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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소설 읽는 자녀가 걱정되시나요

판타지 등 장르소설은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편견… 독자를 ‘진실’로 인도하는 글, 욕망과 싸우는 독서가 중요
등록 2024-08-02 23:03 수정 2024-08-06 20:56
교사나 학부모와 연수를 할 때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대다수 어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교사나 학부모와 연수를 할 때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대다수 어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청소년들이 긴 글을 읽지 않는다고 합니다. 정말일까요?”

국어 교사를 중심으로 교사나 학부모와 연수를 할 때마다 이 질문을 던진다. 그러면 대다수 어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판타지소설도 안 읽나요? 에스에프(SF)는 어떤가요? 로맨스나 다른 장르도 안 읽나요? 이런 책들도 대부분 긴 글이잖아요. 길이로 따지면 아마 우리가 보통 ‘긴 글’이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더 길지 않나요?”

한국 독서계에 서브컬처란

질문을 바꿔 좀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며 물어보면 대답이 달라진다. 여전히 아예 책을 읽지 않는 숫자가 많긴 해도 장르소설이나 웹소설로 가면 “긴 글을 읽는다”고 답하는 숫자가 확 많아진다. 읽는 청소년들은 더 자주, 더 많이 읽는다. 아니 이런 ‘긴 글’의 경우에는 아예 그 세계에 빠져 산다고 한다. “걔들은 ‘덕후’입니다.”

그럼 이들이 읽는 글은 왜 ‘긴 글’로 여겨지지 않는지 물으면 재밌는 이야기가 나온다. 첫 번째로 묘하게도 ‘덕후’는 무의식적으로 셈에서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 친구들은 ‘원래’ 그런 친구들이라 ‘일반적’으로 책을 읽는다/읽지 않는다고 말할 때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반/보통’의 학생에서는 셈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어른들의 이야기에서 짐작건대 이들은 ‘그들만의 세계’에 빠져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계’의 존재로 셈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이세계(異世界) 존재여서 (걱정은 하지만) 다가서기가 쉽지 않고, 좀처럼 사이-안으로 초대할 수 없어 교사들의 세계 ‘안’ 존재로 셈되지 않는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한국의 학교와 ‘독서 세계’에서 서브컬처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에 대한 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연구 대상이 될 수 있겠다.

이보다 더 많이 나오는 이야기는 “어, 그렇네요. 긴 글을 읽는 친구들이 있긴 하네요” 다음에 바로 “하지만…”이라며 말을 흐린다. 모든 교사나 학부모가 그런 건 아니지만 그걸 긴 글이라고 인정하기 쉽지 않은 것이다. 왜 그런지 물어보면 긴 글이지만 대체로 가볍고 재미·흥미 위주이고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이며 소비적이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단적으로 말해 현실을 외면하고 도망간 독서라는 비판이다.

이 중에서 주목할 만한 평가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다. 사실 ‘긴 글’과 ‘구조적 읽기’를 중시하는 사람은 순수문학이냐 장르문학이냐를 따지지 않는다. 또한 ‘현실’에 대한 이야기여야지만 가치가 있다는 말도 아니다. 그보다 ‘현실’이라는 개념으로 하고 싶은 말은 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독자를 진실로 인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독서가 생산해야 하는 것은 진실이다. 장르의 문제는 아니다.

진실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다. 첫 번째는 주인공이 마주쳐야 하는 진실이다. 판타지 양식을 취하는 책 <몬스터 콜스>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만큼 어머니가 떠나기 바란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만화 <강철의 연금술사>도 그렇다. 두 번째는 동시대의 진실이다. 김애란의 단편소설 ‘입동’은 세월호 참사에 관한 이야기가 단 한마디도 나오지 않지만 세월호 사건이 벌어지는 동시대의 가장 가슴 아픈 진실을 이야기한다. 오래됐지만 아작 출판사에서 나온 <리틀 브라더>는 동시대 민주주의에 대한 진실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진실, 그리스 비극 이래로 모든 서사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의 운명에 대한 진실이 있다.


판타지 세계도 핍진성이 중요하다

인간은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운명에 대한 진실이건 내가 지금 살아가는 동시대에 대한 진실이건 자기 인식에 도달해야 한다. 문제는 대다수 사람은 진실을 대면해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외면하거나 망각한다는 점이다. 외면과 망각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무엇보다 자신이 망각하고 외면하는 진실이 있다는 이 현실, 이 현실을 대면해야 한다. 장르와 상관없이 이 대면을 가능케 하는 글은 좋은 글이며, 그렇지 않은 글은 짧든 길든 문제적이다. 글이 자기 인식을 촉구하는 게 아니라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말로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판타지로 도망가는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가볍건 무겁건 상관없이 (장르로서건 상징으로서건) 판타지는 ‘서사’이며 ‘서사적’이기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판타지가 판타지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기 세계가 ‘판타지’로서 분명해야 한다. 그 세계 안에서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이 분명히 갈라진다. 판타지 안에서 아무것이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에서 가능한 것만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은 것은 불가능하다. 이렇게 세계가 분명하게 구축돼 있으면 그 세계 안에서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규칙을 엄격하게 잘 따르고 활용하는 것, 즉 핍진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청강대학교 동료인 전혜정 교수가 이 점을 몇몇 강의에서 예리하고 정확하게 짚으며 웹소설과 장르문학 지망생들에게 그들이 왜 세계관을 중요시하고 핍진성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에 대해 잘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 ‘덕후’의 욕망이 왜 자랑스러운지를 역설했다. 그들에게는 지켜야 하는 세계가 존재하며 창작을 통해 그 세계를 핍진하게 구축해야 하는 ‘성스러운’ 의무가 있다. 그렇다면 이들이야말로 가장 ‘서사’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 아닌가?

