이다.
설화수는 한국적이어서 세계적인 화장품이다. 등 한의서에서 몸에 좋다고 소개된 건 모두 설화수의 원료가 됐다. 100% 국산 원료를 쓴다. 2만 가지 한방 성분 중 3천 가지를 추려낸 뒤 30가지를 엄선해 사용한다. 나이가 들수록 건조해지는 피부를 촉촉하게 가꿔주는 다섯 가지 한방 성분도 녹아 들어간다.
설화수의 시작은 아모레 창업주인 서성환 전 회장이었다. 서 회장은 “우리 안의 것을 새롭게 발견해 서양과 소통할 수 없을까”라며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김효정 아모레 부장은 “67년 인삼 성분을 넣은 한방 화장품을 개발했다. 87년엔 생약 성분을 첨가한 ‘설화’라는 화장품도 내놓았다. 10년 뒤 자태를 드러낸 것이 바로 설화수였다”고 말했다. 단아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여성들에게 다가선 것이다.
“엘라스틴 했어요.” 배우 전지현은 탄력 있고 탐스러운 생머리를 찰랑찰랑 흔들며 이렇게 외친다. 이 한마디에 국내 샴푸 시장은 지각변동을 겪는다. 엘라스틴은 생활용품으로 여겨졌던 샴푸를 화장품의 이미지로 바꿔놓았다. LG생활건강은 2001년 엘라스틴을 내세워 중저가 위주의 샴푸 시장에 프리미엄 샴푸 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열었다.
엘라스틴은 소비자 조사에서 잉태됐다. LG생활건강은 2000년 소비자를 대상으로 ‘외출하기 전 가장 신경쓰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옷 다음으로 머리 모양이 손꼽혔다. 화장보다 관심이 높았다. 여성들은 볼륨 있고 탄력 있는 머릿결을 갖고 싶은 욕망이 있었지만, 기업들은 그 욕망을 충족해주지 못했다. 김준배 LG생활건강 마케팅디렉터MD는 “아름다운 머릿결을 위해서는 가격이 비싸더라도 사겠다는 것이죠. 프리미엄 제품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거예요. 엘라스틴은 숨어 있는 욕망을 표현할 수 있게 해주었죠”라고 말했다.
프리미엄 샴푸시장 열어엘라스틴은 기존 샴푸보다 20~30% 정도 비쌌다. 하지만 출시 초기부터 ‘머리카락도 피부다’라는 이미지를 강조했다. 결국 엘라스틴은 다국적 기업 브랜드인 ‘팬틴’ ‘도브’를 따돌리며 시장을 선점해나간다.
아모레는 개성상인 피를 물려받은 한 여인에서 시작됐다. 바로 서성환 회장의 어머니인 윤독정씨다. 1930년대 윤씨는 직접 동백기름을 짜 만든 머릿기름을 팔아 ‘사업 물길’을 열었다. 당시 서민들은 피마자기름을 발랐지만, 인삼 산업으로 소득 수준이 높았던 개성 여인네들은 고가의 동백기름을 발랐다. 검고 윤기 나는 머릿결을 소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윤씨는 창성상점이라는 가게를 차리고 ‘구리무’(크림), 가루분(백분)으로 화장품 품목을 넓혀갔다. 45년 서 회장은 어머니가 세운 창성상점을 태평양상회로 이름을 바꿨다. 태평양만큼 큰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웅지와 태평양을 건너 세계로 진출하겠다는 도전 의지를 담았다고 한다. ‘바다를 향한 여정’이 시작한 것이다.
53년 휴전이 되자 아모레는 서울 후암동에 둥지를 튼다. 가내수공업으로 일하던 때여서 제품을 만들다 밥을 해먹었다. 화장품 향료가 배어 있는 솥과 바가지를 그대로 쓰다 보니 크림을 만들 때면 ‘크림향 밥’을, 포마드를 만들 때면 ‘포마드향 밥’을 먹곤 했다. 서 회장은 살아생전 “가장 힘들었던 시기고, 가장 일을 많이 했던 시기였다. 하지만 다시 살 수 있다면 그렇게 일을 한 번 더 해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서 회장은 61년 ‘아모레’를 브랜드로 정한다. 이탈리아 노래 ‘아모레미오’(난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 따왔다. 64년 화장품 방문판매를 시작하며 유통 혁명을 일으킨다. 여성들이 마땅한 일자리를 찾기 힘들었을 때다. 방문판매는 많은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준 셈이다.
LG가 제일 처음으로 만든 제품은 화장품이었다. 해방 뒤 구인회 LG그룹 회장은 화장품 사업에 승부를 건다. 구 회장은 그가 처음으로 세운 구인상회를 팔면서까지 화장품 원료 글리세린을 사들였다. 47년 세상에 나온 ‘럭키(LUCKY) 크림’. LG가 소비자에게 처음 내놓은 제품이었다. 곧바로 LG는 락희화학공업사를 정식으로 창립한다.
