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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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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보다 믿음이 더 쫄깃하다, <괴물>의 김수진

[22WRITERS] <괴물>의 김수진 작가 인터뷰
밥벌이 때문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글은 쓰지 않을 것
등록 2023-03-16 08:15 수정 2023-03-21 16:38
작가의 작업 책상에 붙어 있던 메모들.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는 좋아하는 박해영 작가의 말이다. ‘시체를 안겨주어야 한 다’는 잊지 않기 위해 붙여놓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욕심내는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붙여놓았다. 김수진 제공

작가의 작업 책상에 붙어 있던 메모들. ‘잘 쓰려고 하면 영점 조준이 잘못된 것이다…’는 좋아하는 박해영 작가의 말이다. ‘시체를 안겨주어야 한 다’는 잊지 않기 위해 붙여놓았다.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은 욕심내는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붙여놓았다. 김수진 제공

드라마 <괴물>(심나연 연출, JTBC)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작품이었다. 20년 전의 살인사건이 재연되는 경기도 문주시 만양 마을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살인 용의자이던 이동식(신하균 분), 신입 경찰 한주원(여진구 분)이 서로를 의심하며 극을 이끌고 나간다. <씨네21>의 2021년 한국 시리즈 평가(제1337호)에서 “배우, 작가, 연출 모두 괴물로 불릴 정도의 퀄리티”(유선주), “범인 찾기 플롯 너머, 탐욕의 시대가 적극적으로 망각하고 은폐한 피해자들의 비극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수사물”(김선영)이라고 했다. 미스터리 전문 잡지 <미스테리아>는 “놀라운 완성도”와 함께 “한국 형사물의 전통을 제대로 계승하는 동시에 관습이라는 구실하에 계속 방치되던 그 장르 내의 어떤 단점과 한계를 극복한 사례로서 두고두고 회자될”(제56호) 것이라고 평했다.

시종일관 숨 막히는 전개는 조금씩 드러내는 단서로 이뤄진다. 2회 마지막에서 이동식이 손가락을 늘어놓으며 급작스러운 전개를 더하기도 하면서, ‘진실은 무엇일까’에 대한 궁금증의 완급 조절이 탁월하다. 이 모든 상황의 연출자는 엄밀한 계산자다. 김수진 작가는 2007년과 2014년 각각 MBC 극본 공모(‘사신이 산다’)와 SBS 극본 공모(‘셰프의 레시피’) 등 두 차례 당선됐다. 2008년 MBC 시즌제 드라마 <비포&애프터 성형외과〉 〈라이프 특별조사팀〉에 참여했다. 보험사기꾼을 다룬 <매드독>(KBS)이 2017년 방송됐다. 같은 해 넷플릭스 시리즈로 타임슬립 로맨스물 <마이 온리 러브송>도 공개됐다. 김수진 작가는 얼굴 외에 신상을 공개한 적이 없으며, 전자우편 인터뷰 역시 2021년 <미스테리아>와 한 것이 유일하다. 2월 말과 3월 초에 걸쳐 전자우편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판타지 없는 묵직한 장르물 향한 갈증

―<매드독> 보험조사원, <괴물> 형사 등 장르물을 써왔다. 그런데 첫 단독 대본작은 <마이 온리 러브송>이더라.

“저는 매우 긴 시간 동안 휴먼, 로맨스를 써왔습니다. 극본 공모 당선작 두 편도 그렇고요. 꽤 오래도록 장르물을 읽거나 시청하는 건 좋아했지만 써봐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요. <매드독>도 처음 함께 시작한 SBS 오충환 감독께서 제안한 아이템입니다. 그 전엔 전쟁물 같은 것도 썼고요. 데뷔하지 못한 생계형 신인 작가 대부분은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제 안에서 그림이 그려지면 감사히 받아서 작업해왔던 거죠. 아직도 솔직히 제가 본격 장르물을 쓰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괴물>은 꽤 긴 시간 품고 있던 이야기였는데 판타지가 없는 현실 베이스의 묵직한 장르물에 대한 갈증이 제 안에 있었고, 취재도 무척 재미있던데다 ‘성인 실종’이라는 소재를 알게 된 순간 무조건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잡다하게 좋아하는 편이라, 집필 당시의 갈증과 관심 가는 소재에 맞춰 이야기를 쓰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괴물>에는 이동식도 동생(혹은 동생의 주검)을 찾지만, 안양정육점 유재이(최성은 분) 역시 어머니를 찾아서 실종자 주검이 발견됐다는 소식이 들릴 때마다 전국을 찾아간다. 마지막 부분에 성인 실종자 신고를 당부하는 주연배우의 음성도 넣었다.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는 원래, 실제 성인 실종자를 찾는 전단을 여러 장 붙여서 내보내고 싶었어요. 기다리는 가족분께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서요. 그런데 제작진 쪽이, 방송분이 해외에 나갈 수도 있고 복잡해질 수 있다고 해서, 주연배우 두 분의 음성으로 목격 신고해주시길 부탁드리게 된 겁니다.

