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수 기업 열전] 바닷길 주름잡는 쌍끌이 한국호

컨테이너선 주력 한진해운과 벌크선 강자 현대상선

울산 앞바다의 주인 잃은 배 3척, 현대상선의 시작이다.
현대상선의 뱃길을 연 건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기업가 정신’이었다. 건설사업으로 성공한 정 회장은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는 사업을 찾았는데 바로 배를 만드는 조선사업이었다. 종이배조차 만들어본 경험이 없는 그였지만, 신념은 확고했다. 정 회장은 “배를 만든다는 것은 큰 철탱크 속에 터빈을 집어넣는 것이어서 발전소 건설이나 다를 바 없다. 조선소 독(dock)도 큰 수영장을 건설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슨 일이든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쉽게 여기면 또한 한없이 쉬운 법”이라며 조선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정 회장은 차관을 도입해 독자적으로 조선소를 건설하기로 하고 1971년 영국 런던으로 날아갔다. 그러나 영국의 바클레이스 은행 문턱은 높았다. 정 회장은 기술계약을 맺은 영국 A&P 애플도어 엔지니어링 회장인 롱바텀을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롱바텀 회장 역시 비관적이었다. “아직 배를 계약할 선주도 나타나지 않은 실정이고, 또 한국의 상환 능력과 잠재력에 의문이 많아 곤란할 것 같군요.”

컨테이너선 주력 한진해운과 벌크선 강자 현대상선

거북선 지폐 보여주며 설득

그때 문득 정 회장은 바지 주머니 안에서 한화 500원짜리 지폐를 꺼낸다. “이것은 한국 지폐입니다. 그리고 여기 그려진 것이 바로 거북선이지요. 우리 한국은 이미 1500년대에 철갑선을 만들었습니다. 조선 기술에 대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영국의 경우 조선 역사가 1800년대이니, 한국이 그보다 300년은 앞선 셈입니다.”

결국 정 회장은 뚝심을 발휘해 차관 도입에 성공한다. 1972년 정 회장은 당시로선 엄청나게 큰 금액인 8천만달러를 투자해 울산의 35만 평 터에 50만t급 드라이독을 갖춘 현대울산조선소 건설공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1973년 10월 1차 오일쇼크가 터진다. 전세계 경제는 급속히 얼어붙는다. 나라마다 무역 물량도 크게 줄었다. 마치 올해와 같았다. 그러자 선박을 발주했던 선사들이 선박 인수를 거부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현대울산조선소에서 만들고 있던 유조선 3척도 선주가 인수를 거부해 주인 잃은 선박 신세가 됐다.

정 회장은 유조선 3척을 밑천으로 해운업 진출을 결심한다. 위기를 도약의 기회로 삼은 것이다. 1976년 3월 이 주인 없는 유조선 3척으로 시작한 해운사가 바로 아세아상선, 지금의 현대상선이다.

한진해운의 시작은 컨테이너였다.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66년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은 베트남의 퀴논항을 시찰한다. 당시 한진상사는 베트남에서 군수 및 생필품 무역을 하고 있었다. 퀴논항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살아 움직이는 듯 활기로 가득했다.

그때 조 회장의 눈길은 ‘갠트리크레인’이라는 특수 크레인이 들고 있는 컨테이너에 머문다. 무게가 무려 40t이나 되는 컨테이너 상자들이 2분마다 한 개씩 부두 위에 내려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12명의 짐꾼이 1시간 동안 작업해야 겨우 그만한 화물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조 회장은 2시간여 동안 컨테이너 하역작업을 지켜보며 컨테이너가 바로 ‘해상운송의 혁명’임을 깨달았다. 해운의 미래는 컨테이너 발전과 직결된다는 것을 직감한다.

한국의 날개, 바다로 진출

트럭 한 대로 시작해 1950년대 주한미군 물자 수송, 1961년 서울~인천을 운행하는 지정좌석버스 등 운송 사업을 개척해온 그였다. 1966년 베트남에 파병한 미군과 하역·수송 계약을 맺은 뒤 5년 동안 베트남에서 벌어들인 돈은 1억5천만달러였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200달러 안팎, 한국은행이 보유한 외화가 5천만달러에 그치던 시절이었다.

1970년대 들어서도 조 회장의 해운업 구상은 계속된다. 해운사 설립을 준비하던 조 회장은 1977년 초 박정희 대통령을 면담하게 된다. “대한항공이 세계로 뻗어나가면서 나라의 체면을 세워주고 있습니다. 항공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으니 이제는 육상운송과 항공사업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우리나라 해운업의 발전에도 힘을 기울여주십시오.”

곧바로 조 회장은 컨테이너 전용 해운사를 설립한다. 한진해운의 출항이다.