화장품은 잘 팔렸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LG는 화학그룹으로 도약하게 된다. 크림통 뚜껑이 너무 쉽게 깨지는 게 문제였다. 고민하던 구 회장은 일본에서 여섯 권으로 된 플라스틱 총서를 들여와 플라스틱 가공의 기본 지식을 얻는다. 원료와 시설만 있으면 칫솔, 빗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구 회장은 51년 봄 플라스틱 가공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기계와 원료 도입을 결정한다. 많은 사람이 반대했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했고 1·4 후퇴로 서울을 빼앗기는 등 하루 앞을 내다보기 힘든 때였다. 하지만 구 회장은 “항상 새로운 것을 생각하자. 남이 안 할 때 시작하자”며 투자를 단행한다. 그때까지 모아둔 전 재산을 투자했다. 구 회장의 개척자적 기업정신은 LG그룹의 초석이 됐다.
이듬해 ‘오리엔탈’ 상표의 빗과 비눗갑이 나왔다. 그 뒤 세숫대야, 식기류, 칫솔 등도 잇따라 선보인다. 럭키치솔은 곧바로 소비자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칫솔시장을 석권했으니 치약도 만들어야 했다. 럭키치약은 외국 기술 도입 없이 토막 정보와 기술을 모아 자력으로 개발한 순수 국산 치약이었다. 하지만 ‘치약은 미제’라는 생각이 뿌리박혀 있을 때였다. 팔리지 않았다. 구 회장은 대대적인 마케팅을 펼친다. 56년 봄 서울 창경원에서 열린 산업박람회에선 10만 관람객에게 럭키치약을 무료로 나눠주기도 했다. 이종원 LG생활건강 부장은 “럭키치약은 58년, 당시 국내 시장을 석권하고 있던 콜게이트 치약을 앞질렀다. LG는 생활용품의 아성을 이어나가게 된다”고 말했다.
태평양으로 향하던 아모레가 폭풍을 만나게 된 건, 무리한 사업 다각화 때문이었다. 80년대 아모레는 계열사를 확장해나갔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3년 연속 적자를 낸다. 계열사 지급 보증은 6800억원에 이르렀다. 부채는 계속 늘어났다. 재무팀은 어음 막는 일이 주된 업무가 될 정도였다. 언제 부도가 날지 모르는, 살얼음을 걷는 상황이었다.
방문판매로 유통혁명·일자리 창출서성환 회장의 막내아들인 서경배 사장은 93년 기획조정실 사장에 취임한 뒤 메스를 댄다. 서 사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프로야구단을 갖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삼성에는 있지만 현대에 없는 게 프로야구단이었다. 삼성과 현대가 재계 순위 자리를 높고 자존심 싸움을 벌이던 때였다. 결국 95년 태평양 돌핀스 프로야구단은 현대에 매각된다. 95년 한국써보, 96년 태평양패션, 97년 여자농구단도 잇따라 매각 또는 청산됐다. 이희복 아모레 팀장은 “국제통화기금(IMF) 위기로 대기업이 맥없이 하나둘 쓰러질 때 아모레는 오히려 오뚝이처럼 일어났다. 서 사장의 핵심 역량 선택과 집중 전략이 주효했다”고 말했다.
2001년 LG생활건강은 LG화학과 분리 독립한다. LG생활건강의 위기는 카드 사태로 내수경기가 침체되고 대형 마트가 곳곳에 생기면서 찾아온다. 치열한 가격 경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오강국 LG생활건강 차장은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 브랜드로 경쟁하는 프리미엄 시장을 개척했다. 제품 개념을 뷰티와 헬스 케어라는 상위 개념으로 발전시켜나가며 위기에 대처했다”고 말했다. 전략적인 고려 없이 진행되던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OEM) 방식의 수출을 모두 중단했다. 매출이 줄더라도 브랜드 관리를 철저히 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서다. 설화수에 맞서기 위해 2003년 명품 한방 화장품 ‘후’도 선보였다. 지난해 LG생활건강은 코카콜라음료를 인수하며 음료사업에도 진출한다.
슈퍼 메가 브랜드·토털 생활문화 야심아모레는 화장품이 강하고 LG생활건강은 생활용품에서 앞선다. 서경배 사장은 ‘아시안 뷰티 크리에이터’를 내세운다. 2015년까지 매출 5조원을 이뤄 ‘글로벌 톱10 기업’으로 도약한다는 것이다. 설화수·헤라·아이오페·라네즈를 매출 5천억원 이상의 ‘슈퍼 메가 브랜드’로 육성하겠다는 포부다. 반면 LG생활건강은 ‘최고의 토털 생활문화 기업’을 표방한다. 차석용 LG생활건강 사장은 ‘메디치 이펙트’ 경영론을 내세운다. 중세 유럽 메디치 가문이 음악·미술·건축 등 다방면의 예술가와 학자를 모아 공동 작업을 후원하자 문화 창조 역량이 커져 르네상스 시대를 맞게 됐다는 데서 유래한 경영이론이다. 서로 다른 분야의 역량이 합쳐지면 시너지를 낸다는 얘기다.
아모레와 LG생활건강은 화장품과 생활용품에서 1·2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다. 도도한 외국 화장품 회사와 강력한 브랜드로 무장한 다국적 생활용품 회사들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힘을 못 쓰는 이유는 두 회사의 맞수 경쟁이 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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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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