<괴물>에선 주인공 중 한 사람을 과거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설정하고 싶었습니다. 한국은 살인사건 검거율이 굉장히 높아서 주검이 발견되면 대부분 검거 뒤 처벌되니, 설정을 위해서는 주검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 필요했죠. 대한민국에서 성인 실종자는 법적으로 가출인일 뿐임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어서 세상에 알리고 싶었고요. 그렇지만 ‘주제’에 천착해 드라마의 재미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주인공들의 사연에 녹여넣으려 노력했습니다. 드라마는 결국 ‘재미’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주제라도 재미없으면 봐주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괴물>을 작업하면서 김수진 작가는 ‘엑셀표 지옥’에 빠졌다. 방과 작업실에 모두 비슷한 엑셀표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대본이 수정되면 엑셀표 역시 수정된다. 김수진 제공

<괴물>을 작업하면서 김수진 작가는 ‘엑셀표 지옥’에 빠졌다. 방과 작업실에 모두 비슷한 엑셀표가 천장에 닿을 정도로 붙어 있다. 대본이 수정되면 엑셀표 역시 수정된다. 김수진 제공

배우 여진구가 “한주원의 이력서”라고 말한 노트

<괴물> 드라마 대본집 세트에는 드라마 대본보다 판형이 크고 두꺼운 책이 한 권 더 있다. ‘시크릿 작가 노트’에는 등장인물의 이력서와 소개서가 등장한다. ‘소개’에는 그의 과거 이력과 상처의 근원, 사람들에게 느껴지는 감정까지 들어 있다. 한주원과 유재이 등의 로맨스에 대한 암시가 있어 ‘팬서비스’로는 그만이다. 조연출이 명명하기로는 ‘삶 시리즈’다. 배우 여진구가 “한주원의 이력서”를 받았다고 해,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다. 책에는 감정의뢰서, 감정서, 참고인 진술조서, 부검감정의뢰서, 부검감정서, 수사과정 확인서, 수사보고서까지 포함됐다. 박정제(최대훈 분) 진술서 등의 몇 개는 적힌 대로 대사가 진행되기도 했지만, 보통 손에서 흔들리는 실루엣으로만 잡히는 문서들이다. 이렇게 ‘한 세계’가 저기에 있었다.

그것을 구축하는 것은 취재다. 공신력 있는 서적과 논문으로 자료조사를 시작해 일반적인 조사부터 세세한 조사까지 나아갔다.

“대개 모든 분야가 세부적으로 나뉘는데, 저는 가리지 않고 찾아뵙는 편입니다. <괴물>의 경우 주인공이 경찰이었기 때문에 처음엔 경찰청 대변인실에 부탁드렸고요. 그 뒤 실종, 살인 관련된 여성청소년계나 강력계를 중심으로 뵈었고요. 지역마다 사건 발생 현황과 민원인의 성향이 다르니까 서울권, 경기권으로 확장했다가 제주도로 기획회의에 갔을 때 여성 강력계 형사로 유명한 과장님 뵈러 서귀포에 갔죠. 또 등장인물들이 파출소에서 일하기 때문에 ‘만양’의 실제 배경이 됐던 지역의 파출소에 부탁드려서 만나뵈었고요. 저는 호기심이 많고, 하나를 알게 되면 다른 하나가 궁금해지는 성격이라 계속 더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강경찰대, 관광경찰대, 경찰 인재개발원도 갔고요. 지하철경찰대도 가고 싶었는데 못 가서 매우 아쉽습니다. 지역 개발 비리가 극 중 나오기 때문에 개발사업 하는 분도 인터뷰했고, 성인 실종법을 발의하는 보좌관을 뵈러 국회도 갈 수 있었고요. 실종자협회에는 고민 끝에 가지 않았습니다. 제 방문이 상처가 되거나 혹은 작은 기대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요. 인터뷰를 반복하다보니 자료조사를 충분히 하고 질문하면 처음엔 심드렁하다가도 어느새 열정적으로 답해주시더라고요. 6시간 이상 해준 분들도 계셨어요. 되도록 한번에 답을 주실 수 있도록 극 중 상황을 말씀드리고 세세하게 질문하는 편입니다.”