현대상선은 막상 배 3척으로 해운회사를 차렸지만 먹고살기가 막막했다. 유조선이어서 석유를 실어날라야 했다. 정 회장은 당시 세계 7대 석유 메이저 중 하나였던 걸프오일과 중동산 원유 수송권을 놓고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심했다. 이 협상은 신생 기업과 메이저 기업 사이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쉽게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정 회장이 직접 이끈 6개월에 걸친 협상으로 아세아상선이 원유 수송권을 확보하는 극적인 반전을 일궈낸다. 이로써 현대상선은 초기 성장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조 회장은 한진해운 설립 한 달 만에 현대중공업과 일본 조선사에 잇달아 선박 건조를 주문한다. 이듬해 일본 조선사에서 76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 전용선을 인수해 자신의 호를 따서 ‘정석(靜石)호’라고 이름지었다. 선박에 대한 조 회장의 애정은 각별했다. 조 회장은 선박 이름 모두를 그의 친필체로 새겼다. 조 회장은 선박에 서울·인천·부산·포항·제주·광양·군산 등 국내 주요 도시의 이름을 붙였다. 이들 배는 세계 각지를 누비며 한국 도시를 알렸다. 1985년부터는 국내 주요 도시의 이름이 소진되자 뉴욕·롱비치·요코하마·사바나 등 외국 기항지의 지명이 사용됐다.

대한선주 인수, 경영 정상화 성공

1979년 2차 오일쇼크는 세계 해운업계를 극심한 불황으로 몰아넣는다. 국내 해운업체들도 빈사 상태에 빠졌다. 한진해운은 1985년에 큰 폭의 적자를 냈고, 1986년에도 개선 기미도 보이지 않은 채 적자폭이 더욱 커졌다. 한진해운은 당시 주력 시장인 미주 지역을 분석하기 위해 경영개선팀을 파견한다. 조 회장이 직접 회의를 주재하며 위기를 돌파해나간다. 또 매주 이사회를 열어 경영개선팀이 개선 조치 현황을 일일이 점검한다. 노후 선박을 처분하고 운항 노선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정기성 스케줄을 편성했다. 해외 하주 비중을 높이기 위한 국제적인 네트워크도 구성했다.

이러한 가운데 조 회장은 경영위기를 맞은 대한선주를 인수하라는 정부의 요청까지 받고 두번의 거절 끝에 인수하게 된다. 대한선주는 우리나라 최초 국책기업인 대한해운공사가 모태로 한국해운을 이끌어온 대표기업 이었으나 해운불황으로 심한경영난(1250억원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다. 88년 한진해운과 대한상선(대한선주가 상호변경)이 합병돼 오늘의 한진해운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한진해운에는 한국 해운 대표 기업의 정통성과 육·해·공 물류전문 한진그룹의 경영노하우가 접목된다.

조중훈 회장의 셋째 아들인 조수호 회장의 글로벌 경영으로 한진해운은 급속히 세계적 해운기업으로 발전한다. 조수호 회장이 사장으로 취임할 때인 94년 매출은 2조원에도 못 미쳤지만 불과 10년 만인 2005년도에는 6조원의 매출을 달성한다. 국내 1위는 물론 세계 유수의 해운 선사 대열에 올려 놓았다. 그는 이러한 열정과 노력의 결과로 95년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현대상선은 2000년대 들면서 위기를 맞는다. 2002년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른바 ‘대북송금 의혹’이 돌출됐다. 현대의 대북사업 추진과정에서 남북정상회담 대가로 막대한 금액의 대북송금이 이루어지지 않았느냐는 의혹 제기였다.

이 사건으로 정몽헌 회장이 타계하자 KCC가 현대그룹을 인수하기 위해 현대엘리베이터 및 현대상선 지분을 사들이면서 경영권 분쟁이 불거진다. 현정은 회장은 경영권 방어를 진두지휘하면서 경영자의 길에 들어선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던 경영권 분쟁은 현대상선 주주총회에서 62.54%의 높은 찬성으로 현 회장이 현대상선의 등기이사로 선임되면서 일단락된다. 이렇게 사그라든 현대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2006년 현대중공업이 외국계가 보유하고 있던 현대상선 주식을 매집하면서 다시 불붙었다. ‘시숙의 난’에 이은 ‘시동생의 난’이었다. 두 번에 걸친 경영권 분쟁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현정은 회장의 리더십은 세간에 인정을 받는다.

대북송금 특검 시련 이겨내

지난해 한진해운은 매출에서, 현대상선은 당기순이익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한진해운은 컨테이너선에 강하고, 현대상선은 벌크선에 강점을 갖고 있다. 벌크선은 석탄·철광석·곡물 등 가루로 된 재료를, 컨테이너선은 주로 자동차·컴퓨터·백색가전 등 공산품을 실어나른다. 지난해엔 벌크선이 떴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에 각종 원자재와 재료를 실어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국과 유럽에 수출이 잘될 때는 컨테이너선이 잘 나간다.