전 교수에 따르면 이 핍진성의 세계가 가장 많이 무너진 곳은 다름 아닌 ‘현실’이다. 그에 따르면 순수문학은 시궁창이 된 이 현실을 직시할 것을 촉구한다. 그의 말에 한 층위를 더 보태자면 아이러니하게도 핍진성이 무너진 것을 가장 핍진하게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학이다. 그래서 이중으로 괴롭고 불가능하다. 무너진 것을 직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고통스럽고, 그것을 핍진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점에서 불가능하며 허망하다. 그렇게 구축해봤자 현실은 이미 무너진 ‘시궁창’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말은 낙후된 말이다. 이미 책을 읽건 읽지 않건 다수의 사람은 현실을 직시했다. 핍진성을 가능케 하는 세계가 붕괴했음을 말이다. 핍진성의 관점에서 (장르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표현이지만) 이 세계는 판타지 세계만도 못하다.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 사이의 구분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사이에 규칙도 없어 보인다. 세계가 붕괴하고 규칙이 존재하지 않으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동시에 가능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도 하다.

이처럼 동시대에 세계(관)가 붕괴한 상태라는 것은 다수에게 공통된 인식이다. 그 안에서 자신이 속물이나 동물처럼 산다는 자기 인식에도 도달했다. 그게 인간의 운명일지도 모른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기꺼이 허무주의적 쾌락주의자가 되어 놀랄 정도로 ‘지금 여기’에 집중하며 산다. (그래서 이 시대에 가장 사악한 인간은 자기 빼고 나머지 인간 모두가 속물이나 동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파시즘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 ‘괴물’들에 의해 도래한다.)

글읽기가 고통스러운 순간

세계가 붕괴하고 나면 남는 것은 ‘결과’뿐이다. 과정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핍진이라는 말 자체가 과정에 대한 말이다. 전혀 핍진하지 않은데 과정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의미 있는 것은 오로지 결과뿐이다. 한 교사는 “그래서 저는 몇 등급인가요?” “그래서 전 그 대학을 갈 수 있나요, 아닌가요?”라고 묻는 학생들의 말이 새롭게 이해된다고 말했다. 이게 만사를 결과 위주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가 붕괴해 일어나는 필연적 결과라는 것을 말이다.(물론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경계가 무력화된 것은 어른들과 정치가 더하다. 누구에게는 100원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 누구에게는 수천만원, 수억원도 가능하다. 누구에게는 횡령이고 배임인 것이 누구에게는 정당한 업무 내 사용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자기 세계에 빠져 산다는 덕후들이야말로 핍진한 과정이 생명인 ‘서사’에 목숨을 거는 최후의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이들은 현실을 외면하고 판타지로 도망쳤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서사적 가능성, 즉 핍진성이 파괴된 현실을 단호하게 ‘외면’하는 것이야말로 세계를 구축하는 힘을 보존하는 것이라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이 세계를 떠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것이 아니라 이 세계가 아직 세계라는 것이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저 정교한 덕후적 핍진성으로 폭로하고 있다.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덕후가 아니라 이 세계의 ‘최후의 인간’들이 아니겠는가.

분발해야 하는 쪽은 사람들이 긴 글을 깊이 읽지 않는다고 탄식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 동시대에 글(특히 문학)은 핍진하게 구축하면 판타지이고, 실패하면 글(문학)이 아니다. 이 모순과 괴리에서 살아남을 글은 몇 개 없다. 따라서 글읽기가 더 이상 현실을 직면할 의지를 고양시키는 행복이 아니라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고통이 된다. 글읽기는 여전히 행복하다면 그건 핍진한 세상이 무너졌다는 것을 외면하는, 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서사의 판타지에 매몰되는 글읽기가 된다. 반면 이 세계의 핍진성이 무너졌다는 것을 매번 확인하는 글읽기라면 그건 고통일 뿐이라 그만두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행복하다면 판타지로 도망치는 것이고, 고통스럽기만 하다면 읽을 수 없기에 ‘최후의 인간’이 되어 현실로 도망치는 것이 된다. 유독 글읽기가 이들에게는 그 어느 쪽도 ‘도망’이 되고 만다. 도망가는 독서가 되든지, 독서로부터의 도망이 되는 셈이다. “사람들이 현실을 외면하는 독서”라는 한탄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운명에 대한 이야기다.

운명에 맞서는 글/글읽기

그렇기에 여전히 글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다뤄야 하는 진실은 앞서 말한 세 가지 진실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 아닌가. 그리스 비극 이후로 계속해서 다뤄온 주제는 자신이든, 동시대든, 인간이든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운명과 맞서는 이야기였다. 독자는 그 이야기를 읽으며 운명에 맞섰다. 이 시대에 글(읽기)의 운명이 된 도망과 맞서는 읽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렇게 읽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고 말이다. 글/글읽기는 운명에 맞선다.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생겨나는 시대와 사회에 대한 고민을 같이 나눕니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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