그만하자던 제작사 본부장도 대본 읽고 흥분

―취재는 어떤 식으로 대본에 반영되나.

“인터뷰에서 얻은 정보나 흥미 있는 지점을 각 캐릭터에 설정해보고요. 조화가 되는지를 따져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혼자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도 재미있을 것인지가 매우 중요하죠. 자료에 빠져서 자칫 객관화를 잃어버리면 큰일 나거든요. 객관적으로 지금 스토리에 맞는지를 들여다봅니다. 재미있다 해도 맞지 않거나 사족인지 판단하고 제외하는 건 대본 구축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괴물>을 보면 이런 드라마가 살아남은 것에 박수를 보내고 싶어진다. 앞의 내용을 모르면 뒤의 내용을 소화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드라마에는 내재된 ‘시간의 제약’이 존재한다. 시청자는 드라마의 시간 흐름대로 보게 된다. 작가는 그것을 자르고 저며내어 시청자가 보는 것을 결정한다. 그런 면에서 2회 말의 이동식이 슈퍼 앞에 손가락을 놓는 장면(20년 전의 살인사건과 같은 양상)은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서 중요한 장면이다.

“동식이 손가락을 슈퍼 앞에 놓은 건, 드라마적 장치로만 쓰지는 않았던 것 같고요. 20년 동안 묻혔던 사건을 현재로 꺼내놓는 단초라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양’이라는 동네를 너무나 잘 아는 동식이라면, 외지인인 한주원의 등장을 이용해서 사건을 물 위로 끄집어 올리기 위한 선택이었고, 당시의 동식이 너무도 절실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고 생각해요. 물론 2회 엔딩에서 손가락을 올려놓는 장면을 통해 시청자의 흥미가 유발되기 바랐던 건 사실이에요. 그렇지만 그것만을 위해 장치를 설정하면서 집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회차에서 보면 진실이 아닌데, 엔딩의 흥미 유발을 위해 시청자를 이른바 ‘낚는’ 드라마적 장치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요. 저는 선호하지 않습니다.”

―<괴물> 같은 드라마가 방송된 것은 주위의 지지와 시대적 흐름 등이 작용했을 법한데 어떤가.

“당시 제작사가 저와 로맨스물을 하고 싶어 계약한 거라 반대가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템을 이야기했을 때 재미있어하는 사람들이 있었고요. <괴물>이 편성될지 안 될지는 제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니 일단 쓰기 시작했고요. 드라마 작업은 방영까지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방영될 때 대중이 무엇을 원할지, 어떤 드라마가 대세가 될지도 알 수가 없거든요. 중간에 제작사 본부장님이 찾아와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괴물>은 대본 4회가 나온 뒤부터 지지자가 하나둘 늘어나, 그만하자던 제작사 본부장님까지도 좋아하기 시작해 6회 대본이 나왔을 때 단번에 읽고 달려와서 마구 흥분해줬어요. 이 작업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설득은, 그냥 쓰는 거, 의견을 듣고 다시 쓰는 거, 그 과정을 무한 반복해서는, 좋아해주는 사람들을 야금야금 만드는 거 말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김수진 작가의 <매드독>과 <괴물>에는 공통으로 젊고 노련한 두 명의 단짝이 출연한다. <괴물>의 이동식(신하균 분)과 한주원(여진구 분)과 <매드독>의 김민준(우도환 분)과 최강우(유지태 분). jtbc 제공, KBS 제공

김수진 작가의 <매드독>과 <괴물>에는 공통으로 젊고 노련한 두 명의 단짝이 출연한다. <괴물>의 이동식(신하균 분)과 한주원(여진구 분)과 <매드독>의 김민준(우도환 분)과 최강우(유지태 분). jtbc 제공, KBS 제공

복잡한 스토리가 OTT에선 오히려 장점

―‘복잡하다’는 방송에서의 우려가 OTT에서는 장점이 됐다. 드라마작가로서 이 상황을 보기에 어떤가.