글로벌 경제위기는 땅뿐만 아니라 바다에서도 몰아치고 있다. 최근 3년 동안 해운사 수는 2배 이상 늘었다. 2004년 말 73개사이던 게 지난해 말 현재 177개사에 이른다. 이들이 보유한 배는 471척에서 819척으로 급증했다. 세계 26개 항로의 벌크화물 운임과 용선료를 종합한 BDI지수(발틱운임지수)는 지난해 5월20일에 사상 최고치인 1만1793까지 치솟았다가 12월5일 663까지 추락했다.

최근 몇 년 동안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순풍을 맞으면서 물살을 가르며 항해를 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국제 해운시장의 험난한 파고와 풍랑을 헤쳐나가야만 한다. ‘닻’은 이미 올렸다. 출항이다. 두 회사는 시련을 헤치고 나가야 하는 대항해 시대를 맞고 있다.

‘여성 선장’ 현정은-최은영 리더십
도전적 열정과 춤추는 감성

현정은(54)회장·최은영(47)회장 (왼쪽부터)

국내 1·2위 해운업체인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은 나란히 ‘여성 선장’이 이끈다. 현대상선은 현정은(54·왼쪽) 회장이, 한진해운은 최은영(47) 회장이 키를 잡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남편 사후에 주부에서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전문경영인(한진해운 김영민 사장, 현대상선 김성만 사장)을 신뢰하는 스타일도 닮았다. 현 회장과 최 회장은 2007년 현 회장의 시어머니인 변중석씨가 타계했을 때 서울 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적이 있다.
현 회장은 요즘 회식 자리에서 “자신 있습니까”라고 건배 제의를 한다. 그는 올해 경영 화두를 ‘자신감’으로 정했다. 글로벌 경제위기로 대내외 경영 환경이 어려운 가운데 현대맨의 패기와 열정을 잃지 말아달라는 게 그의 주문이다.
“현대맨은 누군가 ‘자신 있습니까’라고 물으면 ‘자신 있습니다’라고 즉각 외치세요.” 현 회장은 틈만 나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 있다고 말하는 자세를 가져달라”고 당부한다. 현대의 TV 광고에도 ‘대한국민에게 묻습니다. 자신 있습니까?’라는 문구가 나온다. 현대그룹은 이 광고를 3월까지 선보인 뒤 4월부터는 이에 화답하는 ‘자신 있습니다’ 광고를 연이어 내보낸다.
‘감성경영’의 전도사였던 현 회장은 최근들어 변신한다. 현 회장은 취임 초 삼계탕, 목도리 등을 임직원과 가족에게 보내는 등 감성경영을 드러내 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카리스마로 무장하고 있다. 현 회장의 변신은 스스로 KCC·현대중공업과의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짓는 등 그룹 안팎의 신뢰를 얻은 데 따른 것이란 분석이다.
최 회장도 2006년 말 남편인 조수호 회장이 작고한 뒤 주부에서 한진해운 경영자로 변신했다. 최 회장은 남편이 별세한 뒤 1년여 동안 비워뒀던 회장직을 올해 1월부터 맡았다.
최 회장은 여성 특유의 섬세한 소통을 내세우며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임직원들을 아우르고 있다. 일상적인 경영활동은 김영민 사장이 챙기고 최 회장은 좀더 적극적으로 한진해운의 글로벌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최 회장은 대모(Godmother) 역할을 강조한다. 그는 “거스 히딩크 같은 명감독에게 전권을 위임할 때 한국 축구가 잘됐듯 한진해운도 능력 있는 전문경영인이 잘 이끌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리감있는 ‘회장님’ 대신 항공 코드명인 ‘DDM’으로 부르라고 하다. DDM은 ‘마담’과 ‘마린’을 뜻한다. 최 회장은 최근 기자들과 만나 “직원들은 공기청정기 하나만 설치해도 좋아하는데 남자들은 잘 모른다”며 부드러운 감성경영을 강조한다. 최 회장의 감성경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 회장은 지난해 스페인의 전통 춤인 플라멩코를 추면서 고객을 감동시켜 화제를 모았다. 한진해운은 지난해 초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컨테이너 전용 터미널 개발자로 선정돼 안달루시아 주정부의 부지사를 비롯해 관계자들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스페인 방문단이 한진해운 관계자들에게 같이 춤을 추자고 제안했다. 최 회장은 거리낌없이 무대에 올라가 스페인 여성과 한 팀을 이뤄 경쾌한 플라멩코 리듬에 맞춰 약 2분간 율동을 따라했다.
최 회장은 지난해 기자간담회에서 “오너 경영자로 변신한 이후 여자라고 봐주는 법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현 회장과 최 회장은 지금까지 해운업 경기가 순풍을 맞았던 시기를 거치며 순조로이 항해를 해왔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로 폭풍이 예고되는 해운업계에서 경영 선두에 나선 이들의 진정한 리더십 평가는 이제부터다.

정혁준 기자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