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불황일 때 빨강과 와인색 립스틱이 빛을 발한다. 색조화장품이 기초화장품보다 싸면서 자기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황일수록 스트레스가 많아져 사람들이 이성적인 것보다 본능적인 자극을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미니스커트가 바로 그 케이스.
여성용 속옷인 란제리(lingerie)는 어떨까? 브래지어, 거들, 팬티, 스타킹 등의 란제리는 체형을 보정해주는 게 임무다. 하지만 보석과 더불어 여성의 맨살에 허락된 란제리에는 화려한 ‘섹시 코드’도 숨어 있다. 마케팅 속설에는 불황 때 겉옷을 사는 데 많은 돈을 쓸 수 없는 여성들이 란제리로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속옷쟁이들은 꼭 그렇지 않다고 한다. 불황 때 많이 팔리지도 않고 반대로 매출이 떨어지지도 않는다고 한다. 란제리는 필수품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몸을 감싸주는 란제리 시장에서 1·2위를 달리는 브랜드, 비너스와 비비안이다. 두 브랜드는 미국·프랑스의 유명 브랜드를 제치고 우리나라 대표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다. 국내 속옷 시장 규모는 5천억원 정도. 수입 브랜드 비중은 10% 안팎에 그친다.
시작은 비너스가 빨랐다. 비너스를 만드는 회사는 신영와코루다. 창업주인 이운일 회장은 1954년 신영염직공업사를 만들면서 국내 란제리 시장을 개척했다. 이 회장이 부인과 함께 일본을 오가며 란제리를 처음 본 뒤 ‘사업이 되겠다’고 생각해 시작했다고 한다. 이 회장은 미의 여신인 비너스를 브랜드로 내세웠다. 몸매를 아름답게 가꿔나간다는 뜻을 담았다고 한다. 신영은 ‘비너스는 아름다움의 시작입니다’와 ‘비너스는 아름다운 패션입니다’라는 두 개의 슬로건을 앞세우고 있다.
3년 뒤인 57년 (주)남영L&F는 비비안이라는 브랜드를 선보인다. 당시 부산과 홍콩을 오가며 무역업을 했던 창업주 남상수 명예회장이 란제리 시장에 뛰어들었다. 남 회장은 홍콩에서 본 서양 여성들의 양장 차림이 멋져 보였다고 한다. 양장의 맵시를 제대로 내주는 게 란제리라고 생각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남 회장은 처음 브랜드 이름을 지을 때 두 개의 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가져야 한다. 둘째 3음절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워야 한다. 그렇게 해서 채택된 이름이 바로 비비안이다.
60~70년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란제리 사업은 쉽지 않았다. 두 회사 임직원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속옷 샘플을 갖고 와 란제리를 만들었지만 대부분 우리나라 여성 체형과 사이즈에 안 맞았다. 여성의 가슴 사이즈는 체형마다 달라 브래지어를 처음 내놓을 땐 입어보고 착용감을 얘기해주는 모델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속옷을 입어보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피팅모델를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신제품이 나오면 직원들은 아내에게 입혀보고 다음날 착용감이 어떤지를 물어보곤 했다. 그런 식으로 한국 여성의 체형에 맞는 브래지어를 만들어나갔다. 속옷 광고모델도 구하기 힘들 때였다. 일러스트로 대체하거나 마네킹을 썼다. 그나마 얼굴이 안 나온다고 설득해 스타킹 광고는 실제 모델이 신고 다리만 찍어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80년대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볼륨 있는 가슴, 꽉 조인 허리, 탄력 있는 히프를 향한 욕망이 여성들 사이에서 커지기 시작한다. 좀더 아름답고, 더 고급스럽고, 보다 기능적인 속옷을 원하고 있었다. 이제 두 회사는 본격적으로 경쟁을 벌이게 된다.
‘브라는 과학이다.’