“<괴물>은 도움을 받았죠. 그런데 OTT에서 전 회차가 스트리밍되는 드라마를 쓴다면 어떨까 생각해보면요. 매 회차를 따라간다는 건 긴 시간을 붙잡아야 하는 거니까 예전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지 않나 하는 고민은 있습니다. 초반부터 속도감 있게 전개해야 하나, 구성을 다르게 해야 하나, 캐릭터를 더 강렬하게 보여줘야 하나, 같은 고민이요. 이 산업은 다른 방식으로 계속 변화하고 그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요.”

―대본을 넘어서는 연기에 대해 이야기해달라.

“<매드독>의 주현기 역(최원영)은 점점 분량이 늘어났는데 그건 정말 ‘신’처럼 연기하셨기 때문에 제가 더 써버리고 말았거든요. 사실 <매드독> 대본을 받고서 좀 힘들었다고 하셨어요. 서재 문을 닫고 들어가 한참을 못 나왔고,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요. 하지만 고민의 결과 대본에 없는 동선과 액션은 하지만, 대사는 조사 하나도 바꾸지 않았어요. 이유를 여쭈었더니 작가가 얼마나 고심해서 썼겠냐고, 조사 하나 바꾸지 않고도 더 많은 것을 표현할 수 있다고, 그렇게 구현하는 게 배우의 일이라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배우님마다 발성이나 발음의 특징이 있을 수 있으니까, 대본 리딩 뒤 그에 맞춰 수정하는 편입니다. (여진구 배우가) 한주원 대사의 대부분을 존댓말로 처리해서 읽었어요. ‘…세요’ 같은 문장으로 대사를 써둔 것이 있었는데 ‘…니다’로 바꿔서 읽은 거죠. 제가 대본에 쓴 주원보다 좀더 경직되고 거리감이 있는 사람으로 해석한 것 같았고, 그게 매우 좋았어요. 그래서 수정했더니 한주원은 제가 처음 대본에 쓴 것보다 날이 서 있고 이성적인 인물이 됐죠.

신하균씨가 후반 대본이 나갔을 때 누구보다 동식이가 되었거든요. 글을 쓰는 저보다 더 동식을 잘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어요. 대사에 대해 제작진을 통해 연락이 와서 배우의 해석이 옳다고 생각하고 바로 수정한 적도 있습니다. 동식이 병원에 누운 어머니에게 “밥 잘 먹고 잠 잘 자고 똥 잘 싸라”는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사실 처음엔 그 대사가 아니었어요. 저는 너무 쓰고 싶은데 배우님께 ‘똥’이라는 단어를 뱉게 해도 되나 싶어서 다르게 순화해서 보냈었거든요. 제작진을 통해 연락을 받고 이토록 동식을 잘 알고 있는 배우라면 이해해주겠다 싶어서 원래 쓰고 싶었던 ‘잘잘잘’ 대사로 수정해서 보냈습니다.

사실 배우들뿐만 아니라 스태프 모두 대본을 넘는 장면을 만들어줬어요. 7회 동식이 민정의 손가락을 발견하고 집 안을 달려 방으로 들어가는 장면이나 엔딩의 강진묵 체포 때 그림자로 보인 것, 10회 엔딩에서 남상배를 구하러 달려가는 주원의 모습 등 많은 부분이 촬영, 조명 감독님 팀에서 제안해 만들어준 장면이라고 들었습니다.”

