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와 함께하는 예컨대 | 빠른 시대와 느린 삶]
표신우/ 거창고 3학년
현대사회의 변화 속도는 과거의 그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유행의 주기는 점차 짧아지고, 온갖 신상품은 짧은 시간 안에 등장한다. 이동에 드는 시간은 점차 짧아지고, 이동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는 업무방법들이 고안되고 있다. 그리고 현대인은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빠르게 살 것을 강요당하고, 더욱 빠른 삶을 산다.
광고
인간이 빠르게 살 것을 강요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 때문이다. 산업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제한된 근로시간 안에 더 많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더 빨리 생산할 것을 사용자에게서 요구받았다. 사용자는 노동자들이 빠르게, 더 많이 만든 제품으로 이윤을 얻었다. 기업은 또 소비자에게 더욱 빠르게 소비할 것을 요구했다. 빠른 소비를 통해 기업은 더 많은 수요를 창출할 수 있었다. 또 금융은 자금의 빠른 순환을 요구했다. 자금순환이 빨라질수록 기업은 더 많은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산업사회에서 빠름은 곧 이윤의 증가를 의미했다.
정보화 시대에도 빠름이 이윤을 창출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보의 유통과 생산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정보를 소유한 자의 이익은 늘어난다. 유행의 주기가 짧아질수록 소비의 양은 증가한다. 기업간의 경쟁도 어느 쪽이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지가 승패를 좌우한다. 빠르게 정보를 얻고 빠르게 대처할수록 이익이 커진다.
현대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 과로와 스트레스를 얻는다. 빠르게 사는 삶에 적응하기 위해서 몸을 혹사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에 대한 불안과 피로를 호소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문제는 빠른 삶 속에 인간이 소외돼간다는 사실이다. 변화의 의미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변화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진정한 삶의 의미나 목표 같은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인간은 변화의 급류에 휩쓸려간다. 게다가 이러한 변화에 휩쓸려가는 당사자는 자신이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의식조차 갖지 못한다. 문제의식은 빠른 변화 속에 매몰된다.

광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은 느리게 살 것을 주장한다. 빠르게 사는 현대인에게 잠시 동안의 휴식을 권하고, 삶에 대해 사색할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현대인은 느림을 통해 휴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문제의식을 확인할 수 있다. 자신이 수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살고 있는 현실을 느림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삶의 진지한 물음들도 느림을 통해 던져볼 수 있다. 행복의 의미나 삶의 목표, 방법을 생각함으로써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다. 느림은 단순한 휴식의 의미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잃어버린 문제의식을 되찾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식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느리게 사는 삶은 한계를 지닌다. 잠시 느리게 사는 삶을 살다가도 일자리로 돌아와 업무를 손에 쥐면 삶은 다시 빠르게 돌아간다. 만약 그 자리에서도 느리게 살 것을 주장하면 그 사람은 빠름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몰린다. 빠르게 변화하는 장소 안에서 느림은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잠시의 휴식이라는 의미밖에 없게 된다.
빠른 삶의 문제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삶의 양식을 바꾸는 것으로는 구조적 모순과 대결할 수 없다. 사회구조는 삶의 양식을 규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에 어긋나는 양식은 소외되거나 무시된다. 구조를 바꾸기 전에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빠르게 달리는 기차 위에서 느리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차의 속력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기차에서 내리는 방법밖에 없다. 느림은 빠름에서 오는 이윤을 대체할 방법도 없을 뿐더러, 그러한 구조적 모순을 해결할 힘도 없다. 또한 빠름이라는 구조 속에서 느림이라는 공식을 억지로 대입하려 하면 자본주의의 특성상 사회가 마비될 수도 있다.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적극적이고 치밀한 사회 전체의 노력이 필요하다.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는 빠름에서 오는 많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생각할 시간과 방향을 제공한다는 것에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느리게 산다는 것, 그 자체는 빠른 변화를 추구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매몰돼버린다. 느리게 사는 삶이 지속적이고 의미 있기 위해서는 느림을 통해 얻는 사유의 결과물이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 그럴 때 현대인은 더 뜻 있는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광고
[칭찬과 아쉬움]
‘아차상’이 유난히 많은 한주였다. 부산 해운대고 홍준유, 청주 세광중 김원우, 서울 배명고 김병기, 부산 해운대고 최병일. 이 학생들의 글은 다른 때 같았으면 이번주 예컨대의 글로 뽑히고도 남을 만큼 수준이 높았다. 이처럼 슬로푸드 열풍을 예로 ‘빠른 시대의 느린 삶의 가능성’을 주제로 한 논술은 어느 때보다 ‘풍작’이었다. 쟁쟁한 ‘아차상’들을 젖히고, 거창고 표신우 학생의 글이 이번주 글로 채택됐다.