한 장의 브래지어를 만들려면 보통 20가지 이상의 자제가 들어간다. 봉제 공정도 25~30번 이상 거쳐야 한다. 여성의 살에 가장 먼저 닿는 속옷이다 보니 그만큼 정교한 과정이 필요하다. 박종현 비비안 홍보실장은 “브래지어 컵을 어떻게 하면 정교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연구하면서 mm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두 회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과학을 응용한 브래지어를 내놓는다. 비너스가 한발 빨랐다. 88년 비너스는 형상기억합금 와이어를 사용한 ‘메모리 브라’를 내놓는다. 형상기억합금은 고객 가슴 모양을 기억해뒀다가 세탁을 해 다시 착용할 때 그 모양으로 그대로 돌아가게 하는 기능을 갖췄다. 히트를 쳤다. 김상범 비너스 상무는 “브래지어 철사는 여성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두께 1mm, 폭 2~3cm의 철사를 조절하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데 형상기억합금이라는 신소재를 활용하자 그런 고민은 한꺼번에 풀렸다”고 말했다.
‘스타킹은 패션이다’ 화려한 외출90년대 들어 풍만한 가슴은 하나의 섹시 코드로 떠올랐다. 유방 확대 수술이 덩달아 떴다. 이같은 사회 변화는 기업에는 도전이자 기회다. 이때 비비안의 남 회장은 ‘수술을 안 해도 가슴이 커 보이게 하는 브래지어를 만들면 어떨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슴이 닿는 컵 안쪽에 주머니를 삽입해 빵빵한 브래지어를 만들어냈다. ‘가슴은 볼륨업’이라는 광고도 히트를 쳤다. 브래지어의 마술이 고객에게 먹혀든 셈이다. ‘볼륨업 브라’는 발매 열 달 만에 100만 장이 판매됐다.
‘스타킹은 패션이다.’
비너스가 브래지어에서 앞섰다면 비비안은 스타킹에서 빨랐다. 비비안은 최초로 나일론 스타킹을 선보였다. 92년엔 ‘고탄력 스타킹’을 내놓는다. 종아리와 힙을 신축성으로 받쳐준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었다. 대박이 터졌다. 당시 나일론 스타킹은 한 켤레에 600원, 고탄력 스타킹은 1500원으로 가격이 배 이상이었지만 고탄력 스타킹은 ‘수요의 가격탄력성’을 받지 않을 정도로 잘 팔려나갔다.
하지만 90년대 말 들어 스타킹 시장은 변하고 있었다. 스타킹이 반드시 필요했던 여성용 유니폼을 없애버리는 회사가 늘어났다. 여성들은 반바지를 입고 샌들을 즐겨 신기 시작했다. 스타킹 신는 것을 예의로 여겼던 여성들은 스타킹을 내려 돌돌 말아 장롱 안으로 내팽개쳐버렸다.
박종현 비비안 홍보실장은 “스커트를 입을 때 다리를 보호해주는 양말 수준으론 더 이상 여성을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스타킹은 패션이다’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다. 싸구려 대신 고가품으로 가자는 전략이었다. 1천~2천원이 아닌 1만원 안팎의 고급 스타킹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자외선을 차단하는 스타킹, 임산부를 위한 스타킹, 다리 라인을 잡아주는 틈새형 스타킹이 화려한 외출을 하게 된다.
두 회사에도 위험은 있었다. 강력한 도전자가 나타난 것이다. ‘보디가드’ 브랜드를 들고 나온 ‘좋은사람들’이 바로 그것. 개그맨 주병진이 90년에 만든 회사다. 좋은사람들은 대학 경영학과 마케팅 수업에 케이스로 소개될 만큼 돋보이는 마케팅 전략을 펼친다. 좋은사람들은 ‘패션 속옷’으로 자신들을 포지셔닝(마케팅 기법의 하나로 고객에게 기업 제품과 이미지 등을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전략)한다.
그때만 해도 속옷은 청결과 보온이 최고였다. 누가 질 좋은 흰색 면을 만드느냐가 관건이었다. 디자인이 세련될 필요가 없었다. 주요 고객은 주부와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주부들이 많이 가는 시장이 마케팅 포인트였다.