<매드독>과 <괴물>에는 속내를 독일어로 말하는 사람(김민준 분)과 러시아어로 말하는 사람(이창진, 허성태 분)이 등장한다. 두 드라마는 모두 의욕 넘치는 신참과 경험 많은 팀장급이 버디(단짝)가 되어 움직인다. 16회의 반을 나눠, 앞쪽(1~8회)에서 큰 사건을 일단락한 뒤쪽(9~10회)에서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발전시킨다. <괴물>에서는 앞에서 연쇄살인범이 잡히고, 뒤에서 이동식의 동생 살인사건의 진실이 파헤쳐진다. <매드독>에서는 앞부분에 보험모집자와 보험사기범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뒤에서 비행기 사고를 위장한 거대 권력이 드러난다. 앞부분 뒤뚱거리던 주인공 두 명이 뒷부분 협력관계로 변모한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의 모습은 <괴물> 문주시 만양읍으로 스며들었다. 건축 중인 아파트가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모습(위)과 교하파출소(아래 가운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니다가 영감을 받는 사진을 찍는다(아래 오른쪽). 작업실에 놓여 있던 <괴물>의 등장인물(박정제)가 그릴 만한 사슴 오브제(아래 왼쪽). 김수진 제공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의 모습은 <괴물> 문주시 만양읍으로 스며들었다. 건축 중인 아파트가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모습(위)과 교하파출소(아래 가운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니다가 영감을 받는 사진을 찍는다(아래 오른쪽). 작업실에 놓여 있던 <괴물>의 등장인물(박정제)가 그릴 만한 사슴 오브제(아래 왼쪽). 김수진 제공

특징 없는 것보단 주제의식을 밀어붙이는 게 낫다

김수진 드라마에서 또 다른 키워드는 ‘믿음’이다. ‘의심’이 스토리를 이어가는 힘인 <괴물>에서 이 ‘믿음’은 의심의 끝에 다다르는 결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극을 추동하는 힘이다. 시청자를 혼란에 빠뜨리지만 나중에 보면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최선으로 신의를 지켰다. 의심이 극의 힘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믿음이 극의 힘이었다. 한주원이 이동식을 의심하며 주변인들까지 의심할 때 이동식은 말한다. “내가 감싸고 있는 사람 누굴까? 알아맞혀보세요.” 이동식, 한주원 둘 다 의심의 한가운데서 인간을 믿고 싶었다.

그리고 ‘정의구현’이 있다. <매드독>의 마지막 회에서도 최강우(유지태 분)가 경찰이 체포하러 오자 “죄가 그뿐이 아닐 텐데요, 천천히 이야기해보시죠” 하면서 팔을 내민다. <괴물>에서 역시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무리한 이동식은 처벌받고 징역까지 살게 된다.

―단순한 우연을 공통분모로 한 것일 수 있고, 드라마적 관행을 과도하게 김수진 드라마의 특징으로 묶은 것일 수 있다. 김수진 드라마는 어떤 것이 특징이다, 는 것으로 기억됐으면 하는지.

“데뷔를 못하는 동안 제가 창고에 차곡차곡 넣어둔 것들이 두 드라마에 공통으로 들어간 것 같아요. 오랫동안 제가 좋아했던 설정과 주제인 거죠. 계속 그렇게 쓸지에 대해 고민 중입니다. 다르게 써보고 싶은 욕망이 있지만, 가져올 결과가 두렵기도 해요. 제가 좋아하는 설정이나 주제로만 계속 쓴다는 게 자기복제인 듯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매드독> 황의경 감독이 특징이나 색이 없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말씀해주셔서 힘이 되기도 했습니다. 고작 2편을 해놓고 이런 고민을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원하는 제 드라마의 특징이라면, 밥벌이를 위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는 글은 쓰지 않더라, 정도 아닐까 싶어요. 지금까지 같은 마음으로 일했으니 앞으로도 그러고 싶습니다.”

―다른 드라마와 달리 팀원이 서로의 믿음을 저버리고 배신하지 않는다.

“신의를 지키고, 제 분수를 알고,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고 싶은데 그렇게는 살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니 드라마 속 인물에 대리만족하고 싶은 것 같아요. 제가 멋져 보이는 인물, 존경할 만한 인물을 만들고 사랑하면서 그들의 인생에 어느 한순간을 써나갈 수밖에 없는 거죠.”

―한주원을 피해자 여성에서 남성으로 바꾼 것이, 그 상황에 몰입하는 것이 괴로워서라고 했다. 드라마를 쓰면서 감정이입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드라마 속에서 ‘사람’을 다루고, 시청자라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환경에서, 그것은 재능인가 골칫거리인가.