표신우 학생은 한국 사회를 넘어 현대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느린 삶의 가능성을 짚어본다. 그리고 암울한 전망을 던진다. 자본주의의 핵심 작동원리인 ‘이윤’이 빠른 삶을 강요하는 탓이다. 그는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빠른 삶이 인간의 ‘소외’로 귀결되었음을 지적한다.
표신우 학생은 느린 삶의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신화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의 속도는 사회구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구조를 바꾸지 못하는 한, 느린 삶은 완전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느린 삶의 허약함을 “빠르게 달리는 기차 위에서 느리게 움직이기 위해서는 기차의 속력을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고 빗댄 부분은 탁월한 통찰이다. 느린 삶에 대한 예찬이나 느림과 빠름의 조화라는 쉬운 결론으로 흐른 다른 글들과 구별되는 대목이다. 다만, 느린 삶이 가능한 사회구조를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과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한 내용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부산 해운대고 홍준유 학생의 글은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는 능력을 보여주었다. 다른 학생들이 느림에 관해 사유한 거장들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생각을 풀어간 것과 차별되는 부분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베낀 듯’ 느림하면 피에르 쌍소, 밀란 쿤데라의 책을 인용하고, 빠른 삶의 부작용으로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예로 들었다.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 위한 논술 교육마저 ‘모범답안’ 써내기로 전락하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다. 이에 비해 홍준유 학생은 풍부한 독서를 자신의 언어로 녹여내 돋보였다. 그러나 느림과 조화를 통해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만족을 함께 얻을 수 있다는 쉬운 결론으로 흘러버렸다.
청주 세광중 김원우 학생의 글은 매우 논쟁적이다. 글의 첫머리부터 그는 ‘빠른 시대와 느린 삶’이라는 주제 자체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당대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시대를 ‘빠른 시대’라고 여겼고, 자본주의에서 느린 삶이란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김원우 학생은 “물을 구하기 위해 한나절을 걸어야 하는 아프리카인에게 느린 삶은 모욕이다”라고 지적한다. 그리고 느린 삶을 살기 이전에 누구나 느리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원우 학생의 글은 중학생의 글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글 전체를 관통하는 선명한 논리와 글 사이사이의 적확한 비유가 빛났지만, “느린 삶을 살려면 금욕적인 승려가 되는 수밖에 없다”와 같은 단정으로 설득력을 잃을 때도 있었다. 추상적인 체제 고발이 반복되는 점도 아쉬웠다.
이 밖에도 부산 해운대고 김병기 학생은 느림과 게으름의 차이를 통해 느림의 진정한 가치를 설득력 있게 논술했다. 서울 배명고 최병일 학생도 외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한국어 가운데 하나인 ‘빨리빨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과속병을 질타했다. 예컨대의 좁은 지면이 아쉽기만 한 한주였다.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탄핵당하면 사람들 죽이고 분신”…경찰, 극우 협박글 내사 중
[속보] 경찰, 김성훈 경호차장 구속영장 4번째 신청
서울시, 윤석열 탄핵촉구 집회 단체에 “불법점거 변상금 부과”
민주·국힘 “윤 대통령, ‘탄핵심판 결과 승복’ 선언 해야”
오세훈 ‘부동산 시장 과열’ 책임론 커진다…“토허제 해제 성급”
유정복 인천시장, 국회 연금개혁 앞두고 “연금피크제 도입하자”
밤 사이 전국에 폭설…서울엔 ‘역대 가장 늦은’ 대설특보 예고
“1983년 부산 전포 출생 입양인 김영신…부모를 찾습니다”
미국이 ‘북한과 동급’ 삼아도 좋다고… [그림판]
[단독] 계엄 참여 사령관들의 비화폰 원격삭제 정황…경호처 서버 확보 시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