고급화와 정예화로 도전 물리쳐하지만 좋은사람들은 ‘속옷도 패션이다’로 치고 나온다. 실크 등 다양한 소재, 특이한 디자인의 제품을 내놓는다. 속옷을 사는 고객을 젊은 층으로 타깃화했다. 매장도 젊은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으로 옮기고, 광고 전략도 젊은이에 어필하는 화끈한 소재에서 찾았다.
90년대 중반부터 좋은사람들은 란제리 시장을 잠식해왔다. 비너스와 비비안은 고급 브랜드 전략으로 후발주자의 도전에 맞선다. 비너스의 한 사례. 90년대 들어 홈쇼핑에서 란제리가 많이 팔리기 시작했다. 홈쇼핑에선 브래지어와 팬티 여러 벌을 싼 가격으로 팔았다. 매출은 높일 수 있었지만 대신 브랜드 전략으로 보면 마이너스였다. 비너스는 홈쇼핑에서 제품을 판매하는 것을 놓고 전략회의를 벌였다. 갑론을박이 오갔다. 이의평 신영와코루 사장이 깨끗이 정리한다. “싼 가격에 질이 떨어지는 제품을 내놓는다면 고객이 만족하겠나? 비너스라는 브랜드를 지킬 수 있겠나? 그렇다면 우리 회사가 할 필요가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결국 비너스는 홈쇼핑에서 제품을 팔지 않기로 했다.
비비안도 마찬가지. 먼저 장기적인 유통 전략을 세워 유통 구조 개혁에 착수했다. 외곽 상권과 중복 상권의 점포 개설을 줄이고 동일 상권 안에서 경쟁력 있는 지점으로 통합해나갔다. 97년 약 2천 개이던 매장 수를 2000년 1천 개, 2003년 300개(백화점 100개, 전문점 200개)로 정예화했다.
비너스와 비비안은 회사를 세운 뒤 지금까지 거의 적자를 내지 않았다. 97년 금융위기(IMF)로 굴지의 대기업이 무너지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두 브랜드는 살아남았다. 비너스와 비비안이 지속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외고집으로 란제리라는 한 우물을 팠기 때문이다. 강한 브랜드가 불황을 이겼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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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이 알고 있는 사랑의 비너스 아름다운 비너스, 비너스 브라자, 비너스 거들, 비너스 올인원, 아름다운 당신의 화운데이션.’ 1976년 나온 ‘사~랑~의 비너스’라는 이 광고송은 한때 군대에서 아침 구보를 할 때 불렸을 만큼 남성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실제 인물이 속옷 광고에 등장하기 시작했지만, 대부분 외국인 모델이었다. 그때만 해도 연예인들은 신인 때 속옷 모델로 나섰다 얼굴이 알려지게 되면 이미지가 훼손된다는 이유로 란제리 광고를 기피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서는 이른바 ‘잘나가는’ 모델들만이 란제리 모델로 뽑혔다. 비비안은 95년부터 속옷 업계 최초로 국내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기용했다. 패션모델이던 김지연을 발탁해 ‘가슴은 볼륨업’이라는 카피로 광고를 시작했다. 비비안은 그 뒤 박지윤·김남주·한은정·송혜교·김태희·김아중·윤은혜를 광고모델로 기용했다. 비너스는 김규리·고소영·장진영·한예슬·이다해·김민을 모델로 썼다.
유명 연예인을 모델로 발탁하게 된 건 크게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자신의 몸매와 속옷에 대한 여성들의 관심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개성이 강한 젊은 여성들이 소비의 중심축이 됐기 때문이다. 그들이 닮고 싶어하고 따라하고 싶어하는 유명한 모델이 속옷 업계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속옷 광고에는 남자 탤런트도 나왔다. 90년 업계 1·2·3위를 차지하던 백양(비와이씨)·쌍방울·태창의 광고모델로 유인촌·이덕화·노주현이 활동했다.
정혁준 기자 jun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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