“실제의 저는, 사람을 좋아하지만 감정이입을 잘하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실존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어렵고요. 거리두기, 관찰하기, 상상하기를 매우 좋아합니다. A4 속의 인물과 지내는 시간을 더 편안해하는 것 같기도 해요. 쓰는 사람이 등장인물을 잘 알지 못하고 사랑하지 않으면서 시청자가 아껴주기를 원하면 염치가 없는 거 아닌가 싶고, 제작이 들어가기 전까지 꽤 긴 시간을 저와 인물들끼리 보내기 때문에 사랑할 수밖에 없죠.”

작업하면서 영감받는 것을 곁에 둔다. <괴물> 작업 때 참조한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풍광을 찍은 사진집(아래, 리처드 미스래치·케이트 올프의 <페트로케미컬 아메리카>)과 현재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 많이 보고 있는 이노우에 히로키의 여우 사진집. 1~2년 뒤 어떤 모습의 드라마로 나올까. 오른쪽은 최근 구매한 1970년대 도서출판 광장의 사진집, 선물받은 일본 도쿄의 빈 거리를 찍은 <아무도 찍히지 않는다> 사진집. 김수진 제공

작업하면서 영감받는 것을 곁에 둔다. <괴물> 작업 때 참조한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풍광을 찍은 사진집(아래, 리처드 미스래치·케이트 올프의 <페트로케미컬 아메리카>)과 현재 드라마 작업을 하면서 많이 보고 있는 이노우에 히로키의 여우 사진집. 1~2년 뒤 어떤 모습의 드라마로 나올까. 오른쪽은 최근 구매한 1970년대 도서출판 광장의 사진집, 선물받은 일본 도쿄의 빈 거리를 찍은 <아무도 찍히지 않는다> 사진집. 김수진 제공

작은 돌멩이들이 모여 물길을 바꾼다

―“악인에게 마이크를 주지 말라”고 <괴물>의 한기환이 청문회장에서 말한다. 범죄를 옹호하는 건 아니지만, 사연을 만들면서 범인에 대한 연민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범죄자에게 사연을 주는 것이다. 모든 장르물 작가의 고민일 법하다.

“(연쇄살인마) 강진묵도 설정해둔 라이프 히스토리가 있습니다. 불운한 환경이 강진묵 같은 살인마를 만들었다는 사연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설정하는 매 순간 고민했지만, 불운한 환경이 그의 잠재된 악한 천성을 발현하게 되는 계기일 수 있기에 필요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걸 면죄부로 보이게 쓰고 싶지는 않아요. 범죄자가 어떤 삶을 살았고 범죄 당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설정하되, 피해자에게 상처가 될 지점은 극에 드러내지 않는다, 가 제 기준점인 것 같습니다. 참 어렵죠. 감히 어떻게 제가 상처가 될지 아닐지 결정할 수 있을까요. 또 너무 신경 쓰다보면 시청자가 빌런의 행동을 이해 못할 수도 있어요. 제 밥벌이를 위해 누군가 상처받게 하지는 말자고 되뇌며 항상 공중에서 외줄 타는 심정으로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매드독> 마지막 회는 많은 사람이 회자하면서 ‘사이다’ 장면으로 언급된다. 숨죽였던 피해자들이 등장해 권력을 향해 작은 돌멩이를 던진다. 부실 항공편의 운행, 권력자에 대한 작은 이들의 반란 등이 세월호와 촛불집회가 연상됐다.

“과하게 드러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세월호와 촛불집회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돌멩이들이 모여 해결하는 것이 반드시 엔딩이어야 했어요. 사회적·정치적 이슈에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지만 제 직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렇지만 드라마의 재미를 방해하면 안 되니까 아무도 몰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쓰긴 했는데,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 나라의 여러 장르물을 볼 것이다. 어떤 작품을 좋아하나. 그런 것들이 드라마에도 녹아드는 편인가.

