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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이 지워버린 아내, 아일린

‘1984’ ‘동물농장’의 숨은 창작자지만 ‘내 아내’로만 기록된 아일린 오쇼네시
등록 2025-08-07 22:44 수정 2025-08-13 10:32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에서 ‘어느 까무잡잡한 이탈리아인’에게 가진 걸 몽땅 털렸다고 썼다. 거짓말이었다. 그의 소지품을 털어간 사람은 그가 몹시 좋아했던 “꼬마 창녀” 수잔이었다. 오웰이 거짓을 쓴 이유는 자신에게 사기 칠 능력이 여성에게 있어선 안 됐기 때문이다. “그랬다가는 오웰 자신의 힘이 약화되고, 그는 수치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릴 테니 말이다.”

오웰의 작품과 그를 다룬 전기 속에서 지워진 여성은 수잔만이 아니었다.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자기 삶을 바쳐 ‘조지 오웰’이라는 세계를 창조했으나 오웰의 작품에서 서른일곱 번의 ‘내 아내’라는 언급으로만 세상에 남은 아일린 오쇼네시다.

‘조지 오웰 뒤에서’(서제인 옮김, 생각의힘 펴냄)의 저자 애나 펀더는 2017년 오웰이 생의 마지막 시기에 쓴 기묘한 글을 발견한다. 명백한 여성 혐오를 담고 있는 이 글은 그의 아내 아일린을 겨냥한 것이었다. 펀더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살펴보기 위해 오웰의 전기를 모두 읽기 시작했고, 점점 오웰의 작품에서 삶으로, 오웰에게서 아일린에게로 시선을 옮겨갔다. 이후 오웰과 아일린 주변인들이 남긴 기록을 발굴하고, 두 사람의 양아들과 스페인을 방문 조사했다.

조사 결과 “세상이 어떻게 반격하는지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대화체로 된 수류탄”을 던지는 괴팍한 성격의 오웰과 달리, 아일린은 “경청하는 데 있어 비상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고 “자신이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를 마치 ‘책 속의 인물들을 논하듯이’ 할 수 있는 소설가의 본능을 지닌 사람”이었다. 아일린이 오웰의 ‘1984’보다 먼저 ‘세기말, 1984’라는 디스토피아 시를 썼고, 스탈린을 비판하는 에세이를 쓰려고 마음먹은 오웰에게 그 이야기를 “동물이 나오는 우화로 써보라고 제안”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동물농장’은 그렇게 탄생했다.

스페인 내전에서도 아일린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영국 독립노동당 스페인 지부에서 병참 업무와 선전 활동을 담당했고, 오웰과 동료들의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오웰이 쓴 ‘카탈루냐 찬가’에서 아일린은 “차와 초콜릿”을 보내주는 존재로만 잠시 나타날 뿐이었다.

“가부장제는 한 편의 허구다. 모든 주요 인물은 남성이고, 세계는 남성들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여성들은 그들을 보조하는 배역(cast), 아니 계급(caste)이다.” 펀더는 이렇게 말하며 지워졌던 아일린의 삶을 오롯이 복원했다. 632쪽, 2만4천원.

 

이재훈 기자 nang@hani.co.kr

 

 

*21이 찜한 새 책


보이저
노나 페르난데스 지음, 조영실 옮김, 가망서사 펴냄, 1만8천원

어머니의 뇌 활동을 재현하는 진료실 모니터에서 별들이 반짝인다. 피노체트 정권의 희생자들이 암매장된 아타카마사막 밤하늘에도 별들은 빛난다. 사람의 뇌(미시)와 우주(거시)가 서로를 환유하고, 엄혹했던 어머니의 기억과 칠레의 역사는 별자리 신화들과 만나 미래로 이어지는 이야기를 이룬다. 우주탐사선 보이저호의 끝없는 여정처럼. 사실의 재현이 이토록 영롱할 수 있다니!

 

 


치매에 걸린 뇌과학자
대니얼 깁스·터리사 H. 바커 지음, 정지인 옮김, 더퀘스트 펴냄, 1만9500원

자신의 치매를 10년 일찍 눈치챈 신경과 의사이자 뇌과학자가 선제적인 노력으로 병의 진행 속도를 크게 늦춘 경험을 들려준다. 꾸준한 유산소운동을 비롯해 건강한 생활습관으로 ‘인지예비능’(뇌의 병리적 변화나 노화에도 인지 기능을 유지하거나 지연시키는 능력)을 키운 덕분이다. 알츠하이머병 초기인 저자는 지금도 거의 매일 두어 시간씩 글을 쓴다.

 

 


사랑 대신 투쟁 대신 복수 대신
심미섭 지음, 반비 펴냄, 1만8천원

동성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페미니스트 활동가가 홧김에 진보정당 대선캠프에 들어가 처절한 분투기를 썼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여자친구는 한국 밖에선 차별·부조리에서 한발 떨어질 수 있어 편하다고 했지만 저자는 그렇지 않았다. 외국에서의 삶은 소수자도 아닌 투명인간 같았다. ‘탈조선’ 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을까. 페미니즘과 정치, 권력과 글쓰기에 관한 사적인 탐구.

 

 


실학자의 눈으로 본 장애 이야기
정창권 지음, 사람의무늬 펴냄, 1만7천원

정창권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는 조선 후기 문헌에 장애인이 대거 등장한다는 사실, 실학자가 이들과 활발하게 교유한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 ‘실학과 장애의 관계’ 연구에 착수한다. 실학자들은 장애를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몸의 특징으로 봤고, 장애인은 어려워서 도와줘야 할 사람이 아니라 비장애인과 똑같이 주체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했다. 청각장애 문장가 이덕수와 정약용, 홍대용, 박지원 등의 장애복지론이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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