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출산’이 미국 당국의 조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주권국의 국민으로서 망신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드러내거나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지만 잠재적인 원정출산의 수요를 생각한다면 과연 남의 문제로만 치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당사자들은 자녀교육을 포함한 다양한 기회 제공을 원정출산의 첫 번째 목표로 꼽지만, 비판적인 입장은 진짜 목적이 미국 국적 취득을 이용해서 자녀가 병역 면제를 받도록 하려는 것이라거나 심지어 전쟁시에 도피하려는 기회주의적 의도로도 의심한다. 원정출산의 목적은 여러 가지일 것이며, 사회공동체의 파괴를 가져올 수 있다면 그 행위에 맞게 법적·윤리적 책임을 물으면 그만이다.
부모가 아이의 미래를 결정?
그러나 원정출산의 순수한 목적을 가정하더라도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식의 강박적인 사고가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게 안타깝다. 물론 자녀교육에 대한 부모의 열정과 관심이 아이의 성장과 발달에 절대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얼마 전, 혼자 형제를 키우는 아빠가 아이를 데리고 진료실을 찾아왔다. 아이의 상습적인 도벽과 거짓말이 문제였다. 그런데 해법은 뜻밖의 곳에 있었다. 마침 실직 중이던 아빠는 아이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고 그동안 표현하지 못한 애정을 쏟으면서 침울하던 아이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상습적인 도벽이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너무나 해맑게 바뀌었다. 태양계의 중심에 태양이 있듯이, 부모는 아이들의 중심에 있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들이 부모로부터 등을 돌리고 부모와의 대화를 단절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들의 것’이라는 자각이 생기기 시작하는 청소년 시기에 ‘부모의 못 다한 소망’을 자녀를 통해 성취하려는 부모의 무의식적 태도는 ‘말이 통하지 않는 벽’이나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폭압적인 존재’로 비추어지기 십상이며, ‘침묵 속의 충돌’을 빚는 흔한 원인이 된다.
맹모삼천지교와 같은 성공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삼천지교’가 성공사례가 될 수는 없다. ‘맹모’의 올바른 교육관이 있었고 ‘맹자’가 그 교육관을 적극적으로 따라주었기 때문에 ‘삼천지교’의 성공이 가능할 수 있었을 뿐이다. 부모의 역할은 아이의 양육에 절대적인 것이지만, 아이의 미래는 아이가 결정하는 것이다. 태양이 빛을 비추더라도 광합성의 주체는 태양이 아니다.
대학 시절 산부인과 원로 선생님의 강의가 떠오른다. 출산 과정을 강의하면서 의학 강의에서 흔히 쓰지 않는 ‘굳세게’라는 표현을 여러 차례 쓰셨던 것이 인상적이었다. 그 선생님에 따르면 흔히 ‘아이를 낳는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이가 자발적으로 굳세게 나온다’는 설명이 과학적인 사실에 부합하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 뒤로 나도 출산 과정에서 태아의 적극적인 역할과 노력을 강조하는데 ‘굳세게’라는 우리말 표현이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웃음짓곤 했다.
막상 학부모가 되면 마주치는 현실이 그리 만만치 않음을 실감할 것이라며 쓴웃음을 짓는 ‘기러기 아빠’들을 보게 된다. 아이들마저 조기유학을 희망하게 되면 대개 안 된다고 끝까지 버티던 아빠들도 두손을 들고 항복하게 된다고 한다. 기러기 아빠들의 쓴웃음은 개인적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님을 내포하는 것이리라.
‘굳센’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그러나 최소한 원정출산을 떠나는 예비 부모들에게 ‘부모의 역할이 아이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강박적인 부담에서 벗어나 있는지, 아이들의 자발적인 노력을 발견하여 북돋워주는 부모의 역할에 대해 깊이 있게 성찰한 결정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며, 불필요한 것을 부모가 강요하는 것은 ‘부모의 못 다한 무의식적 소망’이나 ‘과보호’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국정 마비나 다름 없는 지금, 떠나는 자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도, 남아 있는 자는 공동의 삶의 조건을 가꾸어가는 것의 의미를 우리 아이들 마음속에 심어주는 일이 정작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험난한 과제가 많은 이 땅에서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서도 ‘굳센’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상습적인 도벽이라는 ‘행위’보다 ‘남의 물건에 손대는 일이 나쁘다’는 도덕심을 아이에게 심어주는 것이 더 중요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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