“장르물에 국한하지 않고 눈으로 보는 모든 걸 좋아합니다. 우울하거나 머리를 비우고 싶으면 장르소설을 일주일 내내 보기도 하지만 사람 죽는 장면을 너무 많이 봤다 싶으면 자기 전에는 무조건 로맨스 영화를 봅니다. 그림을 보는 것도 좋아하고 사진집을 모으기도 하고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하는 편이에요.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그 모든 경험과 감정이 제 안의 어떤 창고에 쌓여야만 이야기를 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씩 꺼내 쓰다가 창고가 비워지기 시작하면 채워넣어야 다시 쓸 수 있겠죠. 그래서 집필 작업이 오래 걸리는 편인 것도 같고요. 언젠가 제 드라마에 그때의 그 감정이 불쑥 튀어나올 수도 있을 겁니다. 창고에 담아둔 최백호 선생님의 노래 <부산에 가면> 덕분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괴물>에 나올 수 있었던 것처럼요.”

―드라마 작업을 위해 메모를 어떤 식으로 하나. 캐릭터 혹은 역사적 사건 등을 기록하는 방법이나 새로운 발상을 메모하는 방법 등을 알려달라.

“휴대전화 메모장이나 카카오톡 ‘나에게 보내기’로 그냥 다 써둡니다.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 세세하게 적어놓으려 노력하고요. 만약 다큐를 보다가 떠오른 감정이 있다면 적어두는데, 다시 읽으면 모를 때가 있어요. 그러니 다시 보고 기억하기 위해 분초까지 적어두는 편입니다.”

드라마의 매력은 함께 만들고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

―소재에서 시작하는 편인가. 인물에서 시작하는 편인가. 분위기로 시작하는 편인가.

“때마다 다른데요. 공통적으로는 지금 내가 무엇을 보고 싶은가에서 시작합니다. 내가 가지는 현재의 갈증에서 시작하죠. 도넛을 하나 팔려고 해도 시중에 어떤 도넛이 있는지 시장조사 하는 게 당연하니까 방영되는 드라마는 무조건 보려고 하는데, 시청자가 어떤 지점에서 각 드라마를 좋아했는지 고민해봅니다. 그러다보면 나는 뭘 보고 싶은가, 나는 어떤 것이 재미있는가, 되묻게 되고요. 내가 보고 싶고 내가 재미있는 것, 모든 이야기는 거기서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행복하게 쓰고 계신가. 기획한 드라마가 제작에 이르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드라마의 매력’은 무엇일까.

“음, 이 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진심으로 감사하고 행운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제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매력’은 함께 만들고,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하는 것인 듯합니다. 드라마 작업은 공동 작업을 기반으로 매우 지난한 과정을 거치는데요. 글 쓰는 일을 좋아해도 공동 작업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매 순간 괴로울 겁니다. 다행히도 저는 과정을 즐거워하는 편이라서요. 대본은 항상 구멍이 있기 마련인데 여럿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어 답을 찾고, 반영해서 수정한 신이나 대사가 훨씬 좋아졌을 때 행복해집니다. 세상엔 천재가 너무 많아요. 저 따위의 평범한 인간이 그분들과 함께 일한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행복해지고요. 시청자가 세심하게 시청해주고 인물들을 사랑해줄 때 정말 기쁩니다. 데뷔하지 못한 때보다 한편 한편 방영할 수 있게 되면서 드라마 집필하는 업을 더 좋아하게 돼서, 현재는 다른 어떤 것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작업하는 게 가장 행복한 순간인 것 같아요.”

구둘래 기자 anyone@hani.co.kr

가위의 여러 형태를 사랑한다. 선물은 거절하는 편인데 가위는 무조건 받는다. <매드독>에 출연한 최원영 배우가 선물한 가위·자 세트(맨 왼쪽). <괴물> 방송 1년 기념으로 팬들이 카페를 열었다. 카페로 가는 길 모습과 커피잔. “마침 근처에 약속이 있어 몰래 다녀왔다.” 작가는 드라마 종영 뒤 받은 선물도 보관하고 있다. “만들어주신 만양 수건과 술잔 모두 잘 쓰고 있습니다. 와인은 아까워서 셀러에 고이 보관 중이고요.” 김수진 제공

가위의 여러 형태를 사랑한다. 선물은 거절하는 편인데 가위는 무조건 받는다. <매드독>에 출연한 최원영 배우가 선물한 가위·자 세트(맨 왼쪽). <괴물> 방송 1년 기념으로 팬들이 카페를 열었다. 카페로 가는 길 모습과 커피잔. “마침 근처에 약속이 있어 몰래 다녀왔다.” 작가는 드라마 종영 뒤 받은 선물도 보관하고 있다. “만들어주신 만양 수건과 술잔 모두 잘 쓰고 있습니다. 와인은 아까워서 셀러에 고이 보관 중이고요.” 김수진 제공


에필로그
작가가 길게 써서 보내준 하루 일상을 본문에 반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이 꼼꼼하고 완벽할 것 같던 김수진 작가에게서 발견한 ‘멍미’다.
“인터넷 세상에서 아주 긴 시간 검색과 쇼핑도 좀 하고… 다들 그렇잖아요? 바로 일하고 그러는 거 아니잖아요? 저도 똑같이, 즐거우나 일에는 도움이 안 되는 시간을 길게 보내고요. 그러다가 대본도 좀 쓰고… 책도 좀 보다가… 저는 밥도 컴퓨터 앞에서 먹거든요. 책상 앞을 떠나지 않고 할 수 있는 건 다 합니다. 가끔 게임도 합니다. 게임은 오충환 감독님의 추천으로 시작했어요. 게임에 익숙한 시청자가 드라마를 보는 세상이니 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셨는데, 사실은 플레이스테이션과 닌텐도를 사고 싶었습니다. 갖고 싶다가 아니라 ‘사고 싶다’에 방점이 찍혀야 해요. 사고 나니 저는 흥미를 잃었고, 저와 함께 사는 동반인이 게임의 세계에 입문하게 됐죠.”
성실함의 극을 달릴 것 같은 그는 자신을 게으르다고 했다. 만나보지 않은 입장에서 일단 믿어본다. “저는 정말 성실하지 않고요. 한없이 게으른 인간입니다. 스스로 얼마나 게으른지 알고 있기 때문에 작업실을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구합니다. <괴물> 작업실은 집 현관에서 작업실 현관까지 5분이 채 안 걸리는 곳이었고요. 지금 작업실은 집과 같은 아파트 단지에 있어서 1분 컷입니다. 최근에 집과 작업실을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는데 관계자가 조언해주길 집 앞에 얻지 말고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구하라고. 일과 개인의 삶을 분리해야 오래도록 일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어요. 올해 계획은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것도 시도해보자, 여서 거리를 두고 구해보자고 마음먹었지만, 차로 15분은 정말 자신이 없더라고요. 결국 걸어서 15분 정도 걸리는 곳으로 정했습니다. 저를 믿을 수 없어서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작품 목록
<괴물>(JTBC, 2021년) 20년 전 연쇄살인이 발생한 문주시 만양읍. 쌍둥이 동생이 살해당한 이동식(신하균 분)은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물로 인해 범인으로 몰린다. 20년 뒤 경찰이 된 이동식과 그를 범인으로 확신하는 경찰대를 수석 졸업한 한주원(여진구)이 만양파출소로 오고, 다시 만양읍에 연쇄살인이 발생한다.
<매드독>(KBS, 2017년) 보험사기를 조사하는 회사 ‘매드독’을 소재로 했다. 보험사기지만 보험사기를 저지르는 사람보다, 보험액을 제대로 정산하지 않는 보험회사 등 거대 권력에 더 초점을 뒀다. 부기장의 자살 비행으로 알려진 항공기 사고의 진실을 알고 싶은 부기장의 동생 김민준(우도환 분)과 보험회사 조사관 출신 최강우(유지태 분)가 멱살 잡고 으르렁거리다 정이 든다.
<마이 온리 러브송>(넷플릭스, 2017년) 가상 결혼 버라이어티쇼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MBC)에 커플로 출연했던 씨엔블루의 이종현과 공승연의 타임슬립 로맨스물. 장르물 이전에는 ‘줄기차게’ 로맨스물을 썼다는 작가의 의외의 작품.
〈비포&애프터 성형외과〉 〈라이프 특별조사팀〉(MBC, 2008년) 시즌드라마. ‘성형외과’는 시트콤이고 ‘라특조’는 보험조사원이 등장하는 장르물이다. ‘라특조’는 <매드독> 집필의 인연으로 